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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엘과 함께

A4용지 편집판 (한글97)
B5용지 편집판 (한글97)

마엘과 함께 책과 앨범
마엘과 함께는 입대를 기념해서 저의 세번째 앨범과 함께 100부 출판되었습니다.

공짜로 배포한 탓인지 현재 완전 소진되어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으니, 아쉬우신 분은 아이올리브에서 마엘과 함께를 구입하세요. (아이올리브는 한권 단위로 출판하기 때문에 책값이 매우 비싸며, 저자에게 지급되는 인세는 책값의 2%입니다)


책을 시작하며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책의 첫머리에서 ‘펄프를 제공해 준 나무에게 감사하다’고 썼다. 도대체 얼마나 감사할 사람이 없으면 그래 굳이 나무에게까지 감사해야 했을까. 하긴 지금 여기서 책을 시작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구차한 변명이라도 좋으니 제발 아무한테나 감사하고 싶다. 지금까지 얼마나 외골수로 살았길래 감사할 사람 하나 없는거야. 남들은 말이야 유명한 이름 대가며 감사하다, 덕분이다, 이 책을 바친다, 추천사에 감상평에 감수에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 아주 도배를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 내가 이렇게 사회력 없는 인간이었나.

하긴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남에게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래도 인정을 받은 건 딱 한번 있는데, 국민학교 5학년 때 ‘눈높이 글짓기 교실’에서 은상 받은 것. 웬 동화작가란 사람이 나와서 “글은 진솔(진실+솔직)하게 써야한다”길래, 최불암 시리즈 책을 보는데 중간중간에 야한 여자 사진이 나와서 부끄러웠다… 이런 얘기를 썼더니 대뜸 은상을 준거라. 그래서 얼씨구나 내가 글을 잘 쓰는 줄 알고 진솔함을 모토로 온통 부끄러운 얘기만 써온 지 어언… 몇 년이냐. 하여간 글짓기 교실 은상, 만약 그때 은상을 안 받았으면 지금까지 글이랍시고 이것저것 써왔을까. 생각해보면 야 나는 참 별거 아닌 것에 목숨 거는구나, 그 동화작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아무나 상 준걸 가지고 내가 괜시리 오버하는 것 아니냐, 참 별 생각이 다 든다.

어찌됐건 이렇게 별거 아닌 이유로 별거 아닌 사람이 쓴 별거 아닌 글이지만, 그래도 굳이 책으로 내는 이유라면, 역시 그냥 두긴 아깝달까. 이제 곧 군대도 가는데, 혹 군대에서 의문사라도 당하면 어떡해. 그러면 유작으로 남은 이 책이라도 부둥켜안고 울고 그러라고 이러는 거지. 원래 이쯤 되면 ‘실력은 부족하지만 모쪼록 즐겨주세요’ 같이 겸손 차리는 말도 나올 타이밍이지만, 원래 내가 겸손을 모르기도 하고, 이 책이 좀 특별하기도 해서 한마디 하자면, 에헴.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잘 부탁합니다. 아앗 이게 아니던가. 일단 체면 차려서 나쁠 건 없겠지. ‘싸이’도 봐봐. 가수들이 1위해서 눈물 짜는 거 다 사기라고 비판했다가, 정작 자기가 1위하니까 자기도 눈물 흘리고 그랬잖아. 생각하는 거랑 직접 하는 거랑 같지가 않다니까. 예를 들어 내 글도 언뜻 볼 때는 별로 같지만 막상 읽으면 죽이는 것처럼.

2003 08 18
기껏 공부한 OCP-DBA 시험이 센터 사정으로 취소돼서 열 받은 아침에





















01/10 - 마엘과 함께

때는 서기 2029년.

세명의 젊은이가 길을 걷고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작도, 하늘, 카이 세명이다.

“으아~ 배고프고 돈도없고 힘들어 죽겠다.”
일행 중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의 작도 아저씨가 말했다.

“안되겠다. 다음 마을에서 아르바이트 뛰자.”
샛노란 색으로 탈색한 단발머리의 여가수 하늘이 말했다.

“찬성하오.”
날카로운 눈매 샤프한 인상의 소년 카이가 말했다.

“야, 너 방금 ‘하오’라고 했냐. 그 30년 전에 유행했던 하오체를 지금 개그라고 한거냐.”
“너 15살밖에 안된다며.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15 살 이다 지구 온 후로 세는 나이.”
카이는 자칭 토성인이다. 15년 전 연구목적으로 지구에 날아왔다고 한다.

“나는 하오체 안다. 너 무시한다 토성의 지구 과학 수준!"
“야, 토성에도 지구과학이 있대. 나 그거 고등학교때 배웠는데.”
“그래? 난 화학.”

카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들과 여행한지 오래 되었지만, 카이는 아직까지도 토성인이라는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토성 최고의 지구과학자라는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된다. 아아, 나는 지난 15년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인가…

“카이, 삐졌어?”
하늘이 카이의 팔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하늘은 ‘그러면 안돼’는 표정을 짓더니 ‘이제 괜찮아?’는 표정을 짓고 고양이처럼 뺨을 슥슥 문댔다. 카이의 표정은 금방 풀어졌다.
카이에게 하늘은 현지처였다. 고향에 두고 온 마누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구를 사랑하는 과학자로서 이렇게 젊고 싱싱한 육체를 그냥 두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에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 미안한 생각에 오른쪽 팔 옆을 내려다보았더니, 영문도 모른채 하늘이 씨익 웃어준다. 카이도 미소로 응답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작도는 아주 속이 뒤틀렸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맨날 저렇게 찰싹 달라붙어 지내는 꼴이라니. 내심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보다 못한 작도는 콧방귀를 뀌며 못본체 시선을 돌렸다.
애써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오우 이게 왠 떡이야.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야! 이것봐! 아르바이트 광고야!”

- 아르바이트 모집 -
이웃나라로 사람 배달해주실 분. 전사 우대. 완료시 3천만원 즉시 지불.

“음…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긴 하는데.”
“어찌‰怜?보수는 짭짤하군.”
“할만하겠다.”
“찬성하오.”
재밌냐?응? 재밌냐?응? 재밌냐?응? 재밌냐?응? +_+ =3

* * * * *

찾아간 곳에는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문패에는 ‘이스’라고 적혀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스 라엘’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작도’입니다. 옆에는 ‘하늘’, ‘카이’라고, 제 (웬수같은) 동료들입니다.”
“아 그러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기 죄송하지만, 잠시 화장실에 좀 다녀와도 괜찮겠습니까.”
“네. 저 쪽으로 가시면 있습니다.”
귀족 집안답게 깍듯한 대우를 받은 터라 왠지 불편한 작도였다.
저 아저씨는 내가 화장실 가는데 기다리지도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자식 마엘이라구요, ‘이스 마엘’입니다. 얘가 말썽이라서요. 하하하…”
웃음소리는 넓은 응접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저희 이스 가문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풍습이 있습니다. 7살부터 10살까지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로,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로 성을 바꿔서 가르치는 건데요. 이렇게 해서 상대방의 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남자아이는 더 남자답게, 여자아이는 더 여자답게 키운다는 것이죠.”

‘마엘이라…’
화장실로 걸어가면서 작도는 생각했다. 귀여운 이름인걸, 마엘.

“그런데 이 마엘 이놈이 말썽인 것이…(멀어져가는 소리)”
탁 탁 탁.
화장실 안에서 뭔가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음소리도 들렸다.

뭔가를 눈치챈 작도는 주의를 확인하더니 화장실 틈새로 훔쳐보기 시작했다. 긴 드레스를 치렁치렁 늘어트린 금발머리의 곱상한 아이가 얼굴을 붉히고 뭔가를 한창 움직이고 있었다.
‘마엘이라고 했지… 흐흐흐’

숨이 거칠어졌다. 뭔가가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작도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작도는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뭐야!”

그 순간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발사되어 작도의 얼굴에 명중했다. 그곳에는 막 자신의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사춘기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고운 얼굴에 뺨을 붉힌 채로. 그의 이름은 마엘이었다.

* * * * *

“하아… 그래서 이 녀석을 좀 남자로 키워달라 하는 말입니다. 아니 이녀석이 나이를 먹도록 계속 여장을 해요. 그래서 이웃나라에서 무슨 성호르몬 주사를 한다는데, 남성호르몬 주사를 맞히면 남자다워 진다고 하니까 그걸 좀 부탁드리는 겁니다. 가는 길에 트레이닝도 좀 시켜 주시구요. 씩씩하게 말입니다. 하하…”
“아아, 네… 그런 얘기였군요…”
“일단 착수금으로 천만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호르몬주사 값으로 1억원입니다.”

그런 얘기였다. 지금 여러분의 앞에는 쵸빗츠의 치이를 닮은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그러나 남자아이 마엘이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마엘은 이제 막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상태.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치~이? (계란 굽는 소리)”

* * * * *

- 호르몬 주사라고 했지.
- 네.

- 그것만 맞으면 남자다워지고, 여자다워진다고?
- 네.
- 그런데 꽤나 비싸다고 합니다. 적어도 1억은 줘야…

- 돈은 문제가 안돼. 그래, 그건 어디가면 있지?
- 그게 잘…
- 이번에 호르몬 주사를 사러 가는 일행이 있다고 합니다.
- 사진 여기있습니다.

- 그래, 이 녀석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이거군.
- 그렇습니다.

“저기 있다.”
여자가 바라본 곳에는 막 마을 밖으로 나서려는 작도, 하늘, 카이, 그리고 마엘이 있었다.

“그럼 잠시 갔다오마. 그동안 잘 있어라.”
“누님! 크흑…”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걱정마라. 난 반드시 돌아온다.”
“누님!!!”
매몰차게 돌아서는 모습에 수많은 남정네들이 그만 눈물을 쏟았다.
그는 이 지역 최고의 조폭, ‘누님파’의 두목이었다.

* * * * *

“멈춰라!”
일행의 앞을 가로막는 한 조폭마누라가 있었으니.
“내 이름은 제타. 너희들이 호르몬주사를 구하러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거기가 어디냐. 어서 빨리 대답하지 못할까!”

일행은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걸음을 서둘렀다.
“마엘, 어서 가자.”
“어… 뭐야?”
“말려들면 귀찮아져.”

손을 끌려가며 마엘은 이상한듯 제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그만 제타는 뺨을 붉히고 말았다.
‘귀엽다♡’

저런 귀여운 아이랑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난 맨날 우락부락한 땀냄새나는 거한들이랑 있었는데… 아, 정말 귀엽다…
제타가 망상의 나라로 떠난 사이 마엘은 제타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앗 잠깐, 기다려! 같이 가!!”

이렇게 그들은 마엘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2003 07 10


셀프인터뷰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만나다

작도는 최근 말도 안되는 소설 ‘마엘과 함께’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의문의 작가, 작도를 만났다. 너부대대한 얼굴에 불쑥 나온 똥배가 가희 그의 전적을 연상케 했다. 그는 내일모레가 시험인데 내일 조조로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기로 했다며 시험공부를 더 해야 할지 아니면 내일 볼 영화를 위해 일찍 자야할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Q 먼저 셀프 인터뷰를 하게 된 동기라면.
A 아무도 인터뷰를 해주지 않기에 별 수 없었다.

Q 내일 볼 ‘브루스 올마이티’는 재밌을 것 같나.
A 설령 재미가 없더라도 나는 반드시 재미있게 보고 말 것이다. 특히 프렌즈의 레이첼 역을 맡고 있는 제니퍼 애니스톤 사마가 출연하신다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 쏘냐. 많은 우매한 관중들이 짐 캐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지만, 그건 잘못이다.

Q 하지만 짐 캐리가 주연인데.
A 당신도 뭘 모르는군. 이런 바보 똥개 멍청이.

Q 조금 열받지만 다음으로 넘어가자. 요즘 ‘마엘과 함께’가 인기다.
A 거짓말이다.

Q 물론이다. 방송용 멘트다.
A 방송도 아닌데 그런 멘트 날려봤자 어따 쓰나.

Q 아까부터 자꾸 시비다.
A 됐다. 넘어가자.

Q 이게 넘어가자고 하면 단가. 사과해라.
A 나중에 우리집에 오면 시원한 사과주스 만들어 주겠다. 화 풀어라.

Q 싫다. 코 풀거다.
A 휴지 여ƒ…다.

Q 고맙다.
A 천만에.

Q ‘마엘과 함께’의 인기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A 없다. 전혀.

Q 정말인가.
A 그렇다.

Q 인터뷰에서 그러면 안된다. 나도 분량 채워야 되고. 사정 좀 봐줘라.
A 사정하는 건 봐줄 수 있다.

Q 푸슉.
A 끝인가.

Q 끝이다.
A 조루로군.

Q 이게 아까부터 죽고싶나.
A 나는 조루를 조루라고 말했을 뿐이다.

Q 조루는 너무 심했다. 고추라고 해라.
A 고추로군.

Q 좋다.
A 계속하자.

Q 요즘 ‘마엘과 함께’가 아주 난리다. 극중 캐릭터인 ‘하늘’의 인기만 해도 장난이 아니다. 다음 까페의 하늘 팬클럽의 회원수만 해도 만 칠천명에 달한다.
A 그거 김하늘 팬클럽이다.

Q 그런가.
A 그렇다.

Q 김하늘은 좋아하나.
A 머리모양은 귀엽다고 생각한다.

Q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봤나.
A 보고 싶었으나 크게 보고 싶진 않아서 결국 안 봤다.

Q 로망스는.
A 1회 보다 말았다.

Q 재미가 없었나.
A 재미는 있었다. 단지 나는 1시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다시보기를 볼만한 체력이 없었다. 나는 그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있어서, 한회 분량이 20분을 넘기면 인내심을 잃었다. 하지만 뉴논스톱은 재밌게 봤다.

Q 그게 언제적 얘긴가.
A 한창 장나라가 뜨던 시절이었다.

Q 장나라는 좋아하나.
A 그럭저럭. 이젠 너무 망가져서 귀엽지도 않다.

Q 장나라 골수팬인 나에게 그 말은 모욕이다.
A 당신은 참 쉽게 열받는다.

Q 집안 내력이다.
A 고혈압도 유전이라더니.

Q 이런 똥배가.
A 뭐야 이 대갈장군이.

Q qusxo.
A 그 말은 맞다.

Q 그런데 이걸 뭐라고 읽나.
A '쿼슥소'라고 읽는다.

Q 좀 더 자세한 정보는.
A www.qusxo.com 에 가보면 안다.

Q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
A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나.

Q 나도 모르겠다.
A 이게 뭔가. 짜증난다.

Q 또 시빈가.
A 시비 아니다.

Q 짜증난다며.
A 날씨가 덥다는 얘기였다.

Q 선풍기라도 틀자.
A 에어콘은 어떤가.

Q 냉장고도 시원하다.
A 졸리다.

Q 자라.
A 그래.

이렇게 더운 여름날 평화롭게 인터뷰는 끝났다. 우리는 이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작가주의적 모습을 더욱 엿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수고하신 작도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정리/ 작도

2003 07 11


02/10 - 세컨드 임팩트

때는 서기 2029년.
세컨드 임팩트가 일어난 지도 벌써 30년이 지났다.
세기말이다 뭐다 해서 떠들석하던 1999년, 정말로 대재앙이 일어났다. 일례로 전기, 통신, 석유. 이 3개가 끊겼으니 말 다했지. 세계 곳곳에는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소환되고, 정부는 통제력을 잃었다.

작도는 그때 막연히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아아, 정말로 이랬으면 좋겠다…”고 바랬던 것을 후회한다. 정말로 세컨드 임팩트가 일어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파란만장하던 시대에 작도의 아버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작도는 복수를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하긴 그때만 해도 낭만이 있었다. 세컨드 임팩트 시대에는 낭만이 있었다. 칼 한자루만 쥐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지. 너도 나도 전사가 되던 시대였고. 당장 도시 외각으로만 벗어나면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들끓었으니, 그걸 칼질하면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작도의 모습은 어떤가. 아버지의 복수는 흐지부지 해지고, 당장 내일의 끼니가 걱정인 백수 전사의 모습이 지금 작도의 현주소였다. 벌써 나이는 50에 가까워져 심신은 지쳐 가는데 어디 기댈 곳도 없고, 여전히 세상은 아수라장이고, TV도 인터넷도 휴대폰도 안 되고, 몬스터도 여전하다. 세상의 속도가 느려진 건 어찌 보면 다행이지.

음악을 들은 지 정말 오래 되었다. 세컨드 임팩트 전만 해도 많이 들었는데. 모닝구무스메도 듣고 초난강도 듣고. 참 그때만 해도 좋았지. 음악을 들은지 몇십년이 지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정처없이 걷는데 어디선가 멀리서 묵직한 우퍼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콘서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전기가 끊기고 통신이 끊기고 석유가 끊긴 시대에 이런 둥둥거리는 우퍼 소리를 만날 수 있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기적이었다. 게다가 무대 위에 있는 건, 여.자.였다. 우먼 프론트였다. 삐삐밴드의 이윤정을 연상케 하는 방정맞은 여자아이가 무대 위에서 아주 지랄을 하면서 뛰어다녔다. 나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현장감이었다. 아아 나는 분명히 그 곳에 있었다. 라이브였다… 눈물이 흘렀다.

“그게 너였어, 하늘.”

하늘은 얼굴을 붉혔다.
“어머, 방정맞은 여자아이가 지랄을 하면서 뛰어다녔다니 칭찬이야 욕이야, 어떡해 꺄아☆”
‘너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_-;;’

그런데 이놈들이 아주 나쁜 놈들이었다. 콘서트를 빙자해 돈을 뜯는 콘서트공갈단이었다. 여기서 노래를 불렀던 게 하늘이고 돈을 뜯었던 게 카이다.

마엘이 물었다. “그런데 서로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된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억나지 않아.”

카이가 말했다. “최면술 사용했다.”
하늘이 말했다. “나쁜 기억은 잊는 게 좋아.”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던 거냐 이 녀석들아 +_+ =3

 

최면술이라… 카이는 생각에 빠졌다. 토성인 으로서 지구에 온지도 벌써 15년, 그동안 공갈단에 최면술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서 빨리 연구결과를 가져가서 지구과학 발전에 이바지해야 될 텐데,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 거냐… (여기까지 토성어로 생각한 내용)

카이가 어두운 표정을 짓자 하늘이 찰싹 달라붙었다. 하늘은 바디 랭귀지를 좋아했다. 원래가 연예인 지망인 탓에, 어휘력보다 연기력이 뛰어났다. 특히 하늘의 표정연기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토성인도 살살 녹아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카이가 웃는 진짜 이유를 하늘은 모르고 있었다. 토성에 두고 온 딸아이랑 너무 닮아서라는 것을…

딸아이 생각에 미안해진 카이가 멋쩍게 웃어보이자, 영문도 모른 채 하늘도 따라 웃었다. 겉으로 보기엔 참 화목해 보였다.

“이 녀석들… 특히 하늘, 이따 밤에 두고 보자.”
작도는 투덜댔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사에 시달려가며 자꾸 흐려지는 두 눈을 보면
이미 지나버린 나의 어린시절 꿈이 생각나

“작고 깨끗하던 나의 꿈이 생각나 그때가 생각나 어 어”
무심코 랩을 해버린 작도였다.

“아니 제타, 니가 어떻게 이 노래를 알아?”
“이거 유명하잖아. 하늘색 꿈이라고.”

하늘색 꿈. 이 노래는 세컨트 임팩트 2년 전에 나왔던 노래다.
“당신, 도대체 몇 살이야.”
“당신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껄.”

일행은 제타의 겉모습을 유심히 훑어봤다. 저게 화장이란 말이야.
‘말도 안돼…’

“참나, 이름이 하늘이라니 말도 안돼. 지가 무슨 가수라고. 그렇지 마엘?”
제타는 마엘의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다.

“본명이야!”
하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참나, 그 자식에 그 부모로군. 자식 이름을 그따위로 짓다니. 그렇지 마엘?”
제타는 마엘에게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무시하듯 말했다.

“뭐야! …아니 그보다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화장 시켜주잖아.”

“걘 남자라구!”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나의 헐리우드 초특급 화장술을 보여주지.”
50대 아줌마가 20대로 보인다는 소문의 그 화장술 말인가.

헐리우드 초특급 화장술
헐리우드 초특급 화장술 예시 (주: 모델은 제타가 아닙니다)
관련 만화: OL비주얼족
관련 캐릭터: 헌터x헌터 - 비스케

- 잠시 후.

“이상해.”
“뭐가 이상하니 마엘? 저 아줌마 이름이 이상하다고? 오호호호”

“느낌이 이상해.”
“속눈썹을 찝어서 그래. 예뻐지려면 참아야지. 아이 착하다.”

일행은 숨을 죽이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술과도 같은 광경을 지켜봤다. 사실 마엘도 여자 같다 싶을 정도로 예쁘기는 했지만, 거기에 제타의 초특급 화장이 더해지자 정말 놀래 자빠질 정도였다.

‘말도 안돼…’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식은땀을 흘렸다.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쿵쾅쿵쾅.

“자, 어디 보자. 아이 예쁘다.”
제타는 자랑하듯 모두에게 돌려 보였다.

마엘은 제타를 붙잡으며 말했다.
“무서워.”

“뭐가 무섭니 마엘?”
“모두 무섭게 쳐다봐.”

“귀여워서 그러는 거야.”
“그런데 왜 무섭게 쳐다봐?”

“맛있어 보여서지.”

크앙~ 으르르르.
고양아 이리온 쯧쯧쯧쯧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하자.

2003 07 23


셀프인터뷰 2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또 만나다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또 만났다. 그는 전보다 더욱 초췌해진 모습에 의욕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단순히 날씨가 더워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도 사실 인터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갖다 댔다.

Q 잘 지내셨는가.
A 그럴 리 없지.

Q 전에 드린 정액은 잘 계시고.
A 밥에도 비벼먹고 샐러드에도 무쳐먹고 잘 쓰고 있다.

Q 브루스 올마이티는 재밌었는가.
A 재미 만빵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무슨 영화를 재미없게 보리.

Q 시험은 어땠나.
A 떨어졌다. 그게 다 브루스 올마이티 탓이다.

Q 왜 영화 탓으로 돌리나. 공부 안한 당신 탓 아닌가.
A 무슨 소리냐. 그 영화가 재미없었다면 그렇게까지 내 마음이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부 영화 탓이다.

Q 내일도 시험 본다며.
A 그렇다.

Q 이번엔 영화 안보나. 핑계거리 찾아야지.
A 이번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볼까 말까 생각중이다.

Q 왜 고민인가. 그냥 봐버리지.
A 실은 propellerhead사의 Reason 2.5를 받았기 때문에, 그쪽이 핑계거리로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번에 사운드 쪽의 이펙터가 많이 추가돼서 기대만빵이다.

Q 역시 핑계거리일 뿐이군. 항상 그런 식인가.
A 나란 인간이 원래 좀 그렇다.

Q 그래서 마엘과 함께도 쓰레기고.
A 이게 저번부터 아주 신경을 박박 긁는다.

Q 지난 2회도 맛탱이였다.
A 칭찬인가.

Q 초난강이 왜 나오나. 그건 2002년에 발매됐다. 설정에도 안 맞고.
A 실은 초난강의 ‘정말로 사랑해요’를 들으면서 2회를 썼다.

Q 모닝구무스메랑 초난강이랑 무슨 상관인가.
A ‘쯩쿠’라고. 프로듀서가 같다. 초난강을 계기로 알게 되었는데, 모닝구무스메도 좋아하게 되었다.

Q 귀여워서?
A 귀엽다기보다 엽기다. 이상한 점을 좋아한다. 이인자라는 의미도 그렇고.

Q 이인제?
A 원래 모닝구는 오디션에서 떨어진 애들 모아다가 만든 그룹이다. 그런 이유로 부담없이 막 나가는 것 같다. 그런 점이 좋다.

Q 그래서 마엘과 함께도 막 나가는 것인가.
A 그렇다. 나는 랜덤에 의존한 창작이 좋다.

Q 역시 쓰레기로군.
A 저번부터 도대체 왜 계속 시빈가. 같은 작도 주제에 너무한다.

Q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A 무슨 소린가.

Q 나도 작도고 너도 작도다.
A 그건 그렇지.

Q 나는 나인 동시에 너다.
A 뭔소리야.

Q 나는 개그를 좋아한다. 하지만 개그는 폭력이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어느 정도까지 용인되는지는 전적으로 상호간의 신뢰관계에 달려있다. 그런 이유로 현실세계에서는 개그를 하기가 힘들고 조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어떤 개그든 용인되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A 그것이 마엘과 함께의 세계인가.

Q 정확히 말하면 ‘마인드 식스’의 세계관이다.
A 그런데 거기 작도가 왜 나오나.

Q 원래 자기가 만든 것을 자기 소유로 하고 싶은 것이 창작자의 마음일 것이다. 영화감독도 연기력만 받춰주면 영화주연이 되고 싶어 할껄. 작곡가도 자기 노래는 자기가 부르고 싶을 테고. 그게 여건이 안돼서 못하는 거지 하고 싶은 욕구는 매한가지다.
A 그래서 자기 작품에 자기가 출연한 건가.

Q 그렇다.
A 하지만 그건 문제가 있다.

Q 실제로 그렇다. 미녀 삼총사의 제작자인 드류 베리모어를 보자. 그는 제작자인 동시에 배우이다. 그런 이유로 자기 배역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 그런 탓에 미녀삼총사를 보면 알겠지만 그가 주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돌아간다. 영화 안에서 다른 캐릭터는 전부 그의 노예일 뿐이다. 카메론 디아즈가 다시 출연하기를 거부했던 이유도 그런 면 때문이었을 것 같다. 왠지 드류 베리모어에 끌려 다니는 것 같아서.
A 작도도 그런가.

Q 비유하자면, WWE에서 스토리 결정권을 가진 선수 같은 것이다. WWE가 각본대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부 선수는 워낙 입김이 센 탓에 각본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전에는 스톤콜드가 너무 심하게 스토리에 개입하다가 쫓겨난 적도 있었다.
A 하지만 작도는 본인이 작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세컨드 임팩트도 실은 작도가 일으킨 것이다.

Q 사실인가.
A 사실이다. 당신은 너무 에반게리온에 빠져서 그만 '세컨드 임팩트가 정말로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당신은 작가이기 때문에 마음먹은 일은 정말로 일어난다.

Q 신이로군.
A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는 신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자신을 전지전능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거다.

Q 그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다 되겠네.
A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당신은 절대로 자기 능력을 자각할 수 없다. 그것이 설정이다.

Q 무서운 설정이군.
A 당신도 작가지만 나도 작가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만 당신은 안 된다.

Q 같은 사람이라며.
A 당신은 설정된 자아다. 내가 인터뷰를 원하면 기자가 되고, 마엘과 함께를 쓰면 전사가 된다. 일종의 대역이라고 할 수 있다.

Q 뭐야 이런 정액에 밥 비벼먹을 놈아
A 뭐라고 이 마엘이랑 떡을 칠 놈아

Q 그건 욕이 아니다.
A 그런가. 당신 표정을 보니 내심 바랬던 것 같다.

Q 바라면 이루어지나.
A 정말이다. 하지만 그건 좀 시간이 걸리고, 일단 다음 화에서는 하늘과의 SM플레이가 준비되어있다. 기대하시라.

Q 신난다.
A 이 맛에 작가를 하는 거다.

Q 나도 작가할래.
A 그럼 그 세계 안에서 작가가 되라. 내껀 못 넘겨준다.

Q 어쨌든 잘 부탁한다.
A 이쪽이야말로.

처음과 달리 왠지 즐거운 기분으로 인터뷰가 끝났다. 아아 어서 빨리 3회가 시작했으면 좋겠다. 기대된다. 나는 그 안에서 어떤 모습일까. 기대되는 하루였다.

정리/ 작도

2003 07 24


03/10 - 사랑

서기 2029년.
이 시대의 밤은 어둡다. 전기가 끊긴 탓이다. 마엘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지글지글 (불타는 소리)
침묵이 흘렀다. 다들 지친 표정으로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작도가 애써 입을 열었다.
“하아, 이제 이 짓도 지겨워. 오늘도 도대체 몬스터가 몇 마리야.”
작도는 칼을 꺼내 불꽃을 베었다. 칼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작도는 녹이 슬까봐 걸레로 피를 닦아냈다.

여전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작도는 말을 이었다.
“마엘, 이제 좀 견딜 만 하니? 힘들지 않아?”
“응…”

마엘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하염없이 불꽃만 바라보았다. 어깨끈 밑으로 가슴근육이 보이는 것이 묘하게 섹시했다.

마엘도 처음에는 야리야리한 몸이었지만, 이제는 어깨도 벌어지고 근육도 생겨서 꽤나 건장한 체격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특히 제타가 한술 더 떴다. 아침마다 한 시간 이상을 소문의 할리우드 메이크업을 하느라 보냈다. 그런 얼굴로 치렁치렁한 주름을 펄럭이며 다져진 몸으로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참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나, 그거에 빠진 거 아닐까, 그거…

“와, 별똥별이다.”
하늘이 하늘을 가리켰다. 작은 빛이 하늘에 스크래치를 내고 사라졌다.

“모두들, 소원 빌었어?”
“빌 소원이 어딨어, 명복이나 빌어줘야지. 저거 사람 죽었을 때 떨어지는 거잖아.”

“뭐야 재수없게. 난 소원 빌었는데.”
“무슨 소원?”

하늘은 대답 대신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카이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하늘의 목젖이 움직였다. 작도는 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꼴 보기 싫어 등을 돌렸다. 하지만 애써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마엘과 제타가 마치 TV드라마라도 보듯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작도는 더 이상 꺼낼 말이 없었다. 카이는 하늘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사랑해.” 하늘이 말했다.
“사랑해.” 카이는 생각했다.

“12세기다. 사랑이 발명된 때. 사랑을 만든 사람이 있었다.”
저 별도 그 사람의 별이 아니었을까. 처음 이 지구에 사랑을 가져다 준 사람, 그 사람의 이야기.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15세 토성인 소년 카이는 눈을 감고 천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다. 이것도 단순히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여흥일 뿐이다. 부유하는 시간 사이로 찰나의 끈을 잡은 카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덧붙이자면, 이 이야기는 실화다.

 

⊙ ‘콩깍지가 씌었다’ - 이성을 마비시키는 사랑의 호르몬
본래 지구인에게는 육체적인 사랑, 즉 섹스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레벨로 “생식을 위해서는 섹스가 필요하다”는 것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서, 일단 괜찮다 싶은 상대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사랑’이라는 호르몬 분비의 프로세스가 시작된다. 맨 처음 분비되는 호르몬은 도파민으로,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씌었다’ 하는 것이 이런 호르몬의 분비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분비되는 페닐에틸아민은 이성을 마비시켜서 앞 뒤 안 가리고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시토신이 분비되면 격렬한 성욕이 일어나 상대를 안게 한다.

⊙ 사랑의 기간은 18개월 ~ 30개월
이렇게 사랑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기간은 짧게는 18개월에서 길게는 30개월 정도이다. 약 2년에 불과한 시간이다. 보통 이 사이 섹스를 해서 아기를 가지는데, 이 후로는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약 5년간 분비되어 육아의 고통을 덜어준다. 이렇게 해서 총 7년간의 호르몬 분비가 끝나면 사랑은 식는다. 화이트의 ‘7년간의 사랑’이라는 노래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이 후의 시기를 갱년기라고 하는데, 보통 이때 불륜이 시작된다. 다른 상대를 만나서 중단된 사랑 호르몬의 분비를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

⊙ 결혼이라는 이름의 족쇄
불륜은 결혼이 있기에 존재한다. 결혼이 없으면 불륜도 없다. 애초에 동적(Dynamic)인 사랑을 정적(Static)인 결혼으로 묶어두려는 것이 잘못이다. 결혼이 생긴 이후로 지구인은 타고난 호르몬 분비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사랑이 식은 채로 수십 년을 그저 늙어 죽어야만 했다. 그래서 지구인은 오랜 역사를 거쳐 결혼이라는 족쇄를 무력화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고, 그 방법 중 하나로 나온 것이 ‘사랑’이라는 개념의 재정의(Overriding)였다.

사랑의 개념이 섹스를 구심점으로 한 육체적 의미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유럽, 막 사교계가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로 보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지 루카스’를 보자. 그는 사교장에서 우연히 훔쳐 본 귀부인 ‘아드린느 발라드’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서로 사랑했지만 아드린느는 유부녀였다. 사랑은 식었지만 결혼은 유효했다. 조지 루카스는 아드린느를 설득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개발(Development)했다.
즉 사랑은 불륜을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조지 루카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드린느에게 소개시켜 주면서, 사랑만 있으면 결혼도 상관없고 신분이 달라도 상관없고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 이 말은 마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불륜을 정당화시켰다. 둘은 사랑의 도피를 했다.

이후 유럽의 많은 음유시인들이 사랑을 노래했다. 사랑만 있으면 뭐든지 다 된다며 사이비 약장수처럼 온갖 수식어구로 사랑이라는 말을 치장했다. 그렇게 천년동안 사랑이라는 단어는 발전(Version up)해왔고, 비록 만들어진 말이지만 실제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 수많은 연인은 시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조지 루카스의 힘을 빌어서.”

카이는 토성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을 생각했다. 토성인의 사랑 호르몬의 분비기간은 17년으로, 지구인보다는 길지만 그래도 짧은 기간이다. 그나마 토성의 결혼은 호르몬 분비에 맞추어 17년간만 지속되게 되어있다. 토성인의 수명을 따지면 평생 적게는 5번에서 많게는 11번까지 사랑을 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지구로 올 때 카이는 아내와의 결혼기간이 다한 후였다. 하지만 호르몬의 분비가 끝난 후에도 기억은 평생을 남는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말했다.

“사랑해.”
카이는, 토성에 두고 온 딸아이를 닮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비록 현지처일지라도, 대용품일지라도 좋았다. 여자를 안고 싶었다. 카이는 하늘을 몸이 부서져라 꼬옥 안았다. 하늘은 갑자기 무서웠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입술을 빨렸다.

“쳇.”
제타도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마엘의 뒤에서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마엘, 저렇게 아무데서나 몸을 허락하는 싸구려 여자를 뭐 하러 보는 거니?”
“싸구려 여자라니!”

“저런 걸레 같은 년이랑은 친하게 지내면 안돼, 알았찌 마엘?”
“걸레라니, 말 다했어?”

제타는 하늘이 얄미웠다. 저렇게 뜨겁게 사랑받을 수 있다니. 다들 보는 앞에서 갑자기 키스를 하질 않나. 저게 뭐야, 에잇 저런 부러운 짓을…

제타는 어려서부터 인기가 많았다. 무섭지만 멋있달까. 보이쉬한 매력에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자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정작 남자에게 고백을 하면 번번이 거절당했다. 너무 기가 드세다는 이유로 조금 사귀다가도 금방 채여 버렸다.

제타는 인기가 많은데도 애인이 없었다. 차라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편이 편했다. 특히 예쁜 여자애들을 보면 몹시 부러웠다. 마엘 같은 애를 보면 자꾸 참견하고 싶고 그랬다. 나도 저렇게 여자 같으면 사랑도 받고 그럴 텐데. 왜 난 남자 같은 걸까.

제타의 헐리우드 메이크업도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화장을 지운 제타의 얼굴은, 조직폭력배의 두목이라는 말이 납득이 갈 정도로 무서웠다. 두꺼운 화장으로 감춘다 해도, 남자 같은 얼굴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제타는 못생긴 여자들을 싫어했다. 특히 하늘같이 예쁘지도 않으면서 잘도 남자를 꼬셔서 노는 것들이 제일 꼴 보기 싫었다. 저년은 여자 같지도 않으면서 무슨 놈의 사랑을 한다는 거야. 나는 이래서 남자도 못 사귀는데, 젠장.

그래서 제타는 여성호르몬 주사를 받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이다. 여자다워지기 위해서. 사랑받고 싶어서. 조폭 두목이라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테요. 한 여자의 어긋난 순정이었다.

* * * * *

“에잇, 아까의 복수다!”
“아아아. 맨날 복수래. 복수는 무슨.”

“아까 내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아? 정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좀 살살해. 아프잖아.”

“참나, 아픈 건 오히려 이쪽일껄.”
“그런가.”

“저기 크림 좀 발라줘. 이쪽은 빡빡해서 힘들다구.”
“이것도 거의 다 써가. 좀 아껴써야지.”

“헉헉. 으으.”
“…”

“하늘, 너 이러는 거 카이가 아냐?”
“당연히 모르지.”

“그런데 아까는 뭐야.”
“사랑해?”

“사랑한다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는?”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이런 건 너랑 밖에 못하니까.”

“…”
“왜?”

“좋아?”
“왜 확인하려 들어?”

“나야 좋지만.”
“몰라.”

“감추는 거야?”
“묻지 마.”

“…”
“…”

“앗 뜨거.”
“뭐야?”

“불똥이 튀겼나봐.”
“어디 어디.”

작도와 하늘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타다 남은 모닥불을 들고 제타가 서있었다. 제타는 눈이 휘뚱그래져 있었다.

“저… 정말… 걸레였잖아…”
“제, 제타.”

“이런 부러운 년아! 그 허리춤에 멜빵딜도는 도대체 뭐야!”
“아니 이건말야…”

제타 폭주.

 

제타는 둘을 마구 패면서 좀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상해.”
“뭐가 이상하니, 마엘.”

“왜 존댓말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음… 그건 말야,

- 사랑하는 사이에는 존댓말 같은 건 필요 없어.

그 사랑이 이런 사랑이었냐 +_+=3

2003 08 18


셀프인터뷰 3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아직도 만나다

밖에는 비가 오려는지 마려는지 우중충한 날씨였다. 후덥지근하고 척척하고 침침해서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는 오늘, 이것도 일이라는 생각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Q SM플레이라며.
A 뭐?

Q SM플레이라며!!!!!!!
A 아, 그것 말인가.

Q 흑흑, 믿었던 내가 바보지.
A 그래도 불똥은 튀겼잖아.

Q 그건 제타잖아!
A 아아, 이봐. 진정하고. 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장면은 흐름상 맞지가 않아서.

Q 그런데 왜 내가 대주는 쪽이야!
A 그 편이 어울릴 것 같아서.

Q 흑흑. 포르노 배우들의 심정을 알겠어…
A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Q 자자, 그만하고.
A 그건 내가 할 대사지.

Q 실은 좋았다.
A 그럴 줄 알았어.

Q 그게 아니야!
A 그럼 뭔데.

Q 아팠어.
A 아프지만 좋았어.

Q 진짜로 아팠다구!
A 진짜로 아프지만 진짜로 좋았어.

Q …
A 사랑은 아픔인거야~

Q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A 장난이다.

Q 나한텐 장난이 아니야!
A 나한테 그래봤자…

Q 하긴 그렇다.
A 인터뷰나 하자.

Q 이번 편은 좀 어려웠다.
A 어려운 적 없어.

Q 그냥 어려웠다고 치자.
A 정 그렇게 말한다면. 읽기는 어땠을지 몰라도 쓰기도 어려웠으니까. 2화에서 3화 사이에 한달 정도 시간이 빈다. 사랑은 어려운 테마였다. 나는 이번 편을 위해 도서관에서 엄청나게 책을 읽었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내용이 탈락하고 ‘사랑의 발명’이라는 오페라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연애경험 한번 없으면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정말 한마디 한마디가 힘들었다.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애인이 생긴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존댓말 쓰던 사이가 반말 쓰는 사이로 바뀔 때, 그것만큼 가슴이 무너지는 건 없다.

Q 그럼 이번 이야기는 일종의 분풀이였나.
A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Q 맞다, 시험은 붙었나.
A 5번 봐서 2번 붙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2번의 시험을 더 치러야 한다.

Q 제발 이런 거 쓰지 말고 공부 좀 해라.
A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9월에 책을 내려면 빨리 써놔야 한다.

Q 그거 내봤자 아무도 관심 안 가져준다.
A 나도 그 점은 아쉽다. 하지만 어차피 자기만족이라 상관없다. 마침 나의 3번째 데모앨범의 수록곡도 확정되었고, 이제 대충 정리가 되어간다. 나도 빨리 마엘과 함께의 엔딩을 보고 싶다.

Q 엔딩을 생각해놓긴 한건가.
A 생각은 해놨는데, 좀 별로다 싶어서 고민 중이다. 하긴 이런 시트콤에서 대단원의 막을 바란다는 게 무리기도 하지만.

Q 3화 쓰는 데만 한달 가까이 걸렸으면서 잘도 9월까지 쓰겠다.
A 나도 걱정이다. 쓰다보면 술술 써질 때도 있고 잘 안 써질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 4화 “눈물”과 5화 “하늘색 하늘”은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거라 쉬울 것 같지만, 6화 “폭력”이나 8화 “장래희망”은 정말 걱정이다.

Q 그러게 좀 쉬운 테마를 잡지 그랬어.
A 전부터 이런 생각이 있었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포장해서 전달하자. 하지만 어려운 주제는 아무리 포장해봤자 쉽게 변하지 않는다. 결국 어려운 건 어렵게 전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번 사랑에 대한 얘기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려운 얘기도 하고 싶긴 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균형감각 이라고 생각한다. 쉬운 얘기도 있는가 하면 어려운 얘기도 있고. 그래서 4화에서는 오랜만의 가벼운 분위기로 돌아간다.

Q 다음 화에서도 당하는 신이 있나.
A 조금 다른 의미로 그렇다. 3화를 기점으로 작도는 당하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글을 쓰다보면 나도 통제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기획은 다르게 했는데 흐름상 어쩔 수 없이 설정이 바뀌는 것이다. 특히 작도가 그렇고 카이가 그렇다. 카이는 원래 설정의 반도 못 나오고 있다. 이 대로면 처음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Q 카이가 원래 어땠길래.
A 엽기 캐릭터였다. 좀 잘난 체 하는 구석도 있고. 떠벌떠벌대고. 특히 도에 관심이 많아서 사이비 도인 같은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카이는 나이어린 현자에 가깝다.

Q 당신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 같다.
A 물론 큰 틀은 짜놓고 한다. 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그런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여러 작품에서는 그렇게 해도 충분히 재밌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Q 어떤 작품이 그랬나.
A 최근에 본 다케이 테아시의 “이사”가 그랬다. 엄청 감동 먹었다.

Q 다케이 테아시라니?
A “무한의 주인” 그린 사무라 히로아키랑 그림이 똑같(다고 본인이 주장)은 사람 있다. 특히 안노 모요코가 “젤리 인더 메리 고 라운드” 끝부분에서 써먹었던 만화 외적인 이야기를 만화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법이 너무 좋았다.

Q 뭔 소리야.
A 난 솔직히 만화를 볼 때 후기를 보기 위해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가들의 신변잡기는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몰라.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을 볼 때도 뒤에 좌담회부터 봤다. 그뿐만이 아니라 TV를 봐도 하루 종일 해주는 게 연예인 신변잡기 아니야. 특히 2da의 허접질을 보면서, 나는 나와 전혀 관련 없고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내가 그 잡담에서 전혀 공감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어찌‰暎?신변잡기는 재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중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편보다 후기가 더 사랑스럽다. 그래서 마엘과 함께도 인터뷰가 반이다.

Q 결국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거잖아.
A 그렇다.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이야기”에서 김영하씨가 영화리뷰를 빙자한 자기얘기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칭찬으로 들렸다. 사실 예전에 게임피아에 애니메이션 리뷰 쓸 때 나도 그랬거든. 나는 그때 그냥 쓱 읽고 지나칠 수 있는 글이 되기를 원했다. 마치 영화 배경음악 만드는 사람이, 음악을 튀게 만들 것이 아니라, 음악이 영화에 묻혀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정말 나의 글은 잡지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잡지는 망했다.

Q 그게 당신의 운명이다.
A 나는 중요하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나처럼 맨날 자격증 시험이나 군대문제 같은 무거운 생활에 압박받는 피로한 영혼에게, 가볍고 중요하지 않은 일상이 되고 싶다. 이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Q 팔리지는 않겠다.
A 그게 나도 고민이다. 이대로는 프로로서의 가망이 없다. 뭔가 생각을 바꿔야 하긴 할 텐데, 일단 마엘과 함께를 완결할 때 까지는 이 생각을 유지해야겠지.

Q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한 것 같다.
A 아까 처음에 당신의 불평만 없었다면 말이지.

Q 나는 당신이 싫다.
A 싫어해도 소용없다. 힘없는 사람의 호오는 무의미하다.

Q 나는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 거지?
A 앞으로 7회 남았다. 왜 그리 나쁘게만 보는 건가. 하늘과 그런 게 그렇게 나쁜가.

Q 그게 아니라…
A 마엘과 하고 싶다는 건 어떻게 됐나. 물론 금방은 아니지만 후반부에 마엘과 떡도 치고 그럴 텐데 뭐가 걱정인가.

Q 그랬나. 몰랐다. 헤헤.
A 단순하군.

Q 뭐라고?
A 아무것도 아니다.

Q 그럼 수고해라.
A 당신이야말로.

밖에는 어느덧 비가 추적추적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마엘과 함께도 이제 막 캐릭터소개가 끝났을 뿐이다. 작도는 실낱같은 희망을 쥐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정리/ 작도

2003 08 23


04/10 - 눈물

서기 2029년.

제타와 하늘이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 무슨 국을 끓이는 것 같다.

“간이 좀 싱겁다.”
“소금이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어.”

“그래?”
갑자기 하늘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더니 눈물을 국에 넣고 잘 젓는 것이었다.

“음. 짭짤해진 게 간이 맞네.”
“하늘 너…”

“뭐? 간이 아직도 안 맞는다고?”
하늘은 다시 한번 눈물을 국에 쏟았다. 이 틈을 타서 콧물도 같이 흘러내리는 것을 제타는 목격하고 만다.

“자, 먹어봐. 제타.”
“아… 아니, 저기… 나 오늘 식사는 됐거든?”

“아니 왜, 아까는 배고프다며.”
“-_-;;;;”

“후훗. 겨우 눈물 정도에 기겁하다니. 수련이 부족하군, 제타.”
갑자기 나타난 작도가 말했다.

“나 때는 말이야, 사나이는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해서 말이야. 아 정말 힘들었지. 오줌으로 간을 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렇다, 작도.”
“뭐야 카이!”

“오줌과 눈물은 대부분 일치한다 그 구성 성분이. 즉 오줌이나 눈물이나 그게 그거다.”
“녀석! 너는 나를 이해해주는구나!”

작도는 카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틈을 타서 자리를 빠져나가는 제타였다.

 

~즐거운 식사시간~

 

“그나저나 하늘, 눈물로 간을 보기 시작한지는 얼마나 됐어?”
“그거야 자취생의 생존전략이지. 꽤 됐어.”

하늘은 품에서 조그만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누리끼리한 액체를 국에 조금 넣었다.

“아, 이거? 이건 내가 정말 아끼는 거야. 정말 특별할 때만 쓰는 조미료지.”
“뭐야, 나도 좀 줘봐봐.”

하늘은 작도에게도 그 요상스런 액체를 조금 부어주었다.
후르륵 후르륵. 작도는 뭔가 달짝지근하면서 비릿한 맛이 나는 것이 좀 이상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내 10년 된 눈물.”

푸훅. 토악질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작도였다. 저 멀리서 힘겹게 배고픔을 참고 있는 제타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우리 누나가 그랬어. 눈물은 소중하다고. 한 방울도 헛되이 흘려보내면 안 된댔어.”
‘그런 녀석이 국에는 첨벙첨벙 흘리냐… -_-’

“아무리 슬프고 괴롭게 흘린 눈물이라도 소중하다고 그랬어. 이 눈물도 그래. 이 눈물은

 

- 내가 10년 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질 때 흘렸던 눈물이니까.

 

서기 2019년.

하늘은 긴 생머리의 병약한 미소녀(라고 본인은 주장하)였다. 아직 세상을 모르던 어린 처녀 하늘, 그런 그녀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하늘의 첫사랑은 같은 마을에 살던 꾀죄죄하게 턱수염 난 화가 아저씨였다. 나비가 훨훨 날아가고 꽃들이 웃고 있는 모습을 랄랄 랄랄랄라 랄랄 랄랄랄라 콧노래를 불러가며 아주 예쁘게 그리고 있었어요.

화가 아저씨는 언제나 말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캔버스에 처덕처덕 물감을 문대가며 느릿느릿 그림을 완성해가는 재미도 없는 모습을 하늘은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샴푸 냄새나는 긴 생머리를 치렁치렁 흩날리며. 분위기로 치면 조용한 전지현 같았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단 둘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하늘은 좋아했다.

어느 날 화가 아저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모델이 되어 달라는 말이었다. 하늘은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기뻐서 쉽게 허락했다. 하늘은 의자를 끌고 저만치 가서 다소곳이 앉았다. 화가 아저씨는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항상 옆모습만 보다가 처음으로 시선을 받으니까 왠지 부끄러웠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도 화가 아저씨는 계속 흘끗흘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화가 아저씨는 고개를 옆으로 기웃했다. 하늘도 뭔가 이상했다. 그림 안에는 샛노란 단발의 여자가 있었다. 하늘은 물었다. 아저씨, 이게 뭐에요.

“이건 내가 아니잖아…”

무슨 의미에서였는지 화가 아저씨는 갑자기 하늘의 손을 움켜잡았다. 하늘은 무서웠다. 드디어 올게 왔구나. 하늘은 눈을 꼭 감았다. 이내 긴 생머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하늘은 영문도 모른채 심하게 저항했다. 그 바람에 가위가 헛나가 살갗이 찢어지고 옷이 찢어졌다. 머리가 어지간히 잘리자 화가 아저씨는 하늘의 머리에 노란색 물감을 덕지덕지 칠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모습은 그림 속 여자의 모습과 점점 닮아갔다. 격렬한 저항 끝에 하늘은 간신히 도망쳤고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하늘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슬픔의 눈물이었다. 처음으로 가슴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 지금 이 감정을 소중히 간직하자. 하늘은 자신이 흘린 눈물을 잘 받아서 조그만 병에 담았다. 그 후로 수많은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며 흘린 눈물도 조그만 병에 담아 소중히 간직했다. 기쁨의 눈물, 노여움의 눈물, 서러움의 눈물… 병에 담긴 눈물을 바라보며 하늘은 끊임없이 되물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를 사랑했던 걸까.”

하늘은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는 삶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작품 안에서 가상의 삶을 살며 수많은 사랑을 되풀이했다. 수많은 사람을 접하며 수많은 감정을 접했지만 하늘은 여전히 화가 아저씨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지? 그 사람.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지? 나. 그런데 왜 엇갈렸던 거지? 나와 그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늘은 점차 연예인이 되어 갔다. 연기도 하고 가수도 하고 코미디도 했다. 사람들은 하늘을 좋아했다. 그러나 하늘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사랑을 받으며 하늘은 생각했다. 좋으니?응? 좋으니?응? 좋으니?응? 좋으니? 응?

어느 날 하늘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하늘은 샛노랗게 염색을 한 단발 머리였다. 기획사의 일방적인 컨셉으로 다듬어진 머리였지만 왠지 하늘은 이 머리가 낯이 익었다. 순간 떠올렸다. 이건 화가 아저씨가 그렸던 머리잖아…

그랬다. 화가 아저씨가 그렸던 그림 속의 여자는 하늘이었다. 하늘은 긴 생머리보다 샛노란 단발이 어울렸다. 즉 화가아저씨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진짜 하늘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었다. 그걸 왜 이제서야 깨달은 걸까. 하늘은 눈물을 흘렸다. 실로 오랜만에 흘려보는 진짜 눈물이었다. 오랜 연기수업으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지금 이 순간 둑이 터진 듯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 후로 하늘은 샛노란 색 염색만 했다. 머리카락이 상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언제나 짧은 머리로 푸석푸석하게 마치 물감을 막 짜서 얹어놓은듯한 색깔로 염색을 하고 다녔다. 그 덕분에 순결한 맛으로 좋아하던 팬들이 떨어져나가서 하늘은 기획사에서 짤렸다. 그리고 카이를 만났다.

 

“난 지금도 그 화가 아저씨 생각만 하면 눈물이 그냥 절로 나와.”
“그래서 양념으로도 쓰는 거고?”

하늘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눈물은 사랑의 조미료야.”
‘진심이냐…’

마엘이 와서 말했다. “국이 싱거워.”
순간 하늘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그 국 이리 줘봐.”

하늘은 국에 대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하늘의 볼을 타고 국으로 흘러내렸다. 마엘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하늘의 볼에 입을 대고 후루룩 눈물을 마셨다. 흘러내린 눈물자국을 입으로 훑어가며 눈동자에 다다르자 갈 곳을 잃은 마엘의 입술은 주름진 홍채에 느리고 더운 키스를 뱉어내고 하늘에게서 떨어졌다.

하늘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귀까지 빨개졌다. 모두들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제타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크크… 저 걸레년 당황하는 거 봐라… ㅋㅋ”

하늘은 생각했다. 저년이 마엘한테 시켰구나. 마엘이 이럴 리 없잖아. 분명히 제타 짓이야.
“제타 이 녀석,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마침 작도는 어제 제타에게 맞았던 게 생각났다. 하늘도 그 생각이 나나보다. 둘은 눈빛을 교환하고 제타에게 달려갔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은혜는 두배로 갚고, 복수는 열배로 갚는다.
그날 제타는 처음으로 화장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한다. 잘 때도 보지 못했던 제타의 맨얼굴을 본 작도와 하늘은 본인보다 더 큰 충격을 받는다.

2003 09 15


셀프인터뷰 4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그만 만나다

무더운 오후였다.

Q 슬슬 인터뷰도 지겹다.
A 하긴 나도 지겹다. 이젠 별 할 말도 없고.

Q 마엘과 함께도 좀 위험하다. 벌써 중반인데 긴장감이 없다. 도대체 플롯은 생각하고 있는 건가.
A 나한테 뭘 바라나.

Q 의욕은 있는 건가.
A 없다.

Q 열정은 있나.
A 식은 지 오래다.

Q 그런데 왜 아직도 이러고 있나. 진작에 그만뒀어야지.
A 나도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 인터뷰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마엘과 함께도 흥미를 잃었다.

Q 이 작품도 끝장났군.
A 그만이다.

Q 그만이라고?
A 이 인터뷰가 그만이라고.

Q 무슨 소린가
A 이제 별 할 얘기도 없다. 독자도 이런 잡담보다는 본편의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다. 그런 이유로 재미도 없는 셀프인터뷰는 그만두기로 했다.

Q 나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인가. 말도 안 된다.
A 그래봤자 소용없다. 이미 끝났다.

인터뷰 끝.

정리/ 작도

2003 09 15


05/10 - 하늘색 하늘

서기 2029년.

마엘이 살던 저택.
이스 마엘의 아버지, 이스 라엘은 걱정이 태산 같다. 자식놈 걱정 때문이다. 이놈을 보내 놓긴 했는데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생각 끝에 라엘은 마엘의 방을 뒤지기로 했다. 물론 명목은 청소다.

옷장에는 남자 옷만 가득했다. 마엘은 여자 옷만 가져간 모양이다. 라엘은 한숨을 쉬었다. 책장에는 ‘우리들 챠밍교실 - 멋내기Q’ ‘패션화집 - 새내기 멋내기’ 등 초등학생용 패션잡지가 꽂혀있었다. 라엘은 약간 긴장된 한숨을 뱉어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쓰레기통 안에서 피 묻은 생리대를 발견하지 전 까지는. 라엘은 부들부들 손을 떨며 한숨조차 뱉지 못했다. ‘돌아오면 흠씬 패줘야지…’ 하는 분노는 이내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라엘은 생리대에 뺨을 비비며 울었다.

“마엘…”

탁탁탁.

“마엘?”
“그래, 마엘.”

깊은 밤, 작도와 하늘은 일행의 눈을 피해 또 섹스를 하고 있었다.

하늘은 말했다.
“하지 마.”

“뭘?”
“하지 말라고, 마엘.”

“뭐, 난 별로.”
“어제 마엘한테 들었어. 그거.”

“아아, 그런가.”
“그만 둬.”

“상관없잖아.”
“넌 내꺼야.”

“너한텐 카이도 있고.”
“걔랑은 섹스 안 해.”

“그런가.”
“그러니까.”

탁탁탁.

“하아.”
“…”

푸슉.

작도는 등을 돌리고 무언가를 꼼지락거렸다. 하늘은 작도의 등에 달라붙으며 물었다.

“뭐해?”
“항문 조여.”

“야, 참 별거 다 한다.”
“케겔 운동이라고, 애널을 한 후에는 꼭 해줘야 돼. 평소부터 단련해주지 않으면 줄줄 샌다고.”

“…”
“예전에 김도향이라고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TV에 나와서 항문을 조이자고 했잖아. 그게 다 애널하는 사람들을 위한 거였어.”

“정말?”
“그래. 특히 게이들을 위해서 말야. 정말 이 세상 게이들은 전부 복 받아야 돼. 이렇게 힘든 애널도 견뎌내고.”

“그건 뭐야.”
“아아, 탐폰?”

“그건 왜 써.”
“줄줄 새니까. 막아야지.”

“단련했다며.”
“단련해야 된다고. 내가 그런 게 아니고.”

“그래.”
“…카이랑은?”

“응?”
“카이랑은 왜 안해.”

“뭐, 지구인의 육체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나.”
“그 녀석, 아직도 그 토성인 타령이야?”

“열다섯 살이잖아. 한창 때지. 냅둬.”
“아니 오히려, 열다섯 살이니까, 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글쎄.”
“역시, 겁이 나는 걸까. 처음일 테니.”

“아니야!”
“왜 그래.”

“아니, 뭐. 그건 아니라고.”
“확실히?”

“확실히.”
“그럼 뭔데.”

“…그야, 토성인 이니까.”
“뭐야.”

“글쎄.”
“…”

하늘은 말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렸다.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작도는 그만 추궁하기로 했다.
“뭐, 토성인일지도.”

하늘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어제였다.

하늘은 카이에게 요청했다. “안아줘.”
카이는 하늘을 안아주었다. 그 이상의 진전이 없자 하늘은 말을 바꾸어 요청했다. “덮쳐줘.”
카이는 하늘을 덮쳐주었다. 그 이상의 진전이 없자 하늘은 화가 났다.

“응해줘야지!”
“응.”

“응해줘.”
“응.”

“응?”
“응.”

하늘은 얼굴을 찡그리며 카이의 표정을 살폈다. 카이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하늘은 작게 한숨을 쉬며 카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카이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뺨을 비비자 작은 보푸라기가 일며 기분 좋은 촉감이 느껴졌다. 마음이 전해지지 않아도 기분은 나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하늘은 작게 절망했다.

카이는 하늘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사랑이 없어도 섹스는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어도 키스는 할 수 있다. 카이는 딸아이에게 했던 것처럼 하늘의 이마에 키스했다. 하늘은 가만히 있었다.

 

“하늘,”
“응?”

작도는 하늘을 불러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기 봐.”
“뭔데.”

“카이잖아.”
“그런데.”

“카이말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밤마다 어딜 갔다 오더라고.”
“그래?”

“뭘 하는 걸까.”
“글쎄.”

“궁금하지 않아?”
“그런가.”

작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작도를 보지 않고 있었다. 작도는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하늘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작도에게 물었다.
“카이가?”

* * * * *

토성(土星), 흙의 별. 사실 토성에 흙 같은 건 없지만, 카이는 토성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지구의 흙은 토성의 그것 같았다. 지구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기에 그것이라고 했지만, 지구의 흙에서 토성의 그것을 떠올리는 토성인은 비단 카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토성의 별빛을 받으며 차가운 흙에 몸을 뉘이면, 카이는 여지없이 토성의 향수에 젖었다. 게다가 머드팩은 피부에도 좋다고 하니 일석이조 아닌가. 향수도 달래고 미소년도 되고. 카이의 전신머드팩은 카이만의 은밀한 휴식이었다.

흙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으니 하늘이 떠올랐다. 어제의 일이 미안했다. 오늘 내내 어색했다. 카이는 이럴 때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 지구인의 인간관계는 어렵고 복잡했다. 토성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할 때는 알 수 없던 것이었다.

토성에서는 지구를 ‘물의 별’이라고 부른다. 토성에서 보기에 지구는 수성보다 훨씬 파랗다. 그래서 토성인들은 지구가 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치 지구인들이 토성을 수소와 헬륨으로 가득 찬 기체덩어리일 거라고 생각하듯이.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15세 토성인 미소년 카이는 생각했다. 왜 우리는 다른 존재를 알지 못할까. 토성인이 지구인을 알지 못하고, 카이가 하늘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알고 싶거나 알고 싶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탐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카이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대로 차가운 습기를 머금은 흙 속에서 자자. 그러면 내일은 피부가 뽀송뽀송해질 테니까.

달빛은 어두웠다. 살금살금 다가오는 하늘과 작도를 볼 수 없을 정도로.

* * * * *

“끄응.”
카이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이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작도, 제타, 마엘도 웃고 있었다.

“카이, 잘 잤어?”
“하늘.”

“아니, 카이가 전신머드팩을 하고 있길래, 잘 되라고 두껍게 발랐지. 그런데 그게 그만, 굳어버리더라고 오호호호”
제타는 흠칫했다. 자기의 웃음소리와 너무 비슷해서였다.

“사실 좀, 열이 받았어. 좋아하는데 섹스도 안 해주고. 토성에 다른 여자라도 있는 거 아니야?”
카이는 흠칫했다.

“자, 이러면 도망칠 수 없겠지. 조금만 참아.”
석고 모양으로 굳은 카이의 전신. 그 카이의 몸 중에 하늘은 다리 사이의 생식기에 정확히 주먹을 날렸다.

“끄아아아아악!”
이것은 카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구인의 육체에서 나는 목소리였다.

하늘은 깨진 조각을 잘 털어내고 펠라치오를 시작했다. 물론 카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쩝. 쩝. 후루룩. 찌걱찌걱.

작도는 화난 목소리로 하늘에게 말했다. “카이랑은 섹스 안 한다며!”
하늘은 대답했다. “오럴도 섹스냐.”
하긴 클린턴과 르윈스키를 보면 그런 것도 같지.

지구인의 육체에서는 고통과 쾌감이 함께 전송되고 있었다. 뇌 안에서 카이의 영혼은 이 신경정보를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촉각의 정보량이 1.5배로 늘었다. 혀가 두개였다.

“마엘.”

제타는 경악했다.

* * * * *

“하늘.”
“왜?”

저녁을 먹고 마엘과 하늘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왜 노란색으로 염색해?”
“아, 이거. 이거 노란색 아니야.”

“그럼?”
“하늘색이야. 노을 지는 하늘색.”

“응.”
“하늘은 색이 없잖아. 주위에 물드는 색이지. 낮이면 파랗고, 밤이면 까맣고, 비 오면 하얗고, 노을 지면 노랗고 빨갛고…”

“응.”
“어차피 난 남자가 쓴 스토리에는 꼭 나오는 창녀 캐릭터잖아. 머리도 짧게 자르고 염색도 진하게 해야 돼. 그러다 히로인이 나오면 져주고 질투해야지.”

“괜찮아? 내가 히로인이 되어도.”
“상관없어. 난 소중하지 않으니까.”

하늘은 담배연기 같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임신 6주였다.

2003 10 15


셀프인터뷰 5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못 만나다

Q 여어.
A

Q 아참, 인터뷰는 지난번으로 끝났다고 했지.
A

Q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게 일이니까.
A

Q 아참, 임신 6주라는 건 뭔가? 진심인가?
A

Q 그럼 아빠는 누군가?
A

Q 그러고 보니 카이랑은 섹스를 안 했다고 했지. 오럴이라고 해도, 임신할 순 없으니까.
A

Q 나도 애널밖에는 안 했다고. 아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A

Q 음… 생각해보니 한두 번이 아니잖아.
A

Q 그럼 내가 아빠란 말인가!
A

Q 미치겠다.
A

Q 이봐, 뭔가 말을 해봐. 아니 뭐, 거기 있지도 않겠지만.
A

Q 뭐라고 좀 말을 해보라고! 나 지금 미치겠으니까!
A

Q 무슨놈의 스토리가 이래? 난 하늘을 섹스 파트너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A

Q 그렇다고 하늘이 결혼을 하겠어? 나도 그렇고, 카이도 그렇고 말이야. 그럼 자식놈은 어떻게 돼? 부모도 없이 자라는 건가? 이 시대에는 중절수술도 없잖아!
A

Q 뭔가 대답을 해봐…
A

Q 대답을 해 보라고 이 자식아.
A

Q 개그도 정도껏 해.
A

Q 앞으로의 전개는 생각해 논 거냐.
A

Q …
A

Q 됐다. 그만하자.
A

정리/ 작도

2003 10 15


캐릭터 소개

-이스 라엘 Ys Rael (남, 39)
이스 마엘의 아빠. 이스 가문의 장남. 가문의 후계자가 될 마엘 때문에 걱정이 태산같다.

-이스 마엘 Ys Mael (남, 12)
앞날이 걱정되는 젊은 십대.

-홍 작도 Hong Xacdo (남, 48)
작가 겸 주인공. 곧 유부남이 될지도.

-세 카이 Se Khai (남, 15)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토성인 미소년.

-김 하늘 Kim Sky (여, 31)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라면, 깨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캐서린 제타 Catherine Zeta (여, 52)
마엘을 귀여워하는 화장빨의 대가. 굵은 허벅지가 매력 포인트.

⊙ 나이는 서기 2029년 기준


06/10 - 폭력

서기 2030년.

- 마엘이에요. 이제 13살이야. 걱정이 있어. 이건 비밀인데. 정말 미치겠어. 누구한테 말도 못하겠고. 들어줄래? 사실은 말야…

마엘은 회음부에 사마귀가 났다.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자꾸 긁고 잡아떼다보니 매일 팬티에 피가 묻었다. 고민 끝에 생리대를 찬지도 1년이 다 되간다. 하지만 사마귀는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흉칙해지고 있다. 실은 소변을 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따갑고 쓰렸다.

마엘은 항상 긴 치마로 가랑이 사이를 꼭꼭 가렸다. 누구에게도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하루 종일 사마귀를 잡아 뜯으면서 계속 신경을 썼다.

“미치겠어. 작도 아저씨 말야.”

하늘은 화난 표정으로 작도에게 말했다.

“하지 말랬지!”
“뭐가.”

“마엘 말이야!”
“무슨 소리야.”

“자꾸 추근댈래? 어제도 봤어.”
“무슨 상관이야.”

“그건 범죄야.”
“하아. 그 소리는 당신의 배나 감추고 하시지.”

작도는 하늘의 불쑥 나온 배를 가리켰다. 이젠 임신을 감출 수도 없는 정도다.

“니가 내 남편이라도 돼?”
“맞잖아, 남편.”

“결혼할 생각이나 있어?”
“아아. 그럼 ‘아빠’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말 돌리지 마.”
“돌린 적 없어.”

“이제 와서 아빠 행세하는 거야?”
“책임은 질 수 있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뭐?”

하늘은 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품에서 조그만 유리병 일곱 개를 꺼내서 작도에게 내밀었다.
“전에 이거 먹은 적 있지?”

“그거 10년 된 눈물이잖아.”
“그래. 전에는 말 안했지만, 이건 내가 임신했을 때마다 흘렸던 눈물이야.”

“뭐.”
“사실은 화가 아저씨도 그랬어.”

작도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처녀였다며!”
“그걸 믿냐.”

“세상에.”
“그러니까 걱정 마.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건 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전에는.”
“뭐?”

“전에는 어떻게 했는데.”
“낙태시켰지.”

“그게 가능해?”
“가능해.”

“어떻게.”
“사후 낙태라고 할까. 낳은 다음 죽이는 거야.”

“…”
“괜찮아. 갓 태어난 아기는 죽이고 싶을 만큼 징그러우니까.”

작도는 기가 찼다. 심호흡을 하고 다리를 움직이다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각종 폭언이 떠올랐으나 자제하는 작도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하늘이 공격했다.
“그럼 책임질 수 있어? 죽여야지 어떡해.”

“무책임하군.”
“난 원래 무책임해.”

“알아.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날 가르칠 셈이야?”

“소용없겠지.”
“그러니까, 아무 말 하지 마.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마침내 대화는 단절되었다. 작도는 머리를 긁적이며 앞의 대화를 반성했다. 하늘은 시선을 멀리하며 사과의 말을 기다렸다. 정해진 순서대로다. 하늘은 이런 과정을 앞서 7번이나 경험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그 다음으로 나와야 할 말은 뻔했다. 정해진 순서다. 하지만 하늘과 달리 작도는 그런 말을 하게 될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늘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며칠 걸릴 것이다. 지금의 대화는 어색하게 끝나고 그동안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겠지. 그러면 이제 섹스도 못하겠군. 역시 카이랑 해야 할까.

“제길.”
작도는 어색하게 자리를 떠났다.

작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하늘은 한 숨을 돌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바로 뒤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를 들어버린 제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 * * *

“죽일꺼야? 정말로.” 제타는 하늘에게 물었다.
“그렇겠지.”
둘은 서로를 보지 않고 있었다.

“뭐 나도, 사람을 많이 죽였지. 조폭을 하다 보면.”
“그랬어?”

“그래.”
“쌤쌤이네.”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돼.”
“그렇지.”

“불법이지만.”
“나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 나에겐 아기도 타인이니까.”

“죽여야 돼.”
“죽여야지.”

제타와 하늘은 서로의 표정을 확인했다. 둘은 살짝 웃었다.

“그런데,”
“응?”

“왜 반말해?”
“그쪽이야말로.”

“난 나이가 많잖아.”
“그래서, 나보고 존댓말 쓰라고?”

제타는 고개를 돌렸다. “뭐, 됐다.”
하늘은 제타의 표정을 살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제타가 말했다. “오죽하겠어? 걸레년이.”

“걸레지. 뭐.”
의외의 반응에 제타는 당황했다.

“정액받이라고 할까. 뭐 그런 거 받아봤자 쓸데도 없지만.”
제타는 살짝 화가 났으나 참았다.

“사실은 나도 제대로 된 아기를 가져보고 싶어. 예를 들면 카이의 애라던가.”
제타는 방금 전에 화를 참은 것을 후회했다.

“아아~ 카이는 뭐 하고 있을까. 섹스하고 싶다.”

어색한 시간은 이 곳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후루룩. 쩝쩝. 찌걱찌걱.
마엘은 그 사건 후로 종종 카이의 자지를 빨았다. 물론 하늘한테는 비밀이다. 카이는 고향에 두고 온 마누라 생각에 미안했지만, 지구를 사랑하는 과학자로서 이렇게 젊고 싱싱한 육체를 그냥 두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에 어쩔 수가 없었다.

푸슉.
“짜.”
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는 대답했다.

“그것은 요도분비물 이다, 사정 직전 요도를 소독하는. 그 후에 정액이 배출된다.”
“응.”

마엘은 눈을 내리깔고 계속 빨았다. 카이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뒷짐을 졌다.

작도는 우울했다. 하늘의 임신 때문이었다. 뭔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꺼리가 없을까 생각했다. 그때 마침 펼쳐진 카이와 마엘의 광경.

“우아악.”
마엘은 작도를 흘끔 보더니 움찔하고는 시선을 피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카이는 태연했다. 작도는 기회다 싶었다.

“하하, 하. 마엘. 카이랑 뭐하고 있어?”
작도는 마엘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하, 하지 마요. 작도 아저씨.”
마엘은 작도의 손을 뿌리쳤으나 소용없었다.

“아저씨? 이거 왜 이러시나. 왜 나만 아저씨 취급이야. 카이한테는 립서비스 해주면서. 그러면 아랫도리는 어떻게 돼 있을까?”
작도는 마엘의 치마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사마귀’
팬티가 벗겨지면 사마귀가 보인다. 마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싫어!”
“앙칼진 것.”
마엘은 저항했으나 작도는 완강했다. 그때였다.

탕.
공포탄이 울렸다. 제타였다. 호신용 총을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죽이겠어.”

작도는 제타가 마엘을 끔찍이 귀여워하던 것을 생각했다. 아마도 진심이겠지. 카이는 여전히 태연했다.

하늘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하하하아… 하하. 제타, 하늘.”
하늘까지 올 줄이야. 작도는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항복과 무죄의 제스처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아… 들어봐. 궁금하지 않아? 오럴만으로 만족할리가…”
작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내 생각이고. 여자들은 무엇을 원할까.

“아니, 생각해봐. 마엘은 정말로 여자일지도 몰라?”
작도는 죽는 셈 치고 마엘의 드레스를 확 제쳤다. 물방울무늬 팬티였다. 제타는 ‘귀엽다♡’는 느낌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거 봐봐. 남잘까 여잘까? 일단 팬티의 굴곡을 확인하면…”
작도는 팬티 위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엘은 죽고 싶었다. 그런데 촉감이 이상했다.

“생리대잖아.” 제타는 말했다.
“정말이네.” 하늘도 말했다.

“벗겨봐.”
“벗겨봐.”
“벗겨봐.” 카이도 거들었다.

정작 곤란한 쪽은 작도였다.
“아니, 이봐들… -_-;;;”

“빨리 벗겨!” 제타는 총구를 들이대며 소리쳤다.
작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팬티를 내렸다.

엉덩이만 보이는 상태에서 마엘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팬티를 내리자 먼저 마엘의 하얀 엉덩이가 보이고, 항문이 보이고, 회음부가 보이고, 성기가 보였다. 남자는 맞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생리대에는 여드름이라도 짠 듯이 조그만 핏자국이 여러 군데 묻어 있었고, 회음부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사마귀의 흉터가 번져 있었다.
마엘은 울었다.

눈앞에 천국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던 일행은 눈앞에 지옥이 펼쳐지자, 입을 다물지도 입을 떼지도 못했다.

“저것은 음부 사마귀(condyloma acuminatum)다.” 카이가 말했다.
“사마귀?”
“그렇다. 회음부까지 번지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일행은 말이 없었다.

“치료하려면 환부를 녹이거나 얼리거나 태워야 한다.”
“그렇다면 태워야겠군.”

결국 작도는 제타의 강요로, 칼을 불로 달군 후 마엘의 회음부를 지졌다.

* * * * *

탁 탁 탁.
“끄아아악 으아악 으악”

마엘은 몬스터의 갈비뼈를 칼등으로 부셨다. 팔과 다리가 잘린 몬스터는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어지간히 부셨다고 생각되자 마엘은 몬스터의 가슴을 발로 밟았다. 물컹하는 질감의 내장에 갈비뼈가 고루 박히면서 섞였다.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작도 아저씨도 이렇게 죽여야지.”

마엘은 해맑게 웃었다.

2003 10 26


셀프인터뷰 6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안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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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2003 10 26


07/10 - 호르몬 주사

서기 2030년.

치이익. 작도는 불에 달군 칼로 누군가의 맨살을 지지고 있었다.

“끄아악”

이렇게 들으니 사람의 비명소리도 몬스터의 비명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작도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슬쩍 커져버린 마엘의 성기를 만졌다. 그때마다 마엘은 작도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싶었다.

마엘이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자 작도는 움찔했다. 하긴 이거 세균에 감염됐잖아. 모르고 했으면 옮을 뻔 했네. 하지만 콘돔 쓰면 상관없지 않나?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작도였다.

마엘은 1주일에 한번씩 이런 식으로 그곳을 ‘소독’당했다. 음부 사마귀는 세균성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소독을 하면 할수록 마엘의 사타구니는 징그럽게 문드러져갔다.

소독은 아침에 해야 했다. 너무 울어서 화장이 번졌기 때문이다. 소독이 끝난 후 제타는 마엘의 눈가를 닦아주면서, 젖은 속눈썹도 나름대로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 * * * *

하늘은 작도에게 물었다.

“작도, 너 지방간이었어?”
“응. 내 간은 프와그라야.”

당당한 대답에 하늘은 작도의 가방에서 훔친 지방간 진단서를 떨어트릴 뻔했다.

“이런 병신(病身).”
“죽기 전에 내 간을 먹어보고 싶어.”
“-_-;;”

마엘은 제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제타, 지방간이 뭐야?”

“먹는거야.”
“아아.”

“맛있대.”
“와.”

하늘은 한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사 주제에 지방간이라니. 이건 알콜성도 아니잖아. 도대체 얼마나 몸을 안 움직인 거야.”
“괜찮아. 조심조심 살면 되지.”

“내버려 둬.” 카이가 말했다.

“인육이 가장 맛있다.”
“그렇다더라.”
“기대할께.”

“우욱, 이 자식들! 운동한다. 하면 될 거 아니야!”
괜한 것에 열 내는 작도였다.

마엘은 생각했다. ‘간은 부시지 말아야지.’

* * * * *

“인간의 기억은 뇌수에 저장된다.”
카이가 갑자기 말했다.

“즉 기억은 육체적이다.”
“뭐?”
한창 뱃살을 빼느라 힘든 작도가 물었다.

“아무리 영혼이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하더라도, 육체는 유한하기에 인간의 기억은 덧없다. 그래서 인간은 기록술을 발명하여 영혼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럴 때는 꼭 진짜 과학자 같다니까’하고 작도는 생각했다.

“즉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는 것은, 영혼의 전지전능함을 뇌 밖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예를 들어 마엘에게 남성 호르몬 주사를 맞히는 것도,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엘, 너는 너의 의지로 호르몬 주사를 맞느냐.”
마엘은 대답했다. “아니.”

작도는 자기의 뒤에 서있던 마엘을 보았다.

“그렇다면 너의 몸은 누구의 것이냐.”
“아빠꺼.”

“그렇다면 호르몬 주사를 맞을 생각이냐.”
“응.”

“왜?”
“몰라.”

“업이야, 전생의 업이지.” 제타가 끼어들었다.
“전생에 지은 죄가 있어서 벌을 받는 거야.”

“몬스터는?” 마엘이 물었다.
“몬스터는 무슨 죄가 있어서 우리한테 죽는 거야?”

“그건 몬스터의 죄가 아니야. 우리가 죄를 짓는 거지.” 작도가 말했다.
“아니다. 그것은 몬스터의 의도일수도 있다.” 카이가 말했다.

“카르마 스케쥴링은 항상 0에 수렴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생에서 과도하게 속죄를 쌓을 경우, 마찬가지로 과도하게 축복스런 후생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니까.” 작도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 * * * *

“간은 부시지 말아야지.”

극심한 고통에 작도는 눈을 떴다. 작도의 배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엘은 능숙한 솜씨로 껍질을 벗겼다.

“뭐.. 하는.. 짓이야...”
“간이 어딨지?”

마엘은 손으로 내장을 휘저었다.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간을 발견하고 손으로 끄집어냈다. 작도는 비명을 질렀으나, 몬스터의 비명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거구나.”
방금 잡은 신선한 지방간. 살살 녹는 따뜻한 프와그라를 마엘은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피 묻은 입으로 말했다.

“맛있어.”
“맛있냐.”

“응.”
“다행이구나…”

* * * * *

작도는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그러나 다행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엘이 곁에 있었다.

“날 죽일꺼냐.”
“응.”

“어떻게?”
“꿈에서 봤잖아.”

“왜?”
“글쎄…”

작도는 마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몬스터를 죽이는 것 같아.”
“아아.”

작도는 납득했다.

2003 11 08


셀프인터뷰 7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다시 만나다

작도는 작도를 ?아갔다.

Q 잡았다!
A 우왁.

Q 한참 찾았다.
A 어디 갔었나.

Q 누가 할 소릴.
A 나는 잘 지냈다.

Q 그래서 어쩌라고.
A 대화가 안 되는군.

Q 당신이야말로!
A 왜 화를 내고 그래.

Q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
A 이거 왜 이러시나.

Q 지금 장난하시나.
A 더러워진 너의 눈빛은 말해주지.

Q 니가 원했던 건 머니지.
A 너의 그런 유치한

Q 너무 느끼한
A 머리 너무 굴리지마라~

Q 예.
A 예. (한 톤 낮춰서)

Q 잘 지냈나.
A 잘 지냈다.

Q 요즘 뭐 하고 지내나.
A 군대 갈 준비 하고 지낸다.

Q 언제 가는데.
A 다음달 1일.

Q 훗. 이제 마엘과 함께도 정말로 끝장이군.
A 아니다. 빨리 쓰면 된다. 남은 세편은 일주일 만에 후딱 써버릴 생각이다.

Q 한편 쓰는데 한달씩 걸리면서 잘도 그러겠다.
A 나를 뭘로 보는 건가.

Q 좆으로 본다.
A 좆은 좋아하나.

Q 싫진 않다.
A 그럼 좋은 거네.

Q 그건 아니지.
A 아 이사람 빼기는. 좋으면 좋다고 해.

Q 사실은 좋다.
A 그럴 줄 알았어.

Q 헤헤헤.
A 멍청하긴.

Q 뭐라고?
A 아무 것도 아니다.

Q 아참, 까먹기 전에 물어보자.
A 물지 마.

Q ‘묻지 마’다.
A 묻지 마.

Q 어디에 묻을까?
A 뭘 묻는데.

Q 글쎄다.
A 글쎄가 뭐야. 나는 그런 애매한 태도가 제일 싫다.

Q 싫어해도 소용없다.
A 힘없는 사람의 호오는 무의미하다.

Q 어라?
A 그건 내 대사다.

Q 그건 그렇다 치고.
A 치지 마.

Q 안 때릴께.
A 치지 말라고.

Q 그럼 키스만 할께.
A 키스도 하지 마.

Q 원하는 게 뭐야.
A 그쪽이야말로!

Q 왜 화를 내고 그래.
A 자기 요즘 이상해.

Q 딴 남자라도 생긴거야.
A 생긴거야?

Q 실은 뱃속의 아기가 벌써…
A 거짓말!

Q 내 눈을 봐.
A 싫어.

Q (팔을 붙잡으며) 내 눈을 보란 말이야!
A 이히힝.

Q 말이야.
A 이히히힝.

Q 말고기는 육회가 맛있지. 계란 노른자를 싹 올려서…
A 아유 그냥 군침이 확 도네.

Q 언제 한잔 하러 가자.
A 좋다.

Q 근데 그게 언젠가.
A 일단 마엘과 함께는 끝내야지.

Q 어떻게 끝낼 생각인가.
A 죽여야지.

Q 죽여?
A 죽이는게 최고다.

Q 누가 죽는데.
A 거의 다 죽는다.

Q 왜 죽이는데.
A 감동적이니까.

Q 사람이 죽는다고 감동적이냐!
A 어.

Q 그런..가?
A 너도 죽으니까 걱정 마.

Q 그게 걱정이야.
A 그럼 반만 죽일께.

Q 어떻게 반만 죽여.
A 뭐 불구로 만든다거나, 식물인간이 되거나. 방법이야 많다. 어찌됐건 마지막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라도 죽여주는게 감동도 있고 이야기도 깔끔하고 여러모로 죽여준다.

Q 그럼 그냥 죽여.
A 소원대로 해주지.

Q 죽기 싫어!
A 왜?

Q 계속 살아서 다른 작품에도 출연하고 싶어.
A 내 작품에 나와 봤자 고생밖에 더 하나.

Q 그건 그렇다.
A 그냥 죽는 게 낫지.

Q 아참, 죽기 전에. 마엘과 떡 치게 해준다며.
A 다음편 시작하자마자 해주겠다.

Q 정말?
A 그렇다.

Q 야호.
A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Q 뭐라고?
A 마엘과 잘 해보라고.

Q 고맙다.
A 천만에.

Q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이렇게 소원도 들어주고. 다시 봤다.
A 다시 봐.

Q 또 봤다.
A 또 봐.

Q 안녕.
A 잘 가.

Q 건강해.
A 너야말로.

작도는 작도를 떠나보냈다. 하늘 이야기를 안 꺼내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2003 11 09


08/10 - 장래희망

서기 2030년.

쿵덕쿵 쿵덕쿵 방아를 찧어라.
마엘과 작도는 떡을 치고 있었다.

‘뭔가 속은 느낌인데…’
작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왜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떡이 쫄깃쫄깃해.”
“글루텐이 생성돼서 그래. 물과 탄수화물이 결합해서…”
“글루텐은 떡밥에 쓰잖아? 특히 붕어 낚시할 때.”
“맞아. 글루텐이 수질오염의 주범이라는데.”
“그건 글루텐 때문이 아니라, 떡밥이 물에 녹아서야. 부영양화를 촉진시킨다고.”
“이 이빨에 폭 파묻히는 느낌이 좋아.”
“서양 사람들은 이 맛을 알까 몰라.”

“그나저나,”
작도는 말을 끊고 마엘에게 물었다.

“마엘, 떡 좋아해?”
“싫어.”

“그런데 왜 떡을 먹니?”
“배고파.”

침묵이 흘렀다.

“뭐, 입에 풀칠하려면 별 수 있나. 먹어야 살지.” 하늘이 말했다.
“하긴 뭐 우리도 좋아서 이 짓을 하나.”

“나도 전사 같은 건 싫다고.” 하늘이 말했다.
“그럼 뭘 하고 싶은데.”

하늘이 말했다.
“내 꿈은 가수가 되는 거야.”

작도는 기억했다. 눈물이 흐르던 하늘의 라이브를 기억했다. 삐삐밴드의 이윤정을 연상케 하는 방정맞은 무대매너를 기억했다. 작도는 하늘에게 말했다.
“넌 이미 가수잖아.”
“가수 아니야. 앨범을 못 냈잖아.”

“…”
전기, 석유, 통신이 끊긴 시대에 잘도 앨범을 내겠다고 작도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널 처음 만났을 때, 너흰 전기를 쓰고 있었잖아. 멀리까지 쿵쿵 울릴 정도로 우퍼를 틀어대고.”
“아, 그거?”

“발전기가 있었다.” 카이가 말했다.
“휴대용 발전기. 석유를 넣어서 돌리는 건데, 진짜 귀했지. 그걸로 공연해서 돈을 벌었고.”
하늘의 눈동자가 왼쪽 위로 올라갔다. 우뇌의 기억을 꺼내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망가졌어.”
하늘의 눈동자가 오른쪽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군.”
“그렇지.”

하늘은 기억했다. 시동이 걸리면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돌아가던 발전기의 소음을 기억했다. 둔탁한 기계음에 사운드가 묻히고, 독한 매연에 목이 잠겨도. 나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던 그 포만감을, 하늘은 잊을 수가 없었다.

“피비린내.”
하늘은 난폭하게 칼을 집어던졌다. 칼과 칼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안착했다.

전사라는 직업은, 몬스터를 죽이고 약탈하는 것이었다. 물론 몬스터도 인간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긴 했지만, 그걸 다시 약탈하는 전사도 그리 다를 바는 없었다. 서민에게 전사는 몬스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칼을 든 그들이 무서워서 방치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전사는 조직폭력배와 같은 시장을 점유하는 경쟁자였다. 그들의 세력다툼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작도 일행도 버티다 못해 수입이 싱거운 지역으로 쫓겨 온 것이었다.

“나도 꿈이 있었지.” 작도가 말했다.

하늘이 말했다. “듣기 싫은데.”
“들어줘.”

“그래.” 제타가 말했다. 하늘은 제타를 쏘아보았다.
“내 꿈은 과학자였어.”
제타는 떫은 미소를 하늘에게 지었다.

“과학자는 좋은 직업이다.” 카이가 말했다.
일행은 모두 카이를 쳐다보았다. ‘저 녀석, 지구과학자랬지.’

“작도여, 너는 왜 과학자가 되고 싶느냐.”
“멋있잖아.”

“과학자의 본질을 이해하느냐.”
“이해할리가 없잖아.”

“너의 희망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모르기 때문에 꿈꿀 수 있다. 안다면 꿈꿀 수 없다.”
‘또 시작이냐…’라고 작도는 생각했다.

“마엘이여,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싫어.”

“무엇이 싫으냐.”
“아무것도 되기 싫어.”

“죽고 싶느냐.”
“죽기도 싫어.”

“그것이 존재다.”
‘뭔 소리야 -_-’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이었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토성은 어디 있을까.

“형제여, 안녕히.”
“뭐?”

“나는 돌아간다.”
“어디로?”

“토성으로.”
“…”

카이는 뱀에게 물렸다.
“행성 간의 아카식 레코드 트랜스포메이션 서비스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일행은 숨을 죽였다.
“지금 나의 기억은 토성의 아카식 레코드로 벌크 인서트 중이다. 지구에서 수집된 귀중한 기억은 토성의 지구과학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다. 나의 영혼 또한 토성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카이는 마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시간이 없기에 짧게 말하겠다. 너의 카르마는 플러스/마이너스로 무한히 발산한다. 그러므로 현생에서의 속죄는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너의 장래희망은 수정을 요한다. 왜냐하면 너는…”
“응?”

“카르마의 표준편차를 줄이기 위한 존재니까.”
“응.”

“너의 질서를 따르거라.”
“응.”

카이의 온 몸에 맹독이 퍼졌다. 카이는 쓰러졌다.
토성이 밝게 빛났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카이!” 하늘이 외쳤다. 카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작도는 마엘을 잡고 물었다. “무슨 말이야!”
“싫어.”

마엘은 작도를 뿌리치고 카이의 자지를 빨았다. 하지만 아무리 빨아도 발기하지 않았다.
그 무렵 제타는 서있거나 앉아있었다.

* * * * *

“제타는 장래희망이 뭐야?”
마엘은 제타에게 물었다.

“결혼.”
“응.”

“그래서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는거야.”
“응.”

“예뻐질까?”
“예뻐.”

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타를 보았다. 제타는 마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혼하면,”
“응?”

“행복할까?”

제타는 울었다. 마엘은 가만히 있었다.

카이는 토성으로 돌아가면서 행성간 데이터 셋의 불일치로 변환 보류중인 데이터 셋의 대체 코드를 고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행복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인의 행복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행복은 언어로만 존재하고 실재하지 않는다. 영혼의 기능이 그 세계와 호환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사실 지구는 고질적으로 영혼과의 호환성 부족 문제를 겪어왔다. 특히 행복 같은 중요한 개념이 부실한 것은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 행복을 {안락함, 만족, 안정}과 같은 개념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영혼이 제 기능을 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카이는 그런 지구에서 15년이나 생존한 자신이 대견할 따름이었다.

제타는 행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구에서 행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울었다.
하늘은 제타의 눈물을 병에 담아주었다. 8번째 유리병이 채워졌다.

정서적 눈물은 정화의 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 몸이 슬프면 몸은 슬픔을 눈물로 만들어 몸 밖으로 배출한다. 그렇게 인간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은 일시적이 되고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하늘은 눈물을 병에 담았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슬픔이 가라앉을 때마다 슬픔의 눈물을 꺼내 마시며 슬픔을 충전했다. 분노가 가라앉으면 분노의 눈물을 꺼내 마셨다. 하늘은 그렇게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시간의 치료를 거부하며 버티고 있었다.

제타에게서 감정의 파도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늘은 제타에게 슬픔의 눈물을 주었다.
“서럽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서러움도 흐릿해져. 지금을 잊지 않고 싶다면, 이 눈물을 소중히 간직해. 그리고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이 눈물을 마셔.”

하늘은 10년 된 화가 아저씨의 눈물을 조금 마셨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 살아났다. 다행히도 아직 그때의 감정은 크게 무뎌지지 않았다. 하늘은 살아갈 힘을 다시 찾았다. 살아갈 힘은 언제나 타인에게 있었다.

2003 11 14


셀프인터뷰 8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바쁘게 만나다

늦은 밤, 두 병째 박카스를 들이킨 작도가 책상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Q 안녕.
A 으아악!

Q 우왁.
A 안돼. 큰일 났어. 시험이 오늘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Q 또 시험인가.
A 지금은 밤 12시. 시험은 오후 2시니까, 잠을 한숨도 안 잔다면 14시간이 남은 셈! 지금 10문제 보는데 1시간씩 걸리니까, 남은 130문제를 보려면 13시간이 필요하지. 그렇다면 공부 다 하고도 한 시간이 남아! 그 시간에 차타고 가면 돼! 아자아자 승산이 있다!

Q 장하다.
A 그뿐이 아니다. 시험을 보고 나면 마감까지 불과 이틀밖에 안 남아. 그러면 이틀에 2편! 하루에 한편씩 써서 완결을 봐야 해! 그것도 퇴고부터 교정까지 전부 포함된 수치야! 과연 할 수 있을까!!

Q 저번에는 일주일에 세편이라며.
A 이번 회 쓰는데 4일을 까먹은 셈이지. 그 중 하루는 또 시험에 써야 하고. 하루에 한편! 아직은 희망이 보여!

Q 바쁘군.
A 게다가 내일 시험보고 바로 약속 있고, 그 다음날도 약속 있고, 다음날은 마엘과 함께 완결하고, 다음날은 출판사 찾아가고, 다음날은 롯데월드에 아트란티스 타러 가야하고…

Q 입대가 언제라고?
A 다음달 1일. 으악! 인터뷰 하느라 또 한 시간을 까먹었어! 벌써 1시다!! 이제 13시간밖에 안 남았어! 이렇다면 시간당 10문제에서 시간당 11문제로 속도를 올려야겠다!

Q 빨리 가서 공부해.
A 귀여니가 부러워. 3편 쓰는데 4시간이나 걸렸대. 나도 그런 속도로 써보고 싶어.

Q 그럼 그렇게 해.
A 그래. 으아악! 큰일났다.

Q 뭐가 큰일인데.
A 졸려.

Q 그럼 자.
A 자면 안돼!

Q 왜.
A 시험 떨어지잖아.

Q 진작에 공부할 것이지.
A 마엘과 함께 써야지!

Q 시험이 중요해, 마엘과 함께가 중요해?
A 둘 다 중요해.

Q 그럼 둘 다해.
A 둘 다하잖아.

Q 그런데 뭐가 문제야.
A 잠도 중요해!

Q 그럼 자.
A 안돼.

Q 왜?
A 잠은 2순위, 마엘과 함께랑 시험은 1순위.

Q 그럼 자지 마.
A 그치만 졸린걸.

Q 참아.
A 후엥.

Q 후엥?
A 우에엥.

Q 어쩌라고.
A …죄송합니다.

7시간 후.

Q 잘 잤나.
A 으악!! 아침이다!!!

Q 그럴 줄 알았어.
A 어떡해 어떡해.

Q 일단 아침부터 먹어.
A 무파마가 좋겠지.

2시간 후.

A 우다다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시간당 20문제씩 보는 중)

10분 후.

Q 뭐하나.
A 헉! 내가 침대에 누워서 ‘무적코털 보보보’를 보고 있다니!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공부하자!

1분 후.

Q 그럴 줄 알았어. 공부는 무슨 공부야.
A 하긴 그렇지. 그래도 요즘은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좋은 경험이 되겠군.

Q 뭐가 좋은 경험이야. 한번에 $85나 하는 시험이잖아.
A 내가 내는 돈도 아니고 뭐.

Q 아무리 아빠가 대 준다고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A 그런 식으로 넘어가서 지금까지 10번이나 시험 봤다. 아주 지겨워 죽겠다. 이젠 그만두고 싶다.

Q 그만두기 싫어도 군대가면 끝이지.
A 그렇긴 하다.

Q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해야 하지 않나.
A 그렇다. 열심히 해야겠다.

Q 셀프인터뷰도 그만 하고.
A 알았다.

Q 잘 하고 와라.
A 걱정마라.

몇 시간 후, 강남 중앙정보처리학원 앞.

Q 어떻게 됐나.
A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Q …
A 붙었다.

Q MCDBA가 원래 그렇게 만만한 시험인가.
A 070-215가 쉬운 편이었지.

Q 그나저나 다행이군.
A 무슨 소리야, 이정도 쯤이야 나에게는 가뿐하지.

Q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A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같지가 않잖아.

이틀 후.

Q 마엘과 함께는 다 썼나.
A 우왁!

Q 이번엔 또 뭔가.
A 오늘이 벌써 일요일이야?

Q TV에 유재석 나오는 거 보면 모르나.
A 요즘 개그콘서트를 안 봤더니 일요일이 언젠지를 모르겠어.

Q 또 게으름 피웠나.
A 괜찮아 괜찮아. 마지막엔 어떻게든 되니까.

Q 당신은 좀 혼을 나 봐야 정신을 차리겠다.
A 하지만 이런 식으로도 술렁술렁 어떻게든 되는걸?

Q 어떻게든?
A 어떻게든 된다.

Q 싫은 사고방식이다.
A 나쁘진 않다고 본다.

Q 나쁘다.
A 좋지는 않다고 본다.

Q 좋다.
A 거봐. 좋다잖아.

Q 내가 언제!
A 방금 전에.

Q 아뿔싸.
A 그나저나, 인터뷰는 언제 할 건가.

Q 이게 한 거다.
A 이게 무슨 인터뷰냐.

Q 분량도 채웠고.
A 뭐 물어볼 건 없나.

Q 없다.
A 마엘과 함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든지.

Q 관심 없다. 독자도 아마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A 그런가. 하긴 나도 지금 내일 오전까지 마감을 해야 하고. (지금은 밤 11시)

Q 어서 빨리 끝내고 군대나 가라.
A 충고 고맙군.

Q 입에 단 약은 몸에 쓰다.
A 뭔 소리야.

작도는 컴퓨터 앞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섬세한 손놀림에 키보드는 시원한 안마를 받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한글2002에는 글자의 비가 내렸다.

정리/ 작도

2003 11 16


09/10 - 사랑 Two

서기 2030년.

“아아, 카이가 가버렸네.”

하늘은 상당히 커진 배를 껴안으며 말했다.
“이런 것만 남기고 말이야. 훗.”

제타가 말했다.
“그거 카이 애 아니잖아.”

하늘은 제타를 노려보았다. 제타가 흠칫하자 하늘은 시선을 멀리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맞아. 죽이기로 했었지? …카이의 애였다면 안 죽일 텐데.”

“내가 대신 죽여줄까? 그 애.”

하늘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편이 낫겠지? 아무래도.”

하늘은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체념한 웃음으로 말했다.
“상관없어. 아무래도 좋으니까.”

둘은 어색하게 꾸며낸 웃음을 지었다. 제타는 아까부터 생각해 놓은 가벼운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으헉.”
“하늘?”

“뱃속의 아기가 발로 차.”
“뭐?”

“컥. 으헉.”
하늘은 피를 토했다.

“너무 아파.”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하늘은 피를 몇 번 더 토하고 겨우 몸을 추스렸다.

“정말로, 나 혼자서는 죽이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이 애는.”
“그… 그래.”

“함께 죽여줘. 내가 죽이지 못한다면.”
“그래.”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의 흔적 따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 * * * *

작도는 기다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마엘이냐.”
“응.”

“다가오지 마!”
작도는 뒤로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조금만 시간을 줘.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응.”

마엘은 앉아서 불을 피웠다. 그리고 칼을 불에 달구었다. 그런 모습이 작도의 눈에 선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미래 또한 볼 수 있었다. 배가 갈리고 내장이 파열되는 모습. 별다른 원한도 없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말로, 나를 죽이는 게 몬스터를 죽이는 거랑 차이가 없어?”
마엘은 작도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차이가 없냐고!”
마엘은 작도의 지방간을 생각했다.

“침 흘리지 말고!”
“그치만 맛있는걸.”

“내가 죽잖아!”
“죽어도 좋아.”

마엘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카르마의 표준편차를 줄이기 위한 존재. 선은 악으로, 악은 선으로 인도한다.”
“너, 누구야.”

“너에게 나는 누구로 보이지? 천사, 혹은 악마?”
“마엘…”

“너의 업을 중화시켜주겠다.”
“살려줘…”

성스러운 속죄의 의식이 시작되었다.

* * * * *

하늘은 몬스터의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낳았다기보다, 몬스터가 하늘이라는 껍질을 깨고 부화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하늘의 몸은 산산히 찢어졌고, 몬스터는 젖처럼 피를 빨았다.

제타는 하늘과 약속한대로 하늘의 아이를 죽였다. 제타는 생각했다.
‘몬스터여서 다행이야.’

둘의 살점이 서로 뒤섞여서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엘이 기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엘, 뭐가 그렇게 기쁘니?”
“맛있는 걸 먹었어.”

“뭐가 맛있었니, 마엘?”
“인간의 영혼.”

마엘은 해맑게 웃었다.

2003 11 18


셀프인터뷰 9 - 여러분 감사합니다

작도(남,49)의 사망으로 작도(남,22)와의 셀프인터뷰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코너도 마엘과 함께의 완결에 맞추어 문을 닫습니다. 지금까지 아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는 작도가 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3 11 18


10/10(최종화) - 이젠 안녕

서기 2030년.

“네? 성호르몬 주사가 소용이 없다니요?”
제타는 경악했다.

마엘과 제타는 성호르몬 주사를 판다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작도의 주머니에서 빼낸 의사 추천서와 작도의 1억원, 제타의 1억원을 가지고 약국에 갔다. 그랬더니 약사가 “남성호르몬을 맞는다고 남자다워지는 것도 아니고, 여성호르몬을 맞는다고 여자다워지는 것도 아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제타는 허탈했다. 이것 때문에 8개월이나 걸려서 여기까지 왔더니 이게 뭐야.
마엘은 무표정했다.

“어쨌든 주세요.”
“소용없다니까요.”

“돈 줄 테니까 약을 내 놓으라고!”
제타는 조폭 시절 성깔이 나오려고 했다.

약사는 마지못해 남성호르몬 주사 한 박스와 여성호르몬 주사 한 박스를 팔았다.

* * * * *

“이걸로 끝이구나.”
제타는 여성호르몬 박스를 힘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이걸 맞는다고 여자다워지는 것도 아니고. 하아.”
제타는 박스를 집어 던지려고 했다. 마엘은 제타의 손을 붙잡았다.

“왜 그래, 마엘.”
마엘은 제타의 손에서 박스를 빼내 자신의 박스와 바꿨다.

“이쪽이 좋아.”
마엘은 제타의 손에 남성호르몬 박스를 쥐어주었다.

“바꾸자.”
“그래.”

제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쪽이 더 나을 것 같기는 했다.

“노을이 지네.”
“응.”

“이렇게 석양을 향해 박스를 들고 걸어가면, 우리 뒤로 그림자가 길게 지겠지?”
“응.”

“이렇게 끝내면 멋있을 줄 아나봐.”
“응.”

“가자.”
“어디로?”

제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아…’

아직은 이런 말을 꺼낼 수 없는 제타였다.

2003 11 18


셀프인터뷰 10 - 마엘과 함께의 작가, 작도를 끝내 만나다

마엘과 함께가 끝났다.

Q 드디어 끝났다.
A 만세! 만세!

Q 그런데 왜 9회에는 인터뷰가 없었나.
A 9회와 10회는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나눈 것뿐이다. 그래서 인터뷰가 필요 없었다.

Q 단순히 귀찮아서 대충 하나로 두개 때운 것 아닌가.
A 지금 매트릭스를 모독하는 건가.

Q 매트릭스가 그런다고 당신까지 따라 해서야 쓰겠는가.
A 어쨌든
롯데월드 아트란티스는 졸라짱 재밌었다.

Q 350억이나 들였다며, 그거 만드는데.
A 매트릭스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

Q 어찌됐건 돈만 처바르면 일단은 재밌는 것 같다.
A 지금 아트란티스를 모독하는 건가.

Q 모독이 아니라 머독이다.
A 지금 아트란티스를 머독하는 건가.

Q 그나저나 하늘은 어떻게 몬스터의 아기를 가진 건가.
A 사실 하늘은 몬스터와도 성관계를 가져 왔다.

Q 마엘은 인간이 아니었나.
A 사실 마엘은 라엘이 옆구리로 낳았다. 총각잉태한 마엘은 아빠만 있고 엄마는 없다.

Q 카르마의 표준편차를 줄이기 위한 존재라는 건 뭔가.
A 이것에 대해서는 본인의 소설 ‘크림 소다 판타지’ 6화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Q 그런걸 설명도 없이 가져다 쓰면 누가 이해하겠나.
A 적어도 나는 이해한다.

Q 작도(49세)와 작도(22세)는 어떻게 다른가.
A 1999년을 기점으로 세컨드 임팩트가 일어난 쪽이 2030년의 작도(49세)이고, 세컨트 임팩트가 일어나지 않은 쪽이 2003년의 작도(22세)이다. Q가 전자고 A가 후자다.

Q 나는 정말로 죽은 건가.
A 그렇다.

Q 나는 왜 죽었나.
A 전생의 업 때문에.

Q 전생의 업이 뭔데.
A 전생의 업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단순히 선악의 정도만이 누적될 뿐이다. 다행히도 당신은 현생에서 속죄를 했으므로 다음 생의 카르마 스케쥴링은 선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Q 하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A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란 그저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권리일 뿐이다.

Q 꼭 지금 속죄를 해야 했나. 그것도 죽음으로.
A 그것은 마엘의 탓이다. 마엘의 카르마 중화는 랜덤으로 일어난다. 그 중에 우연찮게 당신이 걸린 것이다.

Q ‘몬스터를 죽이는 것 같아’의 의미는 무엇인가.
A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즉 랜덤이라는 의미다.

Q 그래서 죽인건가.
A 그렇다.

Q 세상에서는 그런 걸 살인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A 이 시대에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Q 카이는 죽은 것인가.
A 카이는 살지도 죽지도 않았다. 카이는 영혼만 토성에서 온 것이다. 15년간의 지구 탐사를 마친 카이는 올때와 마찬가지로 영혼만 토성으로 돌아갔다.

Q 영혼만 온거라면 육체는 어떻게 된 것인가.
A 막 출생하려던 인간의 태아를 사용했다.

Q 아카식 레코드에 벌크 인서트란 무엇인가.
A 아카식 레코드는 영혼이라는 시스템의 카탈로그 데이터베이스다. 기억의 글로벌 영역은 행성 별로 로컬로 저장되는데, 대량의 데이터를 전송해야 할 경우 성능상의 문제로 무결성 검사를 거치지 않는 것을 벌크 인서트라고 한다.

Q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A 적어도 나는 이해한다.

Q 당신만 이해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남을 배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A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다.

Q 그럴 거면 왜 책을 찍었나. 다른 사람 보여주려고 찍은 것 아닌가.
A 사실 그렇다. 나는 항상 나를 위해서 글을 써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나의 취향이 과연 타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책을 찍었다.

Q 남을 즐겁게 한다던가 메시지를 전달한다던가 하는 의도는 없나.
A 없다. 나는 그저 반응이 궁금했을 뿐이다.

Q 그렇다면 이것은 거대하고 짓궂은 장난에 불과하지 않은가.
A 장난 맞다. 원래 예술이 그런 거다.

Q 역시 쓰레기로군.
A 여기까지 읽은 독자도 바보다.

Q 속았다.
A 속였다.

Q 실망이다.
A 원래 마지막에는 적절한 실망을 줘야 한다. 그래야 그 실망만큼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작품에 대한 만족감이 커진다. 예를 들어 군대의 봉급이 한달에 100만원 정도로 충분히 나온다면, 군대에 대한 만족도는 지금보다 훨씬 떨어질 것이다. 봉급이 한달에 1~2만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심리적 불균형을 만회하려는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군대에 대한 만족도를 높히는 것이다.

Q 그런 면에서 이 책이 무료로 배포된 건 크나큰 잘못이다.
A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돈을 기준으로 재미를 매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쿠니 가오리의 많은 중편소설은 분량에 비해 가격이 너무 세다. 그래서 돈이 아까워서라도 재미있게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런 절박함이 전혀 없다.

Q 그런데 왜 무료로 배포했나.
A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독자가 재미있게 보는 걸 의도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반응을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Q 반응을 보려고 20만원이나 투자했나.
A 글 쓰는데 투자한 시간까지 포함하면, 돈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priceless)

Q 하지만 당신은 다음달 1일에 군대간다. 그래서 반응을 볼 수 없다.
A 나도 그 점은 아쉽다.

Q 그런 면에서 당신의 의도는 이미 100% 실패했다.
A 어떻게, 텔레파시 같은 거로 안 될까.

Q 그래봤자 “재미없어” “실망이야” 같은 것만 수신될껄.
A 모르겠다. 어찌됐건 끝냈으니 축배를 들자.

Q 술도 못 마시면서.
A 그럼 헹가래라도 하자.

Q 둘 밖에 없잖아.
A 그럼… 별 수 없지. 그냥 헤어지자.

Q 그래.
A 잘 지내라.

Q 난 이미 죽었잖아.
A 아참 그랬지.

Q 너도 군대 잘 갔다 오고.
A 어떻게든 되겠지.

마엘과 함께는 독자와 이별했다.

정리/ 작도

200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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