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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텐

재미가 있던 없던 상관없다. 난 그저 미샤 얼굴만 바라봐도 즐거워…

악마는 행복하면 안되나요?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엄숙주의다. 점잖은 체 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어려운 말을 늘어놓는 것. 예를 들어 신해철씨의 음악이라던지 이번에 개봉하는 원더풀 데이즈라던가. 싫은 건 아닌데 좋아하지도 않는다. 단지 내 취향이 아닐 뿐이다. 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듣고 안 보는 것도 아니지만…

예를 들어 광복절특사나 가문의영광을 충분히 재밌게 즐기고 나왔으면서 "내용 하나도 없네. 뭐 한국영화가 다 그렇지 뭐." 하는 사람 보면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만약 본다면) 뒤통수를 갈겨주고 싶다. 어 정말? 하고 묻는다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사람아.

하여간 그래서, 요즘에는 공부하는 것도 많고 너무 머리속에 집어넣어야 할 것이 많다보니,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진지한 건 싫다는 것이 나의 입장. 그런 이유로 아무리 열심히 봐봤자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될만한 피타텐 같은 애니메이션이 좋아지는 요즘이다.

내가 맨 처음 통신에서 다운받아 봤던 애니메이션이 디지캐럿이었다. 그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그때당시 56k 모뎀으로 천리안을 하던 나는 속도가 너무 느린 탓에 어지간한 건 받아볼 생각도 못했고, 그 중에서 가장 용량이 작았던 (짧으니까)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받아서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디지캐럿이었던 것이다. 처음 만남부터가 수상쩍었다… 난 항상 이런 식이다. 처음으로 들었던 락 앨범이 마릴린맨슨 4집이었고. 항상 처음이 삐딱하게 나간다. 그러니 취향도 이상해질 수 밖에. 보통의 사람들이 애니메이션계에 입문하는 과정과는 별개로 나의 처음 애니메이션 처녀작은 디지캐럿이었던 것이다. 그 말도 안되는 초 매니악한 애니메이션부터 보기 시작했으니… 지금에 와서야 겨우 대중적인 애니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매니악한 것만 좋아해서 꽤나 방황했다. 왜냐하면 매니악한건 드무니까 많이 볼 수가 없어서였다.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마릴린 맨슨에 푹 빠진 후 그 후로 이상한 음악들만 골라서 찾아 들었지만 느낌이 안 왔다. 그 당시 인디쪽을 많이 들었었는데, 그 후로 사실 마릴린맨슨에게서 느꼈던 것이 단순히 쿨과 같은 댄스음악의 느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무슨 얘기하다 이렇게 됐더라;;;

하여간 그래서 피타텐이 애니로 나온다길래 아무 생각없이 봤다. 사실 디지캐럿처럼 매니악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꽤나 기대했는데 너무 평범해서 솔직히 실망이었다. 게다가 중반에는 꽤나 김빠지고 지루한 전개여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코믹 러브러브한 분위기여서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끝날 즈음해서 "악마는 행복하면 안되는 건가요?" 하는 대사가 나왔을때 이미 나는 완전히 몰입해서 감동의 도가니탕이 펄펄 끓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질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피타텐이라는 애니를 사랑하고 있었고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재밌든 재미없든 상관없어.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꺼야. 사랑해… (예전에 시스터 프린세스 볼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 ㅋㅋ)

뭐 하여간 피타텐은 그런 애니로, 캐릭터들은 무진장 귀엽고, 캐릭터간의 관계설정도 매우 뛰어나다.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별로지만, 일단 애정을 가지기 시작하다 보면 캐릭터 얼굴만 멍하니 바라만 봐도 20분이 후딱 지나간다. 결국 어느새 마지막화까지 다 봐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 발전에 공헌하는 애니도 아니고, 크게 특징지을 수 있는 애니도 아니다. 5년만 지나도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잊혀져서 과거의 기억속으로 잊혀져버릴 한번 쓰고 쉽게 버리는 쓰레기같은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그런 피타텐이 나는 좋다. 참 취향도 별나다.

write 2003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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