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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기술의 발달이 깊이를 잃게 한다

07/01/01 14:25(년/월/일 시:분)

창작이 점점 쉬워지고 있다. 컴퓨터로 틱틱 탁탁 조금만 두드리면 음악이 뚝딱 나온다. 워드프로세서의 발달로 소설 고쳐쓰기도 정말 쉬워졌고, 서점에 들리면 온갖 종류의 작법서들이 깔끔하게 번역되어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각종 디지털 장비도 계속 가격이 싸지고 품질이 좋아지고 있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왠만큼 퀄리티가 나오는 작품을 빠르게 만들 수 있다.

굳이 창작만이 아니라, 요즘은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영어 공부하기도 점점 쉬워지고, 그래서 그만큼 영어 잘 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게 늘어났다. 대입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유명한 학원에 등록하려면 밤을 새서 줄을 서야 했지만, 이제는 인터넷에서 메가스터디나 이투스만 접속하면 똑같은 강의를 훨씬 싸게 볼 수 있다. PMP에 넣고 다니면 아무데서나 볼 수 있고.

그래서인지 요즘엔 아이돌 그룹을 봐도 다 잘한다. 예전에는 얼굴이 잘 생기면 그만큼 노래를 못 부른다던가 싸가지가 없다던가 했는데, 요즘 동방신기를 보면 얼굴도 야들야들하게 잘 생기고, 게다가 노래도 파워풀하게 잘 부르고, 덩달아 노래도 좋고, 춤도 잘 추고, 쇼프로에 나와도 재밌다. 아니 도대체 뭐 어디 흠 잡을데가 없어. 예전 같지가 않아.

이게 다 컴퓨터 때문이야. 컴퓨터가 모든 것을 값싸게 만들고 있어. 같은 품질을 내는데 전보다 훨씬 싼 비용이 든다. 시간, 노력, 인적 자원 같은 것까지 비용으로 계산한다면, 정말 모든 면에서 비용이 덜 드는 셈이다. 그래서 점점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어간다. 아니 이거 좀 모순이지 않나?

생각해보자. 옛날, 한 70년대만 해도 장엄한 오케스트라 반주를 쓰려면 정말 힘들었다. 일단 그 많은 악기 파트를 서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작곡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악기들 간의 밸런스를 맞추고, 맨 앞에서 계속 음을 들으며 어긋나지 않도록 연주자들을 닥달해야, 겨우 '오케스트라 반주'라는 것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만 해도 오케스트라 반주가 나오면, 와 대단하다, 그 자체로도 감동을 먹었다. 이거 하는데 엄청 고생했을텐데. 아주 그냥 고생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구만.

그런데 요즘엔 오케스트라 반주를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 그런건 신승훈도 했고, 조성모도 했고, SG워너비도 했고, 보아도 했고. 다들 하는 거잖아? 이젠 별로 어렵지도 않다. 적절히 돈만 쥐어주면 뚝딱 나오는 게 오케스트라 반주다. 아니 공부를 조금만 하면 굳이 돈을 쥐어줄 필요도 없다니까.

심지어는 이승환도 스트링 머신을 쓴다. 컴퓨터로 뚝딱 뚝딱 만드는 것 같지만, 그래도 들어보면 꽤 그럴듯하니까. 라이브 할때도 오토 튠으로 목소리를 자동 보정하며, 스트링 머신으로 뚝딱 뚝딱 오케스트라 반주를 넣고, 최첨단 신디사이저로 꼭 진짜 악기 같은 소리를, 아니 오히려 진짜 악기보다도 더 좋은 소리를 훨씬 싼 비용으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듯한 게 어느 경지를 넘으면 진짜가 된다. 이게 요즘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가치가 떨어진다. 대곡을 만들어봤자 뭐해? 그거 아무나 다 하는 거잖아. 그래서 요즘엔 대곡이나 명곡이 잘 안 나온다. 굳이 명곡을 만들 필요가 뭐 있어? 마음만 먹으면 근 100년 이내의 최고 명곡들을 한달에 5천원만 내면 무제한으로 다운받아 들을 수 있는데. 요즘 아이팟에는 앨범 2천장이 들어간다. 200그람도 안 되는 이 조그만 기기 안에 평생 다 듣기도 벅찬 음악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돈이 안 벌리는 거지. 싸지니까. 이건 굳이 음악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도 보면 점점 자기가 비싸다는 걸 보여주려고 몸부림을 친다. 이거 괴물 만드는 데만 50억이 들었어! 너 같으면 이렇게 높은 곳에서 줄 타기를 할 수 있겠어? 내 화투 돌리는 솜씨 어때! 그렇게 자기의 비싼 모습을 전시하는데 여념이 없다 보니, 영화도 깊이를 잃고 껍데기만 화려해진다. 그만큼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싸졌다는 반증이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43580
[씨네21] 정성일·허문영·김소영의 2006년 한국영화 결산 좌담 [2]

허문영: 일종의 프로페셔널리즘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의 대중영화 주인공들이 오로지 암흑가에서 고통받는 아웃사이더였다면 지금의 주인공들은 프로페셔널리즘을 끊임없이 과시한다. <왕의 남자>는 광대놀이, <타짜>는 도박술을 과시하는 과정 자체를 굉장히 중요한 엔터테인먼트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소영: 그리고 <괴물>에서는 테크놀로지 자체가 과시다. 프로페셔널리즘 자체가 영화를 통해 구현되는 것 같다. 한편 그런 요소가 없는 영화는 액션영화 예처럼 꽃미남과 젊음을 절대적인 자산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성일: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른 말로 영화의 전시성과도 관련있다. 하지만 영화가 전시성에 몰두할 때, 인물은 깊이를 잃는다. 그래서 세 영화의 공통점은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고 캐리커처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건의 변화는 있지만, 그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감정, 심리적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서사 구조의 화법 변화가 전시성을 획득하는 대신 인물의 깊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는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모두에 해당한다. 올해 유난히 메소드 액터들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도 이에 대한 증명 사례다. 특히 설경구 영화가 그렇다. <사랑을 놓치다> <열혈남아>는 아주 못 만든 영화가 아니다. 설경구의 연기도 이전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관객은 이제 설경구 방식의 인물에 지루함을 느끼는 것 같다. 말하자면 대중은 인물을 포기하고 사건에 집착하며 전시적 효과에 매혹된다. 이것이 2006년 한국영화에 대한 대중의 태도 변화다.

허문영: 하지만 그 변화가 유독 올해 영화만의 퇴행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한 영화의 캐릭터가 주변부나 하위로 전락하게 되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스타일, 전시성, 플롯 등. 하지만 이는 70년대 중반 이후 세계 대중영화의 추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리즘이 영화의 인물을 밀어내는 장본인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내가 이번에 굳이 '공연'을 했던 이유도, 현재 음악 시장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것이 공연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연은 컴퓨터로 싸게 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앞으로도 싸질 여지가 없어. 그래서 MP3에는 500원 내기도 아까워하면서, 공연에는 5만원, 8만원, 17만원씩 선뜻 내잖아. 이거 정말, 신기하지 않아?

http://xacdo.net/tt/index.php?pl=568
12월 23일, 작도닷넷 공연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공연은 대량 생산이 안 되잖아. 이건 끝까지 수작업으로 남을 부분이다. 하긴 영화도 이런 공연을 찍어내는 식으로 만들려고 나온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나온 영화도, 기술의 발달로 점점 의미를 잃고, 돈이 잘 안 벌리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물론 영화에 뜻이 있는 아마추어나 인디 제작자들에게는, 영화가 싸진다는 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아마추어나 프로나 점점 차이가 줄어든다는 얘기다. 그래서 요즘 UCC 동영상이 뜨는 것이기도 하고. 그만큼 프로의 밥줄을 위협할 거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들 손에 돈이 쥐어진 이상, 돈 벌 기회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요즘같은 규모의 시대에는 뭐든지 무너트리는 쪽에서 돈이 나오는 편이지. 예를 들면 월마트. 그거 하나 세우면 그 지역의 자잘한 수퍼마켓은 다 망하잖아. 그래서 같은 시장에서 20명이 월 100만원씩 벌었다면, 월마트는 그거 다 죽이고 1명이 월 700만원을 버는 거지. 덕분에 1명은 7배를 더 벌지만, 19명이 실업자가 된다. 게다가 옛날 같으면 2000만원이 벌리던 시장규모가 700만원으로 축소된다. 이게 양극화지 뭐야.

즉 세상의 여기저기에는 무너트릴만한 것들이 잔뜩 쌓여있다. 그걸 대량의 자본으로 우수수 무너트리면 거기서 돈이 쏟아지는 거지. 하지만 그만큼 거기서 울고 가는 사람도 생긴다는 얘기. 만화 시장이 그랬고, 음악도 그랬고, 영화도 점점 무너지고 있다. 그게 결코 잘못된 건 아닌데, 하여간 돈 벌 기회가 이동한다는 거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기술이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 여기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다른 곳으로 도망쳐.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592

  • 호모사피엔스 07/01/01 15:34  덧글 수정/삭제
    아.. 한번생각해봄직한 일이네요..
    전 그래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깊이를 잃게 한다고 볼수도 있지만 깊이라고 생각했었던 허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라고 볼수있지 않을까요. 어쨋든 현상만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아요.
  • 크리 07/01/01 15:40  덧글 수정/삭제
    테크노맨서 룰!
  • 서광 07/01/01 22:50  덧글 수정/삭제
    한국 영화에서 깊이가 실종되었다데, 원래 깊이가 있었나요? 언제나 실존에 대한 물음을 하는 영화 -실존의 양태가 인물이든 사건이든지간에-는 소수자의 취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외려 다수자들은 항상 최첨단의 영사기술을 선호하는 것이 본질이잖습니까? 여기에 길항적으로 부응한 영화가 괴물이라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죠. 또한, 창조적 활동이 대량복제에 의해 무력화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창조적 인간은 창조적이니 말이죠. 저는 기술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할 필요가 없지 않나 고려해봅니다. 항상 우리 곁에 있을거니깐요? 물론 모더니티의 합리성을 삭아뜨리는 부작용은 있지만, 현재 이 작도닷넷에서 소통하고 있는 것은 기술의 선작용이니깐요....어쨋거나 정성일님은 존경합니다.
  • 황진사 07/01/03 02:40  덧글 수정/삭제
    내가 영화는 잘 몰라서 조금 조심스럽지만..
    (오랜만에) 정말 좋은(?)혹은 장려할만한(?)글인듯..
    언론에서는 삼성이 나라를 먹여살린다느니, 천재 한명이 십만명을 먹여살린다느니.. 이렇게 보도하지만, 실상은,, 삼성이 다른 회사들을 다 죽이는거고, 천재 한명이 십만명을 실업자로 만드는 셈이지..
    기술이 나쁘고 좋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쓰는 주체가 사람이고 사람은 동물이기때문에 약육강식의 순리를 따르지.. 혹 이또한 인류 진화의 과정일까..
  • 사진의미학 07/01/16 01:16  덧글 수정/삭제
    닷넷님의 말은 어느정도 공감이 갑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추구해온 것은 바로 빠름, 지루하지 않은 것,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고 그 결과로 예술이든 사회전반에 걸쳐서 깊이를 잃어가고 있지요. 이 한 시대를 살고 있는 저도 깊이를 잃어 가는 것을 느끼지만 반대로 추구하려고 발버둥 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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