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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사람들이 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그 속에 한 사람. 다들 어디론가 흘러가는 속에 갈 곳을 잃고 헤메이는 속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 다리를 다친 것 같다. 그는 발을 밟힌다. 아파한다.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다.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물결. 사람의 벽. 이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표지판도 없다. 그저 정처없이 헤메이는 가운데 주위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일뿐. 쓰러진 사람은 주저앉는다.

때론 누군가에게는 맑고 푸른 하늘마저도 저주가 된다. 살랑살랑 이는 바람마저도 괴롭다. 조그만 것에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때론 세상이 나에게 동화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슬프면 세상도 슬프고, 내가 괴로우면 세상도 괴로웠으면 좋겠다. 마구 울고 싶을때 또는 웃고 싶을때는 하늘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게릴라성 폭우가 쏟아졌으면 좋겠다. 문제는 이 세상이 랜덤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반대라면 모를까, 세상은 이도 저도 아니다. 가끔씩 세상이 좋을때도 있고 싫을때도 있고 사랑스러울때도 있고 미울 때도 있다. 어찌됬건 세상은 나같은 미약한 존재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 세상은 하나하나의 개체에까지 신경쓸 정도로 자비로운 존재는 아니다. 그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쓰러져있는 사람을 만났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스쳐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지금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누군가 그를 일으켜준다면 그는 실패한다. 그걸 알기에 나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푸른 하늘이 어두워져간다.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햇빛을 차단한다. 누구에게나 공짜로 제공되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는다. 침묵이 세상을 지배한다. 빗방울이 내리깔린다. 지붕도 없이 열악한 지면 위로 아무도 어쩔 수 없는 비가 내란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모든 것을 부숴버린다. 울부짖어도 반항해도 소용없다. 그렇기에 비오는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표정하다. 비에 어떠한 감정을 드러내도 비는 반응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무시한채 그저 자연현상으로 내리는 것이다.

무력감을 느낀다. 나는 하찮은 존재다. 아무런 힘이 없다. 나는 비를 멈출 수도 없고 내리게 할 수도 없다. 그저 비가 오는 것을 하염없이 초점없는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비가 오는 창밖에는 아까의 그 사람이 아직도 쓰러져있었다.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가운 금속성의 비가 끝도 없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체온이 떨어진 모양이다. 입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미 옷은 완전히 젖었다. 그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쓰러졌다. 어디론가 이동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무력했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비는 진눈깨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기온은 자꾸만 떨어져갔다. 으슬으슬해진 나는 난로를 피웠다. 아직도 바깥에는 그 사람이 쓰러져있었다. 자칫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죽지 않으니까. 따뜻한 난로를 쬐며 그 사람이 받을 고통을 생각했다. 아마 뼛속까지 시린 기운이 파고들 것이다.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듯 온 몸이 꼼짝도 하지 않겠지. 비는 끝없이 쏟아지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뇌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란 기절하는 것 정도겠지. 오랜 생각끝에 뇌는 기절을 결정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기로 한다. 고통도 생각도 차단한 끝에 그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홍차에 담갔던 레몬에서 씨가 빠졌다. 씨가 홍차 잔 안에서 요동을 쳤다. 레몬의 섬유질이 홍차를 더럽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후루룩 마셨다. 또 하나의 씨가 빠졌다. 게다가 그것은 반으로 쪼개진 것이었다. 아마도 씨의 쓴 맛이 홍차에까지 스며들 것이다. 나는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그 사람을 구했다.

나는 그 사람의 옷을 전부 벗겼다. 옷은 구질구질하게 때에 절어있었고 비에 젖어 무거웠다. 나는 난로 앞에 옷을 두고 말렸다. 그는 내 침대에 눕혔다. 보송보송하던 이불이 땀과 비로 젖었다. 불쾌한 냄새가 났다. 나는 아까 마시던 홍차를 가져와 홀짝였다. 차는 식어 쓴 맛만 남아있었다.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싫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느덧 오한이 사라지고 차분해졌다. 새하얗던 피부에 살짝 혈색이 돌았다. 나는 맥을 짚어보았다. 숨이 끊어졌다. 늦었던 모양이다. 죽고 난 후의 인간의 표정은 죽기 직전보다 편안해 보인다. 아직 죽은지 몇분 되지 않은 탓에, 심장이 뛰지 않아도 혈액의 산소가 공급되고 있었다. 아직 몸은 따뜻했다. 체온이 식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죽음은 천천히 온다. 마치 홍차가 식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식어간다. 그윽하던 향기가 날아가버리고 쓰고 텁텁한 뒷맛만이 남는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혈기 왕성하던 청춘은 잠깐이다. 그 시절의 풍미를 즐기기에 그 시기는 너무 짧다. 원할때마다 브랜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번 식은 인간은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간다. 이미 향기를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식어버린 열정으로 기어이 살고야 마는 것이다.

희망이란 부질없다. 몇 안되는 인생의 희망을 부여잡고 사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 미약한 희망의 줄마저 끊어지는 날에는 드디어 부질없는 생명의 줄마저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존재한다. 만약 내가 바로 내일 갑작스런 사고로 죽는다고 하면, 일주일 후를 위해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죽을 것을 모르기에 일주일 후를 기약하는 것이 철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 사람은 아까 넘어졌을때, 한시간 후에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했을까. 그렇다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때때로 인간은 미래를 본다. 그 미래는 즐겁고 기분좋고 마음에 들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할 때일 것이다. 죽을지 안 죽을지 모르는 상황보다, 죽는게 확실한 상황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런 도망칠 여지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다가오는 운명을 체념하며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끝까지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며 뇌 안에서의 자신의 환타지에만 집착할 것이냐. 나라면 차라리 뇌내 마약성분을 분비하면서 끝까지 현실을 부정하며 환상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그 편이 더 마음이 편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떨까.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침대에는 죽은 사람이 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모습이 될 것이다. 저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나라면 저렇지 못할텐데. 나는 비뚤어진 이불을 바로잡아 주었다. 비록 죽은 몸이지만 오늘 밤이라도 편히 보내게 하고 싶다. 이것은 그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존경 표시인 것이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hit:3005|200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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