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제 서태지도 나이를 먹었다는 거지."
"그죠."
우리는 시도때도 없이 음악 얘기를 했고 그 중 절반은 서태지 욕이었다. 서태지 욕은 정말 즐거웠다. 맨날 그저 그런 가요만 듣다가 처음으로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귀가 트인 후로, 서태지가 대단해서 음악이 좋은 줄 알고 광적으로 열광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서태지의 음악은 다 외국 음악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낀 과정까지, 우리 둘은 너무나 닮아있었다.
"난 처음 AC/DC의 Back in black을 듣고 충격 받았다니까. 락앤롤 댄스랑 완전 똑같잖아?"
"어휴, 그건 그래도 돈 내고 정식으로 쓰기라도 했죠. 난 알아요는 Milli Vanilli의 Girl you know it's true를 그대로 따라했으면서 뻔뻔하게 시치미 뚝 떼고 있었잖아요."
"그래도 표절이라고 하긴 뭐하지. 음 몇개 다르고 코드진행 조금 다르니까."
"그게 더 열받는 거라구요. 차라리 라이센스를 받아서 썼으면 몰라. 음 몇개 바꾸고 코드 조금 바꿔서 한글 가사 붙여서 내놓는 식이라니.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서태지 음악에는 서태지가 없잖아요."
서태지에게는 오리지날리티가 없어.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 없었다. 서태지는 말이야, 보따리장수야 보따리장수. 외국음악 잘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외국에 좋은 음악 있다고 가져다가 적당히 포장해서 팔아먹는 거 아니야. 걔네들한테 원곡을 들려줘봐, 서태지를 사겠어 원곡을 사겠어? 우린 서태지에게 속았던 거야. 지금까지 서태지가 좋은 줄 알았잖아? 하지만 그건 서태지가 좋은게 아니라 AC/DC가 좋은 거고 Milli Vanilli가 좋은 거고 Beastie Boys가 좋은 거고 Cypress Hill이 좋은 거잖아.
"그래도 은퇴했을땐 정말 가슴 아팠었는데."
"무슨 소리에요. 저는 그때 돌아올 줄 알고 있었어요. 서태지가 어떤 사람인데. 그때 노래도 나왔었잖아요? 시나위의 은퇴선언."
그래 맞아. 원래 서태지가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는데, 하도 실력이 없어서 나갔지. 그런데 시나위에서 가만 보니까 이 놈이 은퇴를 하겠다는데 암만 봐도 나중에 컴백할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그때까지 TV랑 담을 쌓고 지내던 시나위가 처음으로 TV 출연까지 해 가면서 이 노래를 홍보했잖아. 기다림에 지칠때면 다시 돌아올꺼야~ 너희들의 눈 앞으로~
음악적인 배신을 때린 것도 모자라, 은퇴선언까지 번복하면서 서태지는 역시나 돌아왔다. 그리고 역시 은퇴하고 안 돌아오는게 나을 뻔했어 싶을 정도로 구리구리한 음악만 줄창 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 서태지도 나이를 먹었다는 거지. 중견가수가 다 됐어. 이제 옛날 히트곡들이나 부르면서 근근히 먹고 살아야지 않겠어? 쯧쯧.
그렇게 울트라매니아가 나오고 라이브 와이어가 나와도 우리는 서태지에 관심이 없었다. 나와봤자 별 수 있겠어? 울트라매니아가 나왔을때 다음 앨범은 Linkin Park나 Evanescence같은 이모코어 쪽이 아닐까 싶더만 결국 그렇게 나오고. 서태지조차도 우리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이 확인된 후로는 관심이 뚝 끊겼다. 서태지는 더 이상 우리의 지존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동아리 방에서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던 선배를 목격했다.
"선배, 뭐 들어요? 선배답지 않게 볼륨도 작게 하고. 뭘 혼자서 좋은 걸 듣길래 이렇게 몰래 듣는 거에요?"
"어? 어어. 아 그게.."
서태지의 Live Wire였다.
"야, 그게 참. 오랜만에 들으니까 좋더라."
"아니 무슨 소리에요 선배, 전에만 해도 산만한 구성에 정신없이 요즘 유행만 따라간 얄팍한 음악이라고 했잖.."
"좀 조용히 해봐! 안 들리잖아. 제발."
나는 그때 선배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나도 부끄럽다고, 이런 모습."
선배는 볼륨을 조금 더 줄이고 음악에 집중했다. 우리는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있는게 아니었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
|hit:2628|200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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