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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
옛날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는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하루종일 동화책만 읽었고 커서는 소설책만 읽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만화를 봤습니다. 소녀는 하루종일 이야기에 빠져 살았습니다. 소녀에게는 이야기가 현실이었습니다. 괴롭고 힘들 때면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이야기 속은 소녀가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슬플 때는 기쁜 이야기를 보았고, 괴로울 때는 즐거운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사랑을 하고 싶으면 연애소설을 보았고, 섹스를 하고 싶으면 포르노를 보았습니다. 소녀에게 이야기는 도피처이자 안식처였습니다.
소녀는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공책을 피고 무언가를 받아적어야 했습니다. 소녀에게 픽션이 아닌 논픽션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궁리끝에 소녀는 공책에 필기 대신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이야기들이 정교하게 뒤섞여 마치 처음 보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소녀는 자기가 쓴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써놓은 글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쓰면 쓸수록 글은 매끄러워졌고 점점 그럴싸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소녀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소녀는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소녀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대변해 주었습니다. 일단 소녀의 이야기에 빠지면 현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녀는 표절시비에 휘말립니다. 누군가 소녀의 작품은 전부 정교하게 끼워맞춘 표절작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던 것입니다. 소녀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소녀는 남의 이야기를 가져다 절묘하게 섞어놓은 것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녀의 이야기조차 소녀의 도피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도망칠 곳이 없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완전히 도망칠 곳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몇년 후 소녀의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는 놀랍게도 이 세상의 언어로 쓰여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 또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상업적으로 대실패를 봅니다. 하지만 소녀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춥거나 덥거나 배가 고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상관없이 끝없이 자기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쉼없이 중얼중얼 거리며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심한 악취를 풍기며 소녀의 주검이 발견되었습니다. 소녀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행복했습니다.

2.
옛날옛날에 하나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제목 조차도 읽을수가 없었습니다. 정신병자가 휘갈긴 낙서같은 것들이 끝까지 가득 쓰여 있었습니다. 그 책을 쓴 사람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쉼없이 자기가 쓴 글을 읽다가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 때문에 다들 호기심으로 책을 들춰보긴 했지만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목을 말할 수 없는 그 책은 유명세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어느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쉽게 그 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알아볼 수 없는 글이라도 잘 알수는 없지만 힘이 넘치고 멋있었기 때문에 유명한 장식품 정도로 생각되었습니다.

3.
옛날옛날에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소년은 한번도 살아야 할 이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제목을 말할 수 없는 그 책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소년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책만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었습니다. 소년은 그 책에서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찾고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책을 읽다가 죽었습니다. 소년은 행복했습니다.

4.
옛날옛날에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소년은 한번도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너 어느날 소년은 제목을 말할 수 없는 그 책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놀랍게도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책만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었습니다. 소년은 그 책에서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살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책을 덮고 기지개를 펴고 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평생 소년은 틈틈히 책을 보다가 죽었습니다.

5.
세상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그 책을 보고 무언가를 찾아냈습니다. 삶의 이유를 찾거나 죽음의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살든 죽든 죽었습니다. 행복하게 죽었습니다.

- 유리가면을 보다가.
|hit:2803|200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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