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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라는 분의 자서전
글을 쓰기에 앞서서...



뜬금없이 나이도 어린 것이 왜 살아온 이야기를 쓰냐고 물어보지 마라. 쓰고 싶어진 걸 어쩌라거... 실은 다른 게 아니라 얼마 뒤에 곧이다... 8월이면... 죽을 지도 모른다. 몸상태가 생각보다 심히 안좋다. 그래서 쓴다. 그냥 죽기엔 아까워서... 어린 나이에 좀 맺힌 게 많아서 ㅎㅎㅎㅎㅎ

일단 내가 왜 나무가 되었느냐를 설명하고 싶어 서문 비스므레 한 걸 쓰게 되었다. 남들이 그랬다. 정말 떠돌이 같다고... 바람같다고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항상 자유롭게 하지만 고독하게 혼자 떠도는 바람같아 안쓰럽다고... 한군데에 뿌리내리고 남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며 항상 자기가 필요할 때 곁에 있는 친구가 되어 달라고 너에겐 안정이 필요하다고... 그 때 생각난 게 나무였다. 맑은나무... 그래서 나우누리에서 97년까지 나의 닉은 ‘freezone’였고 한글 닉이 사용가능하게 되었을 때는 ‘자유로이’였다가 97년 IRC를 시작하면서 난 ‘맑은나무’라는 닉을 쓰기 시작했다. 년수에 비해서 그다지 대인관계가 많은 편은 아니다.

신체나이 24년 6개월, 78년에 태어난 남성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나 현재 키 181cm, 몸무게 74kg, 허리사이즈 30이나 허벅지 때문에 32를 입어야 하고 남들에 비해 팔이 길고 가슴이 작은 분위기는 탤런트 김태우를 닮았다고 한다. 아직 그 사람의 연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버스정류장의 주인공이던가? 지금은 안닮았을 거 같다. 축구를 무척 좋아하고 잡지식이 무척이나 많은 평범한 사람이다.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재미없더라도 타자친 성의를 생각해 읽어주기 바란다. 지속적으로 수정할 생각이긴 하지만 천생의 게으름 때문에 가능할는지 모르겠다. 오늘 간만에 자고 일어났더니 힘이 남아도나보다. 이런 걸 다 쓰고... 평소에 비해 정상이 아닌 거 같다.





나의 유년기와 국민학교때의 기억



유년기의 기억은 5살때부터 이어진다. 아들이라고 지나친 편애를 하는 할머니밑에서 남부러울 거 없이 자라났었다. 상당히 외향적이고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익히는 상당히 똘똘한 놈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박사였다. 결코 지금은 아니다.-_- 어릴 때 저런 말 안들어 본 사람 몇이나 있겠는 가.....

우선 나의 가족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할 듯 하다. 우선 나의 할아버지... 어떻게 사셨는 지는 몰겠다. 들은 바 없다 공장을 운영하시는 잘사시는 분이었다 한다. 그러다 공장에 불이 나서 망한 뒤로 폐인이 되셨다고 한다. 나의 할머니... 17살에 시집오신 다음 갑작스럽게 폐인이 되신 할아버님 때문에 교회에 빠져 목사님의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라 믿고 사시며 어렵게 사셔서 그런 지 자식교육이 전반적으로 돈앞에선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친가의 분위기는 상당히 배타적이며 돈앞에 슆게 무너진다. 저열한 사람들의 표본이랄까...

결국 나의 친척들은 전부 기독교인이다. 교회 목사이신 작은 아버님, 장로이신 큰 아버님, 권사이신 할머니와 큰 고모님 기타등등 전부 한자리씩하면서 교회 4000명의 교회에서 한 목소리 내신다. 원래 나의 친가는 찟어지게 가난해서 아버지 어렸을 적엔 거지 움막같은 곳에서 살았다 한다. 그래서 아버지 국민학교때부터 중학교때까지 축구를 하셨다 한다. 꽤 잘하셨는데 잘 먹지 못한 관계로 돈두 없고 포기했다 한다. 그리고 대리시험을 봐주고 명문고에 입학시켜준 댓가로 짜장면 한그릇 얻어먹은 걸 평생의 한으로 생각하신다. 후기고등학교 등록금을 빌리기 위해 친척들에게 갔지만 외면하는 모습을 보면서 돈에 한이 맺히셨다 한다. 아버지는 가무에 능하며 축구와 각종 격투기에 단련되어 176cm에 적당한 몸무게를 유지하며 서글서글한 외모로 많은 여성을 울린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에 적어도 7명의 여자가 있었다. IQ 145의 머리로 뛰어난 재치를 보이지만 아집이 너무 강하고 대국을 바라보는 시야가 되어 있지 않으며 덕이 없어 하는 일마다 실패했던 거 같다. 날 낳고 나서도 여전했다.

나의 어머니는 유서 깊은 안동 김가의 후손으로 외증조할아버지는 전라도 군수를 지내셨으며 외할아버님은 교장선생님을 하시면서 일가친척이 대부분 장관이나 차관 육군 대령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현재도 친척들은 다 돈보다 명예를 우선하는 지 관료 쪽에 대단히 많다. 사업하는 사람이 없다는... 키가 156cm 결혼당시 39kg의 가녀린 몸의 소유자며 병약한 분이었다. 어쨌든 고등학교때 홍익대 미대를 대통령상받고 특전으로 입학하시고 2학년 다닐 때 아버님이랑 연애를 했다 한다. 100일만에 결혼하셨다 하니... 지금도 외할머님은 한탄하신다. 어쨌든 어머님께서는 재복이 있다는 말을 들으며 날 낳고 장사를 시작하셨는다. 자본금 450만원을 가지고 10년 뒤 자산 100억을 가진 부자로 성공하셨다.

덕분에 난 어릴 적에 먹는 것을 가지고 고생하진 않았다. 부속국민학교라고 이상한 국민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나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입학시험을 쳤다. -_- 무슨 국민학교가 입학시험을 치는 가... 3/4는 부자들이었고 1/4는 못사는 애들이어서 아이들 간에 치졸한 싸움 같은게 많았다. 선생들이 촌지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간혹 이런 일도 있었다. 바이올린을 단체로 배우는 데 선생이 애들 바이올린을 가지고 날랐다. 50개면 당시 얼마였을 까... 하여튼 상당히 잘살았던 사람들이 많다. 5학년 학생 부회장선거에 당선시켜주면 학교에 식수 50그루와 사슴농장에 잔디를 깔아 주겠다고 약속해서 자기 딸을 부회장에 당선시켰으니... 오죽했겠는가 어머님은 무조건 선생님말씀에 복종하랬지만 난 그게 잘 안되었다. 사업하시면서 나와 누나를 챙기는 어머님을 보고 사람들이 항상 감탄했다.

그러다 국민학교 1학년 겨울때 사건이 터졌다. 친구와 놀고 있는데 3명의 상급생이 날 괴롭힌 것이었다. 당연히 싸웠다. 난 태어날 때 4.8kg이었다. 상당히 어릴 때부터 체격이 좋았다. 아직까지 뒤에서 5번째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눈이 와 무척이나 운동장이랑 작은 연못이 하얀 예쁜 날이었다. 눈을 뭉쳐 던지는 데 안에 돌멩이가 있었다. 난 연못얼음을 깨서 머리를 찍었다. 하얀 눈이 쌔빨간 피에 적셔진 걸 본 뒤로 성격이 변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미친 듯이 책만 읽었다. 현실이 싫어 항상 외면했다. 집에 가면 밤 12시 이전에 잘 수가 없었다. 한잔의 술과 함께 취해서 들어오신 아버님은 내가 왜 술마시는 지 아냐고 너희들은 복받았다고... 보통 새벽 3시에 끝난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 수준에 맞춰주기 위해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알아야 덜 지루할 것이 아닌가...-_-  

아버지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랬다. 바둑을 배우면 왜 이창호는 자기 아버지에게 일년에 5억을 가져다 주는데 넌 머냐고 머하러 배우냐고... 태권도와 격투기를 배웠다. 경찰서 바로 옆에 있는 상무관이라는 곳에서... 주로 형사들이 몸을 단련하는 곳이었다. 어린애는 나뿐이었다. 도망다녔다. 혼났다. 싫었다.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게 너무 화가 났다. 내가 공부를 안하자 중학교를 안보내려 하셨다. 차라리 가게에서 일을 하라며 너 따위 정신은 쓸모없다고 날 항상 비하했다. 어린 시절에 상처 받았다.
돈이 없었다. 집은 돈이 많지만 난 소풍갈 때 500원받은 게 전부였다. 항상 니가 먹고 자는데 얼마가 든다면서 호통치는 아버지에게 돈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돈받은 사실을 알면 어머님도 혼나시고... 지금도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때 스키타러 갔는데 타다 배고파서 만두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져간 돈이 1000원이 전부였다. 그거 밖에 안줬다. 가정교사두고 공부가르키고 음악회에 옷 이쁘장하게 입혀서 꽃다발들고 유명한 피아니스트한테 꽃주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도벽이 생겼다. 처음엔 책을 사기 위해 훔쳤다. 나중엔 즐겼다.

국민학교 3학년때 수업시간에도 걸으면서도 항상 책을 읽는 날 보고 선생님이 그러셨다. 만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번의 여행이 낫고 한번의 경험이 더 소중하다고... 그리고 옆에서 애들이 비웃었다. 만권의 책을 읽지 않으면 책읽는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그때 난 결심했다. 그리고 분명히 말했다. 내 나이 30이 되기 전 3가지 일을 하겠노라고... 첫 번째 만권의 책읽기, 두 번째 국토횡단하기, 3번째 가슴뜨거운 사랑하기...

미친 듯이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클라이막스부분에 소름끼치는 그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저릿저릿 몸을 울리는 흥분은 날 행복하게 했다. 졸업할 때 학교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고 졸업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먹고 서점에 가서 문 닫을 때까지 읽고 왔다. 나중에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내가 하니까 걱정되신 어머님은 내방 형광등을 빼고 주무셨다. 후레쉬를 사서 책을 읽었다. 덕분에 졸업할 때 왼쪽 눈이 안보였다.

마지막으로 국민학교때 내 베스트 프랜즈의 아버님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같이 날을 새주었다. 건설업체사장이셨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친구 어머님께서 목사님말씀듣고 헐값에 회사를 넘겼다. 옆에서 우리 가족이 말렸다. 더 좋은 가격에 우리가 인수하겠다고... 안듣고 넘겼다. 어음으로 대금을 지불받고 고의부도냈다. 교회목사랑 짜고 했다는 말이 들렸다. 목사가 그때 했던 말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뜻이니 이분에게 파시지요. ’  사건이 터진 뒤에도 하나님의 뜻이란다. 너무나 편리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시위들... 전두환 정권말기 노태우 정권때... 난 시내 중심가에 살았다. 항상 매캐한 최루탄가스와 함께 살았다. 나의 가정교사들에게 듣고 내가 신문과 길거리에 나도는 찌라시, 어렵사리 구한 이념서적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읽으면서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끝을 맺었다.





중학교 생활과 부도



국민학교 졸업하던 해, 가족회의 때 아버님께서 내게 그러셨다. 너희들도 이제 컸으니 스스로 책임지며 살라고... 휴게소를 하기로 했다. 미리 무주의 발전상을 보고 어머님께서 아버지를 국회의원을 만들고자 하는 포석의 일환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젠 돈이 많아서였을까? 아버지가 직접 사업에 뛰어드셨다. 남자의 자존심에 누구의 남편이라는 말을 듣기 싫으셨나보다. 사업가로 자리매김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게을렀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으면서 영업사장을 따로 두고 젊었을 적 데리고 있던 반건달들에게 각종 서류절차와 무주땅 매입등을 시키며 느긋하셨다. 덕분에 공기는 늘어갔고 돈은 계속 들어갔다. 뇌물을 바라는 공무원들에게 서류가 7번이 퇴짜 당했고... 비어있던 방에 라면박스로 서류들이 벽을 채워 기어이 완공 된 뒤에는 벽의 2/3정도를 채웠던 걸로 기억한다. 궁금해서 읽어봤다. 볼 줄도 모르는 지적도를 뒤적거리며 관청서류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봐도 알겠더라. 돈달라고 퇴짜놓는다는 걸... 결국 예상 공사비용 24억이 43억이 되어 자금경색에 시달릴 때 2가지 일이 터졌다. 오랜 기간 알아오던 교회장로가 급하게 현금 1억 5천을 빌려달라고 했다. 항상 그렇듯 그냥 빌려줬다. 사업할 때 누가 일일이 서류작성하고 돈 빌려주나, 그럴려면 은행가지... 들고 홍콩으로 도망갔다. 더 어려워졌다. 무주 현장소장이 공사대금을 가지고 도망갔다. 타격이 컸다.

하지만 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한일합섬이라는 당시 가장 잘나가는 브랜드의 가게를 5개를 직영했으며 2개의 상설매장과 킹코일침대매장, 옹기그릇공장과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었다. 버틸 수 있었다. 배신만 아니었으면... 어렵다는 말이 들리자 모든 사람들이 빌린 돈을 갚지 않고 계속 기일을 미루었다.

그때 내가 살던 집은 130평 호화빌라였다. 이태리대리석이 까린 바닥에 사람 3명이 들어가도 충분한 욕조... 1년정도 살았다. 그전엔 아버지가 독립심을 길러야 한다며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날 자취를 시켰다. 친척집 옆집이라 잘지냈는데 살찐 내모습을 보고 돼지갔다고 버럭 소리지르는 거에 상처받아 사과다이어트를 3주를 했다. 덕분에 살은 빠졌지만 위가 상해 집에 다시 들어갔다. 당시 난 음악에 빠져 700만원짜리 오디오와 믹싱기계를 가지고 음악 믹싱작업과 독서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이젠 익숙해진 아버지의 설교에서 집에 싸여가는 서류더미를 읽으며 집안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불안했다. 큰 가방을 샀고 그 안에 비상용으로 옷 한 벌과 손톱소제도구와 약간의 돈, 먹을 것을 채워놓고 학교다닐 때 가지고 다녔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어머님을 때린 날이었다. 어머님이 협심증으로 누우시고 어머니의 도장과 주민등록증으로 아버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나올 수 있는 돈을 다 빌렸다. 작은 돈이던 큰 돈이던... 그리고 다른 여자이름으로 재산을 빼돌리고 부도를 냈다. 어머님과 우리의 이름으로 빚이 남고 자기는 깨끗했다.

1차 부도 상태에서 1년을 더 버티셨다. 지금도 이 부분에 대해 놀랍고 한편으로는 바보같다. 나라면 포기했을 것인데... 어머님은 자존심을 내세워 안될 것을 알면서도 밀어붙혀 결국 망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눈이 더 정확하다는 걸 그때 느끼고 이 눈을 계속 유지하려 노력했다.

학교에선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국민학교때는 잘사는 줄 몰랐는데 중학교가니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였다. 애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에게 개기다 죽도록 맞았다. 재수없었다. 잘살고 못살고가 무슨 문제인데 날 편애하는데? 하여튼 야구방망이 금가고 T걸레 2개가 3조각나고 마지막에 빗자루대로 맞는데 결국 살이 터지더군... 옷도 찟어지고... 그때 맞다 무릎안쪽을 다쳐 한참 절룩댔다. 병원갈 걸 지금도 아쉽다. 갔으면 지금 이렇게 안 아팠을 지도... 그리고 1차 부도가 났다.

버스비가 없자 누나가 자기 점심값을 줘서 다행히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학원은 예전에 어머니께서 도와준 적이 있는 분이 원장이시라 고2때까지 학원비를 내지 않고 수업을 들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힘들게 살다 최종부도가 났다. 죽으란 법은 없는가? 중3 말이었다. 고등학교 교복 맞출 돈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얻어 입기엔 아직 우리 집이 잘 사는 줄 아는 사람들 그래서 얼마간 이라도 어머니에게 빌려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덕분에 겨우겨우 숨통을 트이기에 소문이 무서워 꼼짝도 못했다. 난 지금도 그게 싫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존심을 위해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했고 내가 그렇게도 싫은 허세를 부려야 했다. 다행이 생긴 것 자체가 부잣집 아들같이 생겨 다행이었다. 그때 내가 존경하는 분이 나타나셨다.

민주화운동하시다 도미후 부시 행정부에서 보좌관생활을 하신 미국통이자 국제경제외교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독보적인 분이셨다. 그분께서 정부에서 내준 공영아파트를 어머니가 살게 배려해주시고 생활비를 대주셨다. 이유는 어머님을 사랑해서... 이 분 덕에 내가 학교생활을 마칠 수 있었으며 어머니의 빚의 부분을 떠맡아 처리해주셨다. 어머니 덕분에 스캔들도 일어났지만 당당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밝혀 나를 감동시켰다. 유종근지사 아는 가? 그 사람이 아저씨보다 미국에서는 한참 아래다. 하지만 김대중라인이기에 지사선거에 당선된 뒤 아저씨를 메인 브레인으로 삼고자 했다. 고심하시던 게 기억난다. 정말 일 잘하시는 분이었다. 유종근 지사가 국내 정치에 뛰어들어 그 진흙탕에 구를 때 전라북도의 모든 행정과 국제 교류 및 외교 그리고 도내 기업의 IMF때 회생까지 도맡아 처리한 실질적인 업무 담당자였다. 하지만 유지사는 약속한 걸 지키지 않았고 아저씨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교수로 재직중 이시다. 유지사는 아저씨가 떠난 뒤 2개월 후 무너졌다. 이 분을 몇 번 씩 뵈면서 정치권 실세들을 봐왔고 그들의 삶을 봤으며 얼마나 추잡한 지 외교가 얼마나 세련된 장사속인지 일반인들이 알아야 할 부분이 있고 또 몰라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알았으며 때로는 교묘히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더 사람들을 위하는 것임을 배웠다. 지금도 어머님은 아저씨를 사랑하신다. 나도 사랑한다. 아저씨도 사랑하신다. 하지만 사랑만으로 결혼하기엔 서로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외적인 부분들이 너무나 크다. 이때 확실히 알았다. 사랑만 가지고 결혼이 되는 것이 아님을... 사랑만 가지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많이 아팠다. 어머님 때문에 8년을 허비하신 게 죄스럽다. 그만큼 어머님은 성공해야만 한다.

중 2때 너무 외로웠다. 그리고 당시 종교에 빠져 각종 교리서적을 구하느라 분주했으며 자아를 깨닫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는 걸 알았고 그러기에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때 예진이를 만났다. 그 애를 좋아하는 것보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모든 이에게 호감을 주며 여우같이 자신의 삶을 바르게 가면서 충분히 즐기는... 충청북도 전체 1위였다. 미술을 하고 싶어하는데 전국대회 입상경력도 많은... 똑똑한 애였다. 당시 내 전교 등수가 452명중 448등이었다. 공부를 시작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와 새벽 3시까지 고 3형들과 함께 학원 자율학습실에서 공부했다. 항상 쓰러지 듯 잠들었다. 42등이 되었다. 선생들이 컨닝한 걸 사실대로 말하라고 다그쳤고 난 기분이 나빴다.

그렇게 내 중3 생활은 끝났다. 짐들이 사라졌다. 내 소중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버렸다. 130평을 가득 채우던 물건들은 18평 공영아파트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값비싼 많은 물건들에 차압이 붙었다. 돈이 무엇인가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돈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유복하게 자라서일까? 난 돈보다 소중한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은 바람은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독서실에 들어갔다. 무척 싼 곳이었다. 베니어 합판으로 싱글침대크기정도의 공간을 막고 거기서 의자를 올리고 잘 수 있게 만들어진 위생상태가 매우 불결한 곳이었다. 한달에 53000원이었다. 아침 밥값을 포함한 금액이었다. 주인 할머니께서 가끔 남은 밥을 저녁에 먹으라고 싸주시기도 했다. 고등학교때는 그렇게 밥을 먹지 못했다. 아침엔 밥 점심은 물 저녁도 물... 매점은 나에게 사치였다. 원래 안좋아한다. 군것질같은 건... 하지만 독서실비와 차비는 문제였다. 자존심에 돈이 한푼도 없을 때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 학교를 갔다. 멀었다. 2시간 40분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했다. 참고서 비도 문제였다. 가끔 어머니를 만나는 누나가 나에게 용돈하라고 준 돈이 있었지만 솔직히 그걸로는 부족했다. 최대한 요령을 피우고자 했다. 돌려막기를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빌리고 또 빌렸다. 그렇게 3년 동안 남들이 내가 망한 줄 모르게 잘 지냈다. 불규칙적으로 누군가에게 받는 돈으로 공납금과 독서실비를 처리했으며 내 삶을 이어갔다.

건강이 안좋았다. 수능시험 전달 입술이 퉁퉁부어 갈라져 피가 나오며 입에는 침보다 피가 더 많았다. 고열을 동반한 두통과 계속되는 치통과 목에서 나오는 피는 날 힘들게 했다. 왜 그런지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시험 전날까지 그랬다. 학교생활 내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어울리기엔 내가 너무 힘들었다. 공부도 집중이 안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잠을 포기했으니까...

돈이 필요했다. 결심을 했다. 돈을 벌기로... 어떻게 해야 학교를 다니면서 정상적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그때 내 눈에 뜨인 것이 컴퓨터였다. 당시 나우누리에 가입해 있었던 난 부도로 집을 옮기면서 컴퓨터를 쓰지 못했다. 남의 집 전화선과 전선을 독서실 벽에 끌어다 독서실에서 인터넷을 했다. 들키기 직전 다시 아저씨에게 신세지는 집으로 컴퓨터를 옮기고 거기서 알게된 통신판매로 불법CD를 용산에서 구운 것을 받아다 내가 재포장해서 팔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CD도 구해서 팔았다. 포르노를 그때 처음 접했다. 하지만 포르노CD는 다루기 싫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과 프로그램만을 다루다 어느 정도 생활비가 마련이 되었고 그걸로 돌려막기 후에 나오는 많은 돈을 막을 수 있었다. 한글 96이 나를 살렸다. 대학등록금을 마련했다. 다행이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던 아버지가 돈을 들고 왔다. 딱 대학 등록금만 가지고... 덕분에 돈을 세이빙했고 그 돈으로 난 부산에서 장사를 본격적으로 했다.  효율을 위해 다이어리를 십분활용했다.

당시의 난 다큐멘터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방송국에 들어가 편집 일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행정학과를 포기하고 부산의 신생 신방과를 들어갔고 내 꿈을 쫓은 선택은 지금 생각하면 실패였다. 지금도 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FTP와 IRC로 돈이 될만한 프로그램을 구하고 시디를 만들 작업을 끝냈다. 한글96과 MS-OFFICE, AUTO CAD, WINDOWS95와 이들에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나에게 준비되었다. 세진컴퓨터랜드에서 컴터수리알바를 했다. 그들에게서 실력있다고 돈을 버는 게 아님을 알았다. 자본과 실력 그리고 치밀한 계획과 운이 조합되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대기업이 돈을 버는 이유를 어렴풋히 알았다.

어머님은 어떻게든 휴게소를 지키고자 다른 곳들을 거의 다 포기했다. 땅도 공장도... 결국 휴게소는 62억의 자산가치를 인정받았지만 12억의 빚에 은행으로 넘어갔다. 파워게임에 밀린 것이다. 중견 O그룹에서 자금압박과 손님 쫓아내기등... 여자 혼자로는 감당할 수 없었는데 어머님은 물러날 때를 몰라 무너지셨다.





대학에 들어가 사랑을 알다



오리엔테이션때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취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해서인 지 처음 마신 소주가 4병이 들어갔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 뒤에 항상 내 가방 속에는 술이 들어 있었다. 돈을 벌려 했는데 부산사람이 아니라는 텃세에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힘들었다. 이게 지역감정이구나... 전라도사람이란 걸 숨기고 서울 사람행세를 했다. CD-R을 구입하고 판매망을 구축했다. 고객명단을 작성하고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후관리와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할인방침으로 일반인들보다 그룹 팀장등 고급인력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비싼 하지만 배려가 되어 있는 CD를 공급함으로써 내가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왔다 하면 일단 사주는 고마운 고객을 300여명을 확보했다. 체계적인 사업을 하고 싶었다. 9월에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방지법이 발효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만 할 준비를 하며 당시 컴퓨터 보급열기에 맞춰 조립장사에 들어갔다. 텃세에 다시 시달렸다.

97년 3월 27일, 미야를 보았다. 당당하고 자신있는 모습에 범생이같은 외모... 좋았다. 167cm, 52kg, 31-25-32의 탄탄한 몸매... 계속 만나고 싶어 같이 학생회에 들어가 일을 했다. 당시 나는 과 부대표였다. 만나며 말을 할수록 공부에 대한 욕심이 느껴졌다. 그게 좋았다. 도와주고 싶었다. 이미 애인이 있었다. 정말 잘해주었는데 고맙지만 아무것도 안해주더라도 이미 사랑하는 사람에게 간 마음은 내게 와주지 않았다. 화가 났고, 가슴의 불을 끄기 위해 차가운 소주를 마셨다. 5월 초 미야의 집앞에서 비를 맞으며 날을 샜다. 어머님께서 누구냐고 물으셨지만 도망갔다. 창피했으니까... 얼마 뒤 미야의 오빠들이 날 불렀다. 부산 지역에서 잘나가는 건달이었다. 작은 오빠는, 큰 오빠는 건축소장이었고... 일하는 곳으로 부르더니 그냥 놔뒀다. 5시간동안... 그리고 같이 밥을 먹고 술을 한 잔 했다.

맘에 든다고 집에 보내주질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 옷까지 들고 그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결국 나중에 그 집에서 하숙생으로 살게 되었다. 가족처럼 살았다. 5월 중순 손을 떨었다. 젓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돈은 많이 벌었다. 8월까지 대략 3000만원을 벌었다. 다단계회사에다 컴퓨터를 조립해서 납품하고 다단계회사의 회원정보를 이용해 CD를 파는 작업은 분명 돈이 되었다. 사무실을 임대하고 프로그램 담당은 나, 애니담당, 포르노담당, 게임담당, 경찰서 모니터링요원과 사장을 두고 전문적으로 돈을 들여 제대로 장사를 했다. 9월이 되기 전에 그만뒀다. 법에 접촉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9월부터 그 집에 들어가 하숙생이 되었다. 가족같이 챙겨주는 게 좋았다. 점점 마음은 깊어가지만 내가 말한 시간이 다가와 싫었다. 처음으로 내 마음을 거절할 때 그렇게 말했다. ‘일년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겁니다. 그리고 그래도 사귀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서로 어긋나기에 포기하렵니다.’ 시간이 다가왔다. 슬펐다. 난 내말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다. 적어도 내가 내뱉은 말은 지키리라 수없이 되뇌이며 살아온 나가 아니던가...

그 집에 들어가기 전 에피소드가 하나있다. 당시 난 산을 무척 즐겨다녔다. 지리산으로... 그냥 사파리하나 걸치고 맨몸에 건빵하나 물병하나면 족했다. 산에 들어가 사파리를 뒤집어 쓰고 낙엽을 긁어모아 잠이 들면 정말 무서웠다. 짐승들의 푸른 눈빛도 무서웠고 나 혼자인게 무서웠다. 낮에는 행복했던 산이 밤이면 날 괴롭혔고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그러면 지리산 온천에 가서 몸을 풀고 다시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오면 혼자인게 싫어 더 사근사근 더 활발하고 잘나보였다. 나를 한계상황으로 몰아가면 아무리 지쳐도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방학 때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게릴라성 호우를 만나 갇혔다. 평소에 물 근처엔 벌레가 많아 안갔는데 그때 호수에 낚시하고 싶어서 장비챙기고 갔다가 호수안의 섬처럼 떠있는 곳에 갇혔다 나무 몇그루 있고 그랬는데... 완전히 갇혔었다. 자다 놀라서 부랴부랴 챙기고 꼭대기로 갔다. 가봐야 얼마나 갔겠는가, 발목을 물에 담그게 되는 상황까지 놓이고 다행이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부르스타병을 놓고 왔다. 생쌀씹으며 라면부셔먹으며 구조대가 올때까지 2일 반을 버텼다. 그때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한계상황에 직면하면 절대자와 직면하게 된다던가? 내가 그랬던 것 같다.

10월부터 소프트웨어 개발하는 회사에 컴퓨터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거기 직원으로 들어가 일을 했다. 컴퓨터를 제대로 배워 돈을 벌고 싶었다. 그리고 현금으로 아는 분과 함께 인터넷 게임방을 했다. 드문 시절이라 경쟁자가 없어 어느 정도 잘되었다. 11월 말 IMF가 터졌다. 빚대신 주식을 받았다. 그때 주식시장 문닫고 암울한 시기였다. 일년간 피땀흘려 번 내 돈이 공중에 떠버렸다. 1년간 총 4200만원을 벌었었다.

일주일에 3시간 자고 일하면서 때로는 8시간도 잤지만 내 몸을 혹사하여 입학당시 74kg이던 내 몸이 59kg까지 빠질 때까지 노력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때는 어렸나? 돈맛을 알고 성취감을 알자 그저 일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터질듯한 내마음은 더욱더 미야가 보고 싶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는 남자친구를 보기 위해 MT간다고 거짓말하고 기차를 타는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카이스트 기숙사까지 데려다 주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적이 몇 번이던가... 예쁜 사랑하고 싶어 그렇게 흘린 눈물이 얼마던가... 22세 생일을 맞아 방을 255송이의 장미와 22가지의 선물로 방안을 가득채우고 신발을 신겨주었다-선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고마워했지, 행복해 하진 않았다. 그날 남자친구는 친구랑 농구한다고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슬펐다.

그런 것이었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것이 종종 있는 법이었다. 어떻게 어쩔 수 없는 것을 피해가야 하는 지 배우게 되었다. IMF와 미야를 통해...


98년 1월 16일, 일주일 전부터 몸이 이상했다. 자꾸 오른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찌릿찌릿하며 통증이 심했다. 다리도 절게 되었고... 그리고 어머니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내가 아팠던 그 부위가 똑같이 사고 나신 어머니... 불안한 마음에 일주일내내 전화를 했건만 통화가 되지 않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우선 부산에서 내가 벌려놓은 일을 정리해야 했기에 20일이 지나서야 내려갔다.

집엔 많은 일이 있었다. 결국 어머니가 다시 세운 기업은 97년 12월 31일자로 부도처리되었고 어머님은 재기에 실패함과 동시에 교통사고로 전지 26주의 부상을 지니게 되셨고 사고 낸 놈은 한번도 찾아오지 않고 그 놈의 형인 형사는 합의해달라며 시간끄는 사이 사건을 조작 그냥 넘어갔다. 조금만 더 빨리 올 것을... 세상을 예쁘고 행복하게만 사려는 누나는... 그저 어머니 병실만을 지킬 뿐 사후처리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과는 막대한 치료비보다 더 큰 연쇄부도였다. 그리고 집은 불탔다. 가게도 불탔다. 원인은 누전이란다. 알 수 없다. 화재보상금도 아버지가 장난쳐놓은 것 때문에 복잡한 민사소송와중에 어디론 가 사라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어머님은 군대를 가라. 말씀하셨다. 아직까지 해라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나는 그 말에 순종했다. 정리를 하기 위해 부산에 간 김에 병원에 갔다. 척추측만증이 심하고 무릎연골이 약해져 재검대상이 될 거 같다고... 치료비가 꽤 많이 든다했다. 돈이 없었다. 숨기고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 가다



잠깐 나의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어릴 적 난 누나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다 국민학교 4학년때 우리 둘은 바뀌었다. 난 완벽히 내성적으로 누나는 외향적으로 예전엔 반대였거든... 누나는 잘났다. 공부 해볼까 하면 전교 50등안에 가뿐하게 들고 음악해볼까 하면 피아노고 플루트고 다 전공시키라고 재능이 보인다는... 거기에 미술적 재능까지 다방면에 무척이나 섬세한 감성을 자랑한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를 끈기있게 하지 못하고 더불어 사는 삶이란 단어를 소중히 하며 예쁜 모습만 보려 애써 외면하며 세상을 산다.

태극을 아는가? 태극은 적과 청이 반반씩 섞여 있다. 항상 좋은 것만 보며 살 수 없듯 때로는 나쁜 것도 봐야 한다. 어른들이 성경에 온유하게 하옵소서란 말을 한다. 온유를 보았는 가? 흙탕물을 온유라 한다. 고기는 맑은 물에 살지 못한다. 그래서 누나를 싫어하게 되었다. 집에 돈이 없어 고생해도 빚을 내가며 과외시켜 미대에 입학시키니 술마시고 놀면서 이일 저일 찝쩍거리며 지금까지도 어떤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재능만 뛰어나 나를 실망시킨다. 어떻게 CPA공부가 쉽다고 하는 지... 누나 학원비 500만원들여 CPA공부했다. 근데 학원 1등이었다. 미대생에 수학이라면 질색하던 사람이... 반년만에 1등이라니... 근데 1차 합격하고 2차 봐야하는데 자기 길이 아니라고 그만 뒀다. 그럼 그 500만원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기회비용을 집에서 가져가 썼지만 항상 끝을 보지 못해 수익을 창출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난 누나가 싫다. 누나가 먼저 그렇게 기회비용을 쓰기에 난 지금껏 집에 요구한 건 처음 컴퓨터를 샀던 돈과 약간의 용돈뿐... 무엇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해하지만 애증이라고 할까? 밉다. 누나에게 이야기하면 허공에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항상 꿈을 이야기하지만 실천을 못한다. 현실은 고통을 수반하고 꿈은 상상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걸 외면하며 산다.

98년 5월 군에 입대했다. 그전까지 잠시동안 컴퓨터강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다 군에 들어간 나는... 논산훈련소에 갔는데 재밌었다. 군대라는 조직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과 업무를 보며 조직이 왜 성취동기를 부여하는 데 고심하며 조직원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 지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인 작업을 소화하여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지 이런 걸 대입시켜 공부했다. 군대에서 쓸데 없이 시간보내면 머하나 준사회다. 경험을 극대화시키자. 관찰학습도 있는 것이다.


이상한 곳으로 끌려갔다. 거기 가자마자 강릉에 무장공비가 다시 침투했다는 소식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수색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복귀 뒤에 신형장비실전훈련에 투입되어 504공작이라는 곳에 갔다. 육체적으로 얼만큼 힘이 들 수 있다는 걸 거기서 알았다. 공작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동안 잠안재우기등 여러 가지 고통과 함께 받은 훈련은 22번의 작전-제대할 때까지였다. 을 통하면서 내게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냉정해야한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숨기고 갔던 나의 신체상태는 좋아지지 않고 한계상황까지 끌어 올린 내 무릎은 기어이 문제를 발생시켜 다시 802정찰로 복귀하게 되었다.

정찰대대에서 전투병으로 있다 작전과에 파견된 나는 거기서 정말 일잘하는 작전과장을 만나 제대로 업무를 배웠다. 진짜 일 잘시켰다.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업무를 처리하며 저 사람같은 사람이 군대에 많았으면 한국군이 더 튼튼해지지 않을 까 하는 사명감과 승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부대가 해체되었다. 해체되기전 서해교전 때문에 침대점에서 실탄배급받고 대기를 하는데 묘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령을 기다리는 긴장감..... 특공연대로 배속되었다. 정찰대대의 임무를 특공연대에서 맡고 특공연대의 임무는 포병으로 이관되었다. 아픈 무릎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치료해주지 않고 워게이머, 작전과, 정보과 보안검열등 써먹을 만한 곳에 다 써먹었다. 거기서 신경질을 부렸다. FM으로 행동함으로써 간부들에게 항명아닌 항명으로 도리어 내가 명령하게 되는 기현상을 연출시켰다. 간부들이 병사보다 군기가 빠져 놀 생각만 하는데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혹한이었다. 작전중 발목이 안으로 120도정도 돌았다. 1000m의 대성산 중턱이었다. 부목을 대고 작전을 그대로 수행시켰다. 그리고 치료를 못 받게 하고 바로 유격훈련으로 들어가 결국 유격행군때 입대 후 처음으로 낙오란 걸 해봤다. 그 뒤로 작전을 나가지 못했다. 오른 무릎과 발목의 상처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사회에 나가 검사해보니 이미 잘못 붙어 어쩔 수 없단다.

병장때 군대에 인터넷이 들어와 교관들을 교육하고 인터넷을 설치하고 전산프로그램을 짜면서 행정업무를 배웠다. 작전과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여러 부서에서 날 끌어다 썼다. 갑자기 휴가 생각이 나는데 난 통신대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한번도 포상을 못 갔다. 놀기 좋아하는 대장을 내가 갈궈서 받은 포상휴가도 못 갔다. 덕분에 포상휴가일수는 한달이 넘는데 한번도 못가게 되었다. 거기서도 책을 읽었다. 인터넷으로 출판회사를 털거나 해서 끊임없이 책을 읽었다.

정기휴가때, 내가 빚 대신에 받았던 주식이 IT업계의 열풍을 타고 엄청나게 뛰었다. 덕분에 내 빚은 상당부분 탕감이 되었다. 제대 후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제대 후의 나



제대 후, 난 결심했던 국토횡단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몸이 너무나 망가져 어떻게 되기 전에 실천에 옮기고 싶었다. 그래서 국토횡단을 했다. 일주일 걸렸다. 처음엔 느긋하게 갔지만 경상도를 들어가면서 느낀 너무나 야박한 인심에... 물도 안주더라..... 최고 스피드로 끝냈다. 일주일간 700km...

그리고 미야도 잊고 내 좋은 누나로 남겼다. 취직을 하기도 어려웠다. 집이 없었다. 내가 군대있는 동안 어머님은 과거 빚대신 받았던 외국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무역회사를 차리셨고 누나가 명목상 사장으로 있으며 사업을 하면서 고기집을 운영하셨다. 누나는 남자친구가 생겨 서울에 올라가 직장다니겠다면서 무척이나 많은 돈을 가져다 썼다. 한심했다. 노력한다면 확실한 것 하나에 집중해야하는데 그걸 못한다. 끈기부족이었다.

무역업을 하고 싶어하는 한 사장을 알았다. 동업을 시작했다. 집을 받았다. 건설업체 사장이었다. 준공허가가 나지 않아 살 수는 있되 재산으로서의 가치는 없는 곳이었다. 어쨌든 난 좋았다. 위험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충분히 위험한 사람이었지만 동업자가 필요했고 그 사람은 어머님을 사모했다. 여자관계는 으외로 쑥맥이라 더 안심이 되었다. 이상한 생각마라. 나이들면 몸보다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보며 사랑하게 된다. 어머님의 삶의 태도, 사업하면서도 고고한 학처럼 살고자 스스럼 없이 돈을 포기하는 태도가 매력적이었나보다. 군계일학이란 말을 아는가? 그렇게 되면 학은 닭에게 쪼여 죽는다. 아님 날아서 저 멀리 도망가던지, 그게 사회에서의 군계일학이다. 군대에서 느낀 것중 하나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이 제일 힘들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힘든 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날 외국공장도 살펴볼 겸 뉴질랜드로 보내겠단다. 어차피 오래 외국생활 한 적은 없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린 것도 있으니 보내면 좋겠다 싶었나 보다. 고민했다. 학비는? 생활비는? 걱정말란다. 사장이 책임지고 해주겠단다. 그래서 떠났다.

이미 국토횡단과 가슴뛰는 사랑하기, 만권의 책읽기를 끝낸 뒤 무엇을 해야할 까 고민하는 내게 하나의 기회였고 난 꿈을 꾸었다.





어 학 연 수



아마 내 생에 가장 비참했던 시기인 듯 하다. 지금까지 난 내가 돈이 필요하면 돈을 벌 수 있었다. 여기선 그게 안되었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상황에 마구잡이로 날 외국에 보내놓구는 아는 분이라고 믿고 따르라고 하신 홈스테이주인은 내 여권과 비행기표를 뺏고 날 내쫓았다. 시세의 6배에 달하는 홈스테이비를 요구하며...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돈은 16불이었다.

어머니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교통사고가 나 누나랑 어머니 둘 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또다른 미야를 만났다. 향수병에 시달리는 나와 다른 정말 평범한 사랑을 할 줄 알며 사람을 믿고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이국적인 외모로 백만장자 아들이 쫓아다녀도 나와 사귀기에 미안해 하면서 내 품에 안기는 날 사랑해주어 고마운 아이였다. 다행이 내가 illegal이 되기 하루 전 돈이 도착하여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다행이었지만 합의비용등으로 돈을 쓴 뒤 내가 말한 한달에 30만원정도의 생활비는 오지 않았다. 영어를 못하는 게 일자리가 없는 시골이란 게 너무 화가 났다. 원미가 내 생활비를 댔다. 말은 안했지만 정말 비참했다. 배가 고파 서로 1불짜리 티백을 사 따뜻한 물에 타서 몇 번 이고 우려먹을 때 내 여자친구를 쫓아다니는 백만장자의 아들은 미야에게 밥을 사주기 위해 클래스 전체를 끌고 호텔에 가 밥을 사먹였다.

몇 달 뒤, 돈이 왔다. 둘이 여행자금을 미리 conform 시키고 한달이나마 서로 행복했다. 그리고 여행을 갔는데 또 한국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덕분에 소중한 추억이 망가졌다. 역시 알면서 외면하는 것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외국 공장과 나를 저울질 하다 외국공장에 모든 돈을 투입하신 것 이였다. 난 단지 30만원정도만 바란 것인데, 어머님의 생각을 지금도 이해못한다. 어머니의 사업은 도박성이 심하다. 사업이 흥하고 망할 수 있지만 계획성있게 해야하나 어머님은 그 부분이 매우 부족하다. 예전처럼 10명에게 1억씩 주고 맡겨 사업시키고 8명정도 도망가고 2명이 10억이상 벌어오면 된다라는 방식이다. 돈이 있을 때도 위험부담이 큰 방법을 아직까지 고수하신다. 그러니 당연히 손해가 날 수 밖에... 외국공장도 그래서 거기 한인들이 불법적으로 도용하고 인수하기 위해 모략을 거듭한 끝에 법률비용으로 매우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어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셨다. 지치신 거 같다. 변해가는 인심이라 말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와 사업 아이템에서 뒤쳐지고 있다. 답답했다. 이러한 사실을 나는 몰랐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섭섭함을 말하고 내 나름대로 독립해 살며 미야와 함께 예쁜 사랑을 가꾸어 가리라 계속 미야에게 희망을 말했으며 우리는 행복했다.

미야를 먼저 한국에 보내고 유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다 어학연수 온 여자애에게 rape를 당했다. 그리고 그 날, 걸려온 원미의 전화를 받지 못해 조급해진 나는 안하던 과속을 했다. 갑자기 highway에 개가 나타났다. 당시 시간은 새벽 1시경, 순간적으로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브레이크를 밟았고 살짝 틀었다. 180km로 살짝 틀면 날라간다. 젠장... 차는 폐차시켰으며, 군대에서 이미 망가졌던 내 몸은 이 사고로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아파서 제대로 걷기 힘들다. 그렇게 내 외국생활은 끝을 맺었다.





돌아온 뒤 일식집을 경영하다



도착한 날, 부도소식을 들었다. 무역회사가 난리가 난 것이다. 이유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끌어들인 사람 중 둘이 이사직함을 달고 있었으며 한명은 교회목사였다. 마약을 밀매해서 인터폴에 걸려 압수수색 및 세무조사가 벌어져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렸으며, 프랜차이징업체도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던 어머님은 특유의 인화력으로 수십 개의 체인점을 경영하다 이들의 꼬임에 빠져 회사를 나와 복잡한 채무관계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일식집을 인테리어 및 경영하며 돌렸던 모든 어음을 인터폴에 걸렸다는 걸 눈치 채고 모두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그 동안 내가 고등학교때부터 같이 서류를 관리하며 있었던 외국공장과 동남아에 뿌려놓은 몇몇 CD, 그리고 빚더미에 쌓인 일식집뿐이었다.

어머님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지치셨다.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별을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떠나게 된다면 난 어떻게 될까? 너무 두려웠다. 분명 말했다. ‘헤어지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라고... 그 애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난 똑똑히 기억한다. 난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한다. 마치 앨범처럼 날짜, 입었던 복장, 분위기, 대화내용까지 너무 선명히 잘 기억해 사람들이 나보고 종종 앨범같다고 했다.

날 다시 외국으로 보내려 하셨다. 또 이런 식으로 보낼 거 같아 싫었다. 그리고 난 일식집을 경영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뛰어들어 한달 이익 3300만원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빚쟁이들에게 들어가는 돈 때문에 자금경색이 너무 심했다. 미야를 돌보거나 희망찬 말을 하기엔 내게 지워진 빚이 너무 많았다. 내 곁에 있다간 나처럼 삶의 지저분한 꼴을 보게 될 거 같았다. 그 애가 원하는 그런 예쁘고 단란한 삶을 살 수 없을 거 같았다. 점점 멀어져 갔다. 다시 술을 찾았다. 술 따위에 기댄 것이 아니라 돈을 만들기 위해 술자리에 들어가 돈을 끌여 들였다. 많은 잡음과 스트레스가 있었다. 믿었던 친척은 자기 수천만원의 카드빚을 가계돈을 유용하여 막고 있었고 일식집 직원은 나태하기 그지 없었고 어머니는 무시당하고 있었다. 거기다 느닷없이 카센터하신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평균을 내어 보건데 어머님은 일년에 평균 4차례정도 사기를 당하신다. 그것도 너무나 어이없는 방식으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도 어머님은 귀가 너무 얇다.

그리고 이젠 어머님을 믿지 못한다. 이제 자식보다 사업이 더 소중해 자식을 외면하고 사업에 모든 걸 거시는 모습에 난 어머님이랑 부르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3개월 남짓 가게를 정상화로 돌려놓았다. 수많은 편법과 노력이 있었다. 날 재수학원으로 보내셨다. 반대했다. 하지만 정말 공부해서 의대가서 미야랑 같이 있고 싶었다. 꿈을 꾸었다.

5월 7일 헤어졌다. 그날 미야를 바려다 주고, 용마산 역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졌었다. 그리고 한달정도 지나 헤어진 걸 실감했을 때 울다 울다 피눈물이 났다. 울다 성대가 찟어지면 피난다. 그 피가 눈까지 올라왔다. 축농증때문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이젠 무서워서 울지 않는다. 사람을 아프게 하면 그만큼 그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말이 날 두렵게 했다. 재수학원을 나와 간 가게는 적자를 기록하고 건물주는 부도내고 도망가 용역회사에서 온갖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정리가 되던 빚은 다시 산더미처럼 쌓였다. 내가 떠난 달을 기준으로 지속적으로 -700만원선을 유지했던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들었다. 집을 저당잡히고 그 돈을 끌어들여 주식하고 어느 정도의 현금을 확보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옥상으로 끌려가 유리조각으로 목을 그이면서 때로는 전선을 끊고 도망가 가게가 정전이 되고 수도펌프를 망가뜨려 하수도 구정물이 넘쳐 오를 때 손님들에게 행패부릴 때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위험하고 난감해 하는 일에 내가 앞장서서 했고 밀린 수천만원의 미수금을 직접 사장들을 만나 사죄하고 배려를 구했다. 그렇게 9월까지 흘러왔다. 가게가 정상화되지는 못했지만 건물을 인수한 사람에게 약간의 보상금을 받을 때까지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서웠다. D여대에서 고용한 용역회사의 등쌀에 모든 곳이 많아야 천만원가량의 보상금을 받고 나갔던 것이다. 청담동에 무슨 보증금이 천만원짜리가 어디있는 가? 법적으로 요령껏 한 것이다. 공시지가 68억인 빌딩을 24억에 인수하고도 보상금을 2억만 책정해놓은 것이다.

몸은 더욱더 악화되어 걷기 힘들어졌다. 병원을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다. 매일 매일 수백만원을 만지지만 나를 위해 쓸 겨를이 없었다. 미야가 석이 형을 사귀는 걸 알았다. 예상했던 대로다. 접근하는 걸 알고 떠났으니... 나의 예상은 왜 안좋은 것만 이렇게 잘 맞을까? 마음 아프다. 다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건만... 하지만 헤어진 것은 미야를 위해 너무나 잘한 일이었다. 내게는 끝없는 아픔이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12월, 외할머님께서 폐암으로 쓰러지셨다. 병석에서 미야를 보고 싶다 하셨다. 참한 아이같다며 기억이 난다 하셔, 미야에게 만나달라 부탁했다. 차안에서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말했다가 나만 죽으면 영화되겠다고 우리 무슨 영화찍냐는 말을 들었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정말 죽고 싶었다. 그 아이 입에서 그런 말까지 나오게 할 정도로 내가 힘들게 했다는 게 못내 외면하고 싶었다. 같은 시기에 미야의 할아버님도 폐암으로 투병중 사망하셨다. 외할머님은 다 나으셨다. 연세가 90세이신데 아직도 정정하시다. 감사할 따름이다.

도저히 가게에서만으로는 돈이 모자랐다. 다시 빚을 내어 주식을 했다. 삼성증권에 아는 애널리스트와 함께 작전을 들어가고 나름대로 투기를 했다. 월 수익률 248%를 기록하며 현금을 확보했고 다시 버티기에 들어가 12월 28일 가게를 철수했다.

도저히 안될 거 같아서 이런 일도 했다. 어머님께 돈을 빌려간 사람들이 돈을 내놓지 않았는데 빌려준 조폭이 빚 독촉을 어머님께 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만약 감옥에 가신다면 그 사람의 사업의 30%정도가 마비가 된다. 그래서 난 어머님이 구속되도록 방치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일이 터진 걸 알자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했고 어머님은 다시 나오셨다. 그 와중에 뿌린 엄청난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파트 한 동의 전매권을 넘겼다. 조폭은 건드리는 게 아니란 걸 다시 느꼈다. 얼마 뒤 건축회사 사장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 이번엔 내가 일전에 받은 43평 빌라를 저당잡히고 카드를 한도까지 다 긁었다. 그 사람을 빼내는 데 고생했다. 법은 가진 자의 편이다. 로비와 인맥이 처벌을 결정한다.

원미와 헤어진 뒤 난 3일에 한번 꼴로 꿈을 꾼다. 미야가 꿈에서 내게 헤어질 당시 했던 말을 반복한다. 코밑에서 목울대있는 곳까지만 나오면서 마지막에 ‘어쩔 수 없잖아.’이렇게 말하면 눈을 뜬다. 그러면 잠을 깬다. 그리곤 그 다음 날까지 잠을 못자고 피곤해서 잔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꾼다. 헤어짐을 인정한 뒤 계속되는 꿈이다. 안 꾼적이 팔벼게 해주고 잠들 때랑 술에 쩔어 잠들 때... 도망이다.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고 많은 돈을 벌어 남들이 우러러 보는 성공을 한다고 해서 과연 내가 행복할 것인가? 단지 과거에 힘들었던 일을 되풀이하지 않고 남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일뿐... 하지만 너무 드러나면 타킷이 된다. 난 과연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쉬고 싶다. 쉬어서는 안 될 나이지만 그래도 쉬련다. 내 쓰임은 일단 여기까지이다. 이 이상은 내 엔진이 필요하다. 내 심장이 그리고 앞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일식집을 정리하고 쉬는 나



과거 어머님이 투자하셨던 금액에 대한 CD와 소송에 승소한 뒤 나온 지급금이 다 CD로 나왔다. CD를 바꾸기 전 여기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이 몇몇은 생명을 위협하고 몇몇은 국민은행 금고 안에 있는  CD를 빼내어 도망가려 하는 등 유동 자산은 쥐뿔도 없으면서 CD만 가지고 있는 기형적 상황이 벌어졌다.

일단 가게를 정리하며 받은 현금을 나는 확보하고자 했지만 어머님과 사장은 여기저기 쓰게 했고 결국 다시 보유 현금이 부족해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어머님은 너무 조급해지셔서 이젠 투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셨다.

만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높으신 분들이라 어머님은 허세가 심해졌고 원래 심했다. 이미 예전에 부도난 사람이 국무총리부터 조폭까지 만나려니 그 허세를 위해 많은 돈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돈? 있긴 있다 CD로... 하지만 현금이 필요하지 CD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꾸려면 어머님과 함께 어떤 사람이 가야하고 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분배를 위한 협상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외국 공장을 일식집을 경영하며 변호사와 상담을 하며 소송을 끌고 가던 나는 어머니가 벌리는 중국사업건과 중동 사업건까지 정신이 없었다. 거기다 사장도 나에게 중국 석재무역건을 맡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작년의 이야기다. 03년이 되면서 내가 분명히 말했다. 난 쉴거라고... 하지만 내 바람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병원을 갔다. 왜 이제 왔냐고 한다. 무릎 연골이 다 달아 없어졌고 신경이 몇 개 끊어져 있었으며 척추는 상박부분은 뼈가 틀어져 있고 허리부분은 디스크마모가 심했다. 수술은 안된다고 한다. 나이가 안된단다. 일주일정도 다니고도 아프자 어머님께서는 왜 아직도 안나았냐고 화를 내신다. 답답하다.

아는 형님과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가끔 납치를 당한다. 사장이 맡긴 중국 석재무역건도 그렇게 어머님의 여러 가지 채무관계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홈페이지 사업이다. Project Manager를 맡아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현실을 이상에 근접케 하는 협의와 의견도출에 대해서 상당한 재능을 발견했다. 예전 삼성 메인 펀드매니져 아저씨의 말씀이 기억나서 기분 좋았다. 넌 어린 애 답지 않게 항상 최악의 경우를 설정해서 그것에 기반해서 기획을 하기 때문에 돈을 버는 거 같다고... 큰돈이던 작은 돈이던 간에...





여 자 들...



난 처음 여자와 성관계를 맺을 뻔 한 적은 중2때가 처음이다. 이미 책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호기심에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싫었다. 난 내가 죽을 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 첫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 뒤 대학에 들어가 미야를 사랑하며 있었던 일들을 보고 많은 여자들이 부러워 하며 난 내가 혹시 매력이 없는 것인가 궁금해하며 꼬셔봤다. 너무 쉽게 넘어왔다. 싫었다. 세련되게 여자와 헤어지는 법을 배웠다. 상처주면 그 상처가 배가 되어 돌아온 다는 말을 믿기에 난 조심스러웠다. 30여명에 가까운 여자들을 만났지만 마음을 주지 못하고 또 사귀지 못했던 건 평생을 두고 사랑할 여자를 기다린 게 아닌가 싶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 유학원 아르바이트하다 만둣국을 해주겠다는 말에 놀러 갔다가 rape를 당했다. 국민학교때 스키장에서 한맺힌 이후로 만두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는 누나를 만나 CD를 전해주려다 다시 그 누나에게 마져 rape를 당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남아있던 3주 정도의 시간동안 끊임없는 괴롭힘에 아는 형 집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며칠 있다 귀국했다. 거기서 거의 모든 skill을 배웠다.

20대의 남자의 성욕은 누구나가 마찬가지이다. 단지 얼마나 잘 자제하며 세련되게 처리하는 가가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가 원한다면 난 혼전순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여자애들이 힘들다고 술을 마시자고 해서 마시고 집에서 같이 자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나를 자제한다. 그리고 손쉬운 성관계로 소중한 내 주변사람을 잃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난 개인적으로 섹스보다 팔벼게해주고 내 곁에 잠들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의 삶을 함께 세발걷기처럼 걷는 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닌가? 섹스는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때때로 남자든 여자든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이라 착각할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결혼까지 가기 어려운 것은 혹은 평생을 가지 못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그것을 기반으로 가꾸어나가는 삶의 모습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hit:5633|200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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