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제 대학의 2학년생을 영어로 소포모어(sophomore)라고 한다. 1학년때 잘 하던 사람도 2학년 정도 되면 1학년때 하던 식으로 하다가 실패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고 한다. 이는 비단 대학생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재미있던 게임이 괜히 후속작이라고 2탄을 냈다가 재미없어진다던지, 1집때 대박을 터트렸던 가수가 2집때 실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던지 하는 것 말이다. 지난달에 이어 두번째를 맞는 이 코너 또한 소포모어 징크스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일단은 지난달에 재미가 있었어야 그런게 걸리던 말던 할텐데 그런 면에서 필자의 글은 그런 징크스로부터 안전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심정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마냥 두근두근하다. 설레이는 동시에 두렵다. 그것은 아마도 경험이 없어서 처음 맞닥트리는 탓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즉 무지(無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달에 살펴볼 주제는 바로 이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두가지 감정, 우스움과 무서움이다.
(왼쪽: 창틀에 앉아 푸념하는하레) 그의 모든 불만은 구우로부터 시작된다.
(오른쪽: 거울보는 하레) 하루 한번씩은 거울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어떨까.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는 필자가 후르츠 바스켓 다음으로 보았던 애니메이션이다. 돌이켜보면 그 정도의 대박은 1년에 하나 터지기도 힘든데 두개나 터졌을 정도니, 2001년은 필자같은 애니메이션 애호가에게 얼마나 축복받은 축복스러운 축복의 해였을까..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서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가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후르츠 바스켓과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필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타임머신의 몸을 실을 용의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언리뉴어블(unrenewable)한 과거의 추억으로 나의 일기장 속에 기록되었을 뿐. 2년 전이라면 그때 입대했다면 지금쯤이면 병장 생활을 하고 있겠지,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때는 꽤나 많았던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 팬클럽 팬커뮤니티들이 이제는 저조한 활동에 하나 둘씩 문을 닫고 있는 형편. 이제 OVA까지 나와서 완전히 완결된지가 두달이 지났다. 더 이상의 후속작도 기대할 수 없는 지금, 이제와서야 쓰는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에 대한 때늦은 본 리뷰글은 최후의 기념비가 될 수 있으려나, 이 글을 마지막으로 모든 소모적인 논쟁이 끝내기를 바라며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논쟁이 어디 있었다구..)
(왼쪽: 홀로 서 있는 하레) 구우라는 거대한 세상에 갇혀버린 하레의 모습.
(오른쪽: 도망치는 하레) 하레와 구우와의 첫 만남. 저 뒤에 거대한 검은색 괴물이 ‘구우’다.
먼저 필자는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의 장르가 코미디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사실 “이라크전 반대”라던가 하는 무언가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긴 하지만 일단은 반대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는 공포물이라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포물의 장치를 차용한 코미디다. 즉 우리가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의 코미디를 신선하게 느끼는 이유는 바로 공포물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라는 작품명이 너무 긴 탓에, 앞으로는 제목의 앞자를 따서 ‘정.언.하.구.’로 줄여서 칭한다.) ‘정언하구’라... 무슨 중국판 이름도 아니고 좀 괴상하다. (그렇다면 ‘하레와 구우’로 칭한다.) 하레와 구우, 좋다. 하레와 구우가 왜 공포물이냐 이유를 든다면 가장 먼저 ‘구우’라는 캐릭터를 들 수 있다.
(구우와 레이) 마치 벤치마킹을 한듯 닮은 모습의 레이와 구우.
구우를 보면 놀랄만큼 에반게리온의 레이와 닮았다. 단발머리에 옅은 색 염색에 붉은색 눈동자까지. 여기에 하늘색 염색만 하면 정말 레이의
SD라고 해도 될 만큼 외모가 닮았다. 가장 닮은 점은 바로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에, 전
시리즈를 통틀어 웃는 얼굴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무슨 생각 하는지는 둘째 치고 그 정체 또한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구우는 레이와 달리
시리즈가 완결될 때에도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구우는 레이를 뛰어넘는 신비로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부터
공포가 시작된다.
(왼쪽: 치요아빠 눈의 구우) 태양같은 구우님의 존재는 거스를 수 없어라.
(오른쪽: 구우 변신) 전 시리즈 통틀어 단 한번뿐인 구우사마의 변신 씬.
모든 공포는 무지(無知)로부터 출발한다. 예전에 필자는 TV에서 로스웰 외계인 해부하는걸 보여준 후로 1주일간을 불면에 시달렸다. 자려고 방에 불을 끄면 방안에 그 커다란 검은 눈동자의 외계인이 보이는 듯 했고,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 외계인이 보이는 듯 했다. 눈을 감아도 그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실제로 외계인이 보인 건 아니지만 아직 안 보였다는 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해부한 내 몸 내놔”라며 내 팔뚝을 뚝 끊어갈지 모르니까. 머리를 감을때도 눈을 감을수가 없었다. 감다가도 자꾸 뒤를 돌아봤다. 아니 외계인이 추락사 했으면 고이 묻어주고 명복을 빌어줘야지 왜 또 괜히 해부를 해서 난리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내가 외계인을 무서워했던 이유를 들라면 딱 하나뿐이었다. 모르니까.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까. 만약 내가 외계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무서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외계인에 대해 잘 알아보기 위해 아담스키의 책을 보고 라엘리안 무브먼트를 알아보고 패닉의 UFO를 듣고 했지만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것 말고 좀 더 보편적인 예를 든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들 수 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 또한 죽은 다음 어떻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계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다. 외계인이야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서 어떻게 조사하고 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죽은 다음의 일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인간의 상상력의 근원이라는 설도 있다. 어쨋든 모든 공포는 무지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무지가 공포스러운 것은 아니다. 때론 무지는 웃음의 원천이 된다. 우리는 잘 모른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멍청하다, 띨띨하다, 영구같다, 맹구같다, MJ같다... 즉 개그와 공포는 무지라는 원천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그와 공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에게 심각한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롤러코스터를 무서워한다면 그것은 놀이기구의 안전장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롤러코스터가 안전하다고 확신해야만 재미있게 탈 수 있다. 필자도 롤러코스터를 타기까지 5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처음 어린이대공원에서 겨우 한바퀸가 두바퀸가 돌다가 끝나는 청룡열차를 탔을때만 해도 나는 그게 너무나 무서웠고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친구들과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를 놀러갔을 때에도 나는 롤러코스터 앞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타지 못했던 것이 여러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안전불감증에 걸린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사고가 났다는 뉴스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안전하다는 것을 믿은 후로는 아주 재미있게 타고 있다. 즉 나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던 롤러코스터가 개과천선했던 것이다. 바로 이 심각하고 안 심각하고의 줄타기를 하는 캐릭터가 바로 ‘구우’다. 구우의 말 한마디로 하레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가, 그것이 일시에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풀어졌다 하는 것을 반복한다. ‘하레와 구우’의 재미도 바로 여기서 온다. 진지하게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몰고 가다가 일시에 해소해버리는 기법. 그래서 결론은 코미디지만, 그곳에 이르는 과정은 공포물의 장치를 사용한다. 바로 이것이 개그와 공포의 접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왼쪽: 모두들 무서워하는 그림을 그리는 구우) 구우의 그림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오른쪽: 머리가 길어진 구우) 전 시리즈 통틀어 단 한번 장발이 되는 구우의 모습.
(왼쪽: 포쿠테 아빠 연기하는 구우) 구우는 하레의 절친한 친구다.
(오른쪽: 기분 나빠하는 하레와 무표정한 구우) 하레는 구우의 절친한 꼬봉이다.
본래 장르라는 것이 그렇지만 모든 장르는 통합될 수 있다. 단지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하기가 힘드니까 한번에 하나씩 하려고 나눠놓은 것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이 발전하고 기법이 늘어나고 하면서 점점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동시에 하기가 쉬워지는 세상이 오고 있다. 그래서 공포랑 개그랑도 섞고, 거기에 풍자같은 가벼운 비판의 목소리도 섞고 하는 것이다. 특히 아방가르드로 대표되는 현대미술을 봐도 이런 경향은 뚜렷이 나타난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시카고’를 봐도 그렇다. 연극과 콘서트가 만나 뮤지컬이 되고, 뮤지컬과 영화가 만나 뮤지컬 영화가 된 것이다. 즉 우리가 시카고를 재미있게 보는 바탕에는 오랜시간 다져진 연극이라는 기반, 콘서트라는 기반, 뮤지컬이라는 기반, 영화라는 기반이 짬뽕에 짬뽕에 짬뽕에 짬뽕, 즉 다중짬뽕된 것이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렇게나 섞으면 개밥이 되거나 잘해야 섞어찌개가 되겠지만, 잘만 섞으면 짬뽕도 되고 퓨전요리도 될 수 있다. 위험하긴 하지만 가능하다면 극한의 범위까지 확장시키는 것이 최근의 경향, 그것을 따라가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미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 많이 밝혀졌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말했던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다.
write 2003 0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