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극장가에는 2편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엑스맨 2, 매트릭스 2, 미녀삼총사 2, 나쁜녀석들 2, T3 같은 쟁쟁한 영화들의 속편이 기다리고 있다. 광고전 또한 치열해서 “2라 2배 재밌다!” “액션씬도 두배! 특수효과도 두배! 재미도 두배!” 이런 유행을 따라 본 코너도 이번 달에는 (굵은 글씨로)두배다. 바로 ‘프린세스 츄츄’와 ‘키디 그레이드’의 더블헤더 리뷰! 그래서 두배로 재밌다!!! (과연..)
발레도 하고 변신도 하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프린세스 츄츄’
요즘 시대에 ‘프린세스 츄츄’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이들에게 (헛된)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싸구려 변신물”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제목이다. 하지만 이 츄츄(tutu)라는 것, 좀 더 정확히 발음하자면 튀튀(tutu)라는 것이 “발레리나용 짧은 스커트”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발레와 메르헨(전래동화)을 소재로 삼아 끝도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이 애니메이션은, 겉으로는 ‘키즈 스테이션’이라는 아동용 방송국에서 방송되는 탓에 이름부터가 ‘프린세스 츄츄’인데다 전래동화를 차용했다던가 하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조금만 들춰보면 그것도 아니다. 후훗 그 안에 아슬아슬한 감각으로 박아넣은 그렇고 그런 코드들이 메르헨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사람을 빨아들이는 그 마력은 “한번 열면 멈출 수 없어~”. 이중에서도 특히 ‘화키아’라는 캐릭터가 최고인데 슬레이어즈의 제르가디스와 비교가 될 정도로..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다음 애니메이션을 소개하자.
쭉쭉빵빵에 유아체형 콤비. 섹시냐 로리냐 그것은 당신의 선택.
프린세스 츄츄와 달리 키디 그레이드는 제목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도 신인이라고 하고. 캐릭터 디자인은 나데시코에서 본 것 같긴 한데. 그 보라색 머리한 여자애가 왠지 귀여워서 일단 보기는 시작했지만, 내용도 그럭저럭이고, SF라고 해도 메카도 안 나오는 것이 초능력으로 싸우질 않나. 하여간 처음 볼때는 실망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빠져들어서, 완결편을 보고 나서는 모니터를 부여잡고 “이게 뭐야아아아~~” 라고 울부짖었을 정도로 끝까지 실망을 금치 못했던... 그게 아니라 사람이 기대를 하면 좀 부응해주고 그래야지 그렇게 철저하게 배신때린 애니는 처음이라. 반전도 반전 나름이지 그렇게 뒤통수를 때리면 어쩌자는 건지.. 처음에 보기 시작한 것도 그 통통하게 생긴 보라색 머리 여자애 때문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하면 그게 아니잖아~~ 이게 뭔소린지는 조금 있다가 설명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른쪽이 에크렐, 왼쪽이... 잊어라. 그녀는 이미 보라색 머리의 여자애가 아니다.
언제나 다음 내용이 궁금해진다. 책을 보던 드라마를 보던 결국 계속 보게 되는 이유는 다음 내용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걔는 죽는거야?” “글쎄다.” 도대체 죽을까 안 죽을까. 그거야 “죽는대.” 아니면 “안죽는대.” 라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내용이지만, 그걸 알려고 몇십쪽 몇백쪽의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읽는 이유는 오직 하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중학교때 그 어렵다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고작 주인공 이름 찾으려고 수십쪽을 읽었던 기억도 있고 (그래서 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중간중간에 야한게 나오길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끝까지.. 아니 이게 아니라;; 어쨌든 그래서 책을 볼 때 제일 열 받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으.. 얘기하자면 길어.” 라면서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이 얘기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자.”고 해놓고서는 책 끝날 때까지 설명 안 해줄 때다. 궁금해서 읽어줬더니 궁금증을 풀어주기는 커녕 더 궁금하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특히 에반게리온이 제일 심했다) 근데 볼때는 열받지만 사실 이런 답답한 재미도 보다보면 쏠쏠하다. 그래서 추리소설이란게 있기도 하고.
이렇게 꿈쩍도 안 하는 메카는 라젠카 이후 처음이다.
이번에 키디 그레이드를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바로 날카로운 색감이었다. 사실 애니메이션에 디지털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초기에는 퀄리티가 말도 못하게 떨어졌는데 특히 제일 튀었던 부분이 색감이었다. 그전까지는 색상별로 정리된 물감을 쓰다가 갑자기 RGB 삼원색으로 색깔을 섞으려니 헷갈렸을 만도 하지. 그래서 “디지털이라고 해도 역시 아날로그의 부드러운 감각은 못 따라간다니까” 하는 말도 나왔지만, 요즘에는 그런 말도 통하지가 않는 것이 디지털로도 얼마든지 부드럽거나 칙칙한 것은 물론 디지털 특유의 차갑고 날카로운 색감까지 잘만 만들어내는 시대가 오고 말았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편해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줄어드는 것은 셀이나 종이를 쓰지 않는 원가절감의 측면일뿐 아날로그나 디지털이나 결국에는 사람이 손으로 그리는 것이고 마지막에는 사람의 노가다가 필요하게 되는 것은 똑같다. 2D 시절에 있던 도트 노가다가 3D로 바뀌면서 벡터 노가다로 바뀐 정도랄까. 이 얘기가 왜 나왔냐 하면 키디 그레이드에 나오는 에크렐이나 류미엘이나 하는 캐릭터가 과거의 평면적(2D) 캐릭터가 아니라 입체적(3D) 캐릭터라서 그렇다. 예를 들자면 스트리트 파이터에서 버철 파이터로 바뀐 정도랄까. (뭐? 그 입체적이 그 입체가 아니라고? 헉...;;;) 어쨌던간에 프린세스 츄츄의 화키아도 그렇고 내용이 전개되감에 따라 쉬지않고 계속 변하는 입체적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데.. (제르가디스 얘기 언제 나오냐고? 금방 나와요 금방)
왼쪽이 히로인 뮤토, 오른쪽이 주인공 화키아.
자,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시간으로 돌아가서 물어보자.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구성이다. 구성의 3요소는 있어도 주제의 3요소나 문체의 3요소는 안배우잖아. 그만큼 구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물, 캐릭터다. 예를 들어서 캐릭터산업은 있어도 시츄에이션 산업이나 배경산업은 없다. 각종 만화 페스티벌에서 팬이라는 사람들이 죽어라 그려대는 것도 다름아닌 캐릭터다. 애니메이션 잡지를 봐도 ‘인기 캐릭터 순위 TOP10’은 있어도 ‘인기 설정순위 TOP10’이라던가 ‘인기 배경순위 TOP10’ 같은 것은 없다. 그거야 당연하다. 캐릭터가 제일 인상이 깊으니까. 마치 노래를 들을 때 누가 작곡을 했고 누가 연주를 했느냐 하는 문제보다 누가 노래를 불렀느냐 하는 보컬만 기억에 남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활의 리더가 기타리스트 김태원씨라고 해도 보컬의 이승철씨만 기억에 남고, 자우림의 리더가 기타리스트 이선규씨라고 해도 ‘자우림=김윤아’로 기억에 남는 것과 같은 얘기다. 사람도 사람인만큼 사람을 단위로 작품을 기억하는 것이 쉬운 탓이다. 그런 만큼 특히나 상업적인 측면에서 캐릭터의 중요성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최소한 캐릭터산업의 측면에서라도, 또한 최근의 하이브리드(퓨전, 쉽게 말해 짬뽕)로 흐르는 경향 속에서 작품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일관된 캐릭터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요즘 작품들을 보면 작품 맨 앞에 나와 있는 것이 캐릭터다. 작품을 소개할 때도 캐릭터부터 소개하고, 캐릭터가 어떤지 분석하고, 캐릭터 상품을 소개한다. 그러다보니 작가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캐릭터가 독자에게 먹힐 것인가 하는 골치아픈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부터 캐릭터를 담보로 하는 작가와 독자간의 끝없는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에 신보(La Bella Mafia)를 발매한 Lil' Kim도 류미엘의 머리를 따라했을 정도로 보라색 머리한 여자애의 인기는 대단하다.
우리는 작가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뭔가 작가라고 하면 왠지 대단한 사람 같아 보인다. 사실 게임잡지도 기자에 대해 환상이 있어야 더 잘 읽힌다는 건 다들 경험해보셨으리라 생각한다. 본 필자의 담당기자인 kaz씨도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진짜 킹카다. 게임잡지 기자라고 하면 보통 후줄근한 오타쿠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전혀 아니다.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어찌나 잘생겼던지 내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였다. KBS라 연예인이 온 줄 알았다. 매스컴을 탄다면 분명히 정태룡씨보다 외모만으로도 인기를 추월할 정도라고 장담한다. 자 이제 이런 kaz씨를 상상하며 그분의 기사를 보자. 아니 이럴수가. 한줄 한 줄이 주옥같다. 게임잡지계에 길이 남을 명문으로 보인다. 놀랍지 않은가. 여러분은 지금 허황된 환상이 독자에게 미치는 무서운 영향을 체험하셨다. 이처럼 환상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이런 환상의 힘을 이용한 것이 바로 신비주의 캐릭터이다.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무너지는 신비주의는 과거 TTL의 임은경 편에서 사용된 적이 있었고 서태지도 자기 입으로 어느 정도는 신비주의를 이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신비주의에는 커다란 약점이 있는데, 독자에게 간파당했을 경우 역효과가 날 수 있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의 레이 같은 경우도 극장판에서 정체가 밝혀진 후로 인기가 급격히 하락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런 환상이 깨지지 않게 하는 것. 작가와 독자간의 간파하느냐 간파당하느냐 하는 싸움은 정말로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kaz씨의 일러스트) 환상의 힘은 이처럼 대단하다. 일러스트: sochaeck
특히나 분량이 정해진 연재물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번 회에 대한 만족보다 다음 회에 대한 기대가 더 큰 재미를 주기도 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를 봐도 격주에 한번씩 다음에 어떻게 될까 기대하면서 보면 재밌지만, 오히려 한번에 몰아보면 재미가 폭삭 줄어든다.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는 재미. 이런 면에서 몬스터의 재미의 반은 독자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연재물은 한정된 지면 안에서 궁금증을 풀어줌과 동시에 궁금증을 증폭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수법이 뻔해지고 독자에게 간파당할 소지가 생긴다. 개그콘서트에서도 그렇지만 수법이 간파당하는 순간 그 개그는 이미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수법을 변화시키는 것이야 쉽지만 그것이 일정한 테두리 내에서 스타일을 유지한 채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는 스타일리스트라는 호칭을 수여한다. 그런 꾸준한 변화를 유도하기 쉬운 방법이 바로 캐릭터의 성장이다.
에크렐도 화나면 무섭다. “이랬던 그녀가.. 이렇게 바꼈습니다”
어떤 작품을 보면 캐릭터들이 다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겨우 머리스타일로 사람을 구분한다던가, 옷차림으로 알아본다던가 할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시리즈 중간에 머리 스타일을 바꾼다 하는건 정말로 도박이다.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머리를 빡빡 밀었을때도 한동안 적응이 안 榮? 아직도 난 깎기 전의 리젠트(regent) 머리가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리즈가 바뀌면서 이메첸(이미지 체인지)하는 건 일반적이지만, 시리즈 도중의 이메첸은 정말로 적응하기 힘들다. 특히나 이온 플럭스같이 진짜는 죽고 가짜만 살아남아 가짜가 주인공이 되어버린다던가 하는 설정이 나오면 감당이 안 될 정도다. 키디 그레이드에서도, 물론 이온 플럭스처럼 주인공이 매회 죽는다던가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오리지날 대 이미테이션의 대결에서 이미테이션이 오리지날이 되어버린다던가 클론이 개체로서 독립한다던가 하는 설정은 꽤나 충격이었고 흔히 말하는 머리속에 짜릿한 느낌이 지나갈 정도로 대단했다. 프린세스 츄츄에서도 화키아를 보면 처음에는 반듯하게 생긴 남자애나 따먹고 다니는 재수없는 게이 킬러로 보이지만, 알고보니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환장하게 불쌍한 캐릭터였대나 뭐래나.. 이렇게 알고보니에 알고보니를 반복하는 ‘알고보니즘’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프린세스 츄츄와 키디 그레이드의 접점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길어진 글을 마치려.... 네? 화키아랑 제르가디스랑 하는건 어쩌냐구요? 보라색 머리 여자애가 그렇고 그런건 뭐냐구요? 그건 말야, 메소..쿨럭쿨럭(지면관계상 생략)
프린세스 츄츄 사랑방 ♡ 츄츄 동맹 www.pitt.edu/~ycm2/tutu
릴킴 홈페이지 www.lilkim.com
write 2003 05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