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출판
08/03/05 00:08(년/월/일 시:분)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정말 잘 쓴다. 그래서 뛰어난 문장가로서 배울 점은 있지만, 뛰어난 소설가로서 배울 점이 있다기에는, 글쎄. 내가 보기에 그는 글을 쓰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거지, 그 반대 같지는 않다.
내가 상상하기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글을 쓸 것 같다.
1. 어떤 문장을 쓴다.
2. 그 문장을 보고 생각한다.
(반복)
보통의 소설이 1. 어떤 생각을 한다. 2. 그 생각에 대해 문장을 쓴다. 순서인 점을 감안하면, 하루키의 글쓰기 순서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소설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열심히 취재를 하고, 캐릭터를 구성하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료 수집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스토리의 얼개를 짜고 생각을 충분히 정리한 다음에, 그제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보통의 소설가에게 문장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머리속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제나 문장이 먼저이기 때문에, 주제도, 인물도, 구성도, 배경도 전부 뒷전인 것 같다.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 생각을 만들어낸다. 문장을 쓰기 위해서 인물이나 배경을 그때그때 만들어내고, 문장을 쓰다보니 어떻게 스토리가 나오는 것 뿐이다. 모든 것은 기가 막힌 문장 하나하나을 위해서 존재한다.
덕분에 일단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 그 문장의 유려한 흐름에 휘말려 계속 읽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때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모여서 어떤 큰 흐름을 가지거나, 보통의 소설이 그러는 것처럼 마지막에 콰과과광! 쨔잔! 하면서 끝나는 게 없다.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는 문장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아무리 기존의 방법으로 분석하고 비평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안에는 작가도 없고 작품도 없다. 빈 통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예쁜 빈 통.
그런 의미에서, 도저히 길게 쓸 수 없을 것 같은 단촐한 구성으로 무려 4권이나 되는 대하소설을 썼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 배경, 사건 등은 중편소설을 지탱하기도 위태로울 정도로 적다. 특별히 취재를 하지 않았으니 쓸 거리가 얼마 없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적은 글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기를 쓰고 최대한 죽죽 길게 문장을 뽑아낸 것이 바로 이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2년간 썼다는 이 태엽감는 새다.
정말 쓰기 힘들었을 것 같다. 얼마 없는 인물도 중간에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얼마 없는 사건도 사라져버린다. 얼마 없는 주위 배경마저 없어져버린다. 그런데도, 도저히 아무런 쓸 거리가 없을 것 같은 최악의 상황을 자초해놓고, 그 안에서도 문장은 끝까지 계속된다. 순전히 의식의 흐름 만으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전형적인 갈등구조도 없고, 긴장이나 해소도 없이, 어쨌든 문장은 계속된다. 정말 잘도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게 대단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특별히 얻는 건 없다. 대단한 결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안 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 읽어도 "와~ 대단하다!" 이런 감흥도 없다.
게다가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별로 배울 점이 없다. 그는 그냥 어쨌든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어떻게든 쓰는 타입이라서, 그걸 똑같이 되풀이한다고 해서 상실의 시대 같은 소설이 다시 나오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방법은 포스트모던해서 되풀이할 수 없다. 인간적으로 수고했다는 생각도 들고, 존경스럽긴 하지만 내가 배울 점은 없다.
하여간 읽으면 시간은 잘 간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나는 궁극적으로 예술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별 의미는 없더라도) 아주 좋은 예술이다.
GQ> 2007년 1월호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에서
항상 전 백지상태에서 소설을 시작해요. 이런 걸 써야겠다, 하면 부담이 되거든요. 필요한 건 첫 장면 하나에요. 하지만 그 장면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생생해야 하며, 명확한 것이라야 해요. 캐릭터도 스토리도 일체 정해두지 않지만 확실한 첫 장면만 있으면 자신감이 생겨요. 잘 끝낼 수 있겠다 하는.
그럼 [태엽 감는 새]도 스파게티를 요리하는 남자라는 첫 장면으로 쓰기 시작하신 건가요?
네. 그때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 스파게티를 요리하는 남자 모습만 있었어요. 다음에 어떤 일이 있을지는 저도 몰랐어요. 그냥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렇게 설명을 해보죠. 저기 저 멀리 점 하나를 찍고 거기까지 달려가기로 해요. 달리는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몰라요. 잘 쓰여진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결말을 모르기 때문이잖아요. 저도 똑같아요. 다음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궁금하고, 궁금하니까 흥미진진하고, 흥미진진하니까 계속 쓰게돼요.
...나도 "태엽 감는 새"를 읽고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싶더니 진짜 그렇게 썼구만. 그저 얘기가 나른하고 느슨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그게 잘도 맞아 떨어진다. 정말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끝도 없이 얘기가 흘러간다.
그게 자기도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고 그냥 쓰는 거구나.
ps. 여담으로 "탐폰"의 역자 주가 "소독한 솜이나 가제 따위에 약물을 묻힌 것"으로 잘못 나왔다. 아마 번역한 사람은 나름 열심히 사전을 찾아서 역주를 붙였겠고, 기본적으로 탐폰이 소독한 솜에 약물을 묻힌 것이긴 하니까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http://www.munsa.co.kr/M_read.asp?BbsNo=3&No=513
태엽감는새 3 - 31쇄
71페이지 탐폰에 관한 역주 틀림
...이게 상당히 최근 판본에서도 교정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