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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영상

라이프 오브 파이 (2012)

13/01/21 05:36(년/월/일 시:분)

나는 유행에 뒤쳐지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회사일로 바쁜데도 굳이 최신 IT 및 예술 블로그 500여개를 RSS 리더로 꾸준히 읽고, 칸 국제광고제 수상작, MTV 시상식 매년 챙겨 보고, 빌보드 및 북미 박스오피스도 매주 챙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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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트리오 대디의 영화와 음악

특히 나는 "지트리오 대디"님의 북미 박스오피스 해석을 좋아한다. 모든 영화를 무조건 "예산"과 "흥행"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철처히 자본의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 나는 무척 흥미롭다.

그 중 "라이프 오브 파이"가 눈에 띄었다. 대단한 흥행을 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중위권에서 꾸준히 흥행을 했다. 게다가 북미보다 세계 성적이 더 좋고, 특히 유럽에서 인기가 좋다. 영화가 어지간히 좋지 않고는 이런 반응이 나오기 어렵다.

게다가 이안 감독이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색계를 만들었던 이안 감독이 이런 모험 영화를 만들다니? 이 두 영화들이 예산은 적게 들이고 섬세한 감정 표현에 집중했던 것을 보면, 이번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예산이 1억 달러로 액션씬도 엄청 많이 넣었다. 과연 이런 대규모 영화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성공. 무척 훌륭한 영화였다. 원작 자체가 영화로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영화였고, 이안 감독의 캐리어를 봐도 대단한 도전이었을텐데 멋지게 성공했다. 이렇게 볼거리도 풍성하고 생각할 거리도 충분한 영화를 재미없게 보기는 무척이나 어려울 것 같았다. 동물들이 많이 나오니 애들도 좋아하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니 중년 이상도 좋아한다.



---스포일러 주의---



특히 나는 두 개의 이야기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첫번째 이야기는 호랑이가 나오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두번째 이야기는 처절하고 비참한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첫번째 버전을 무척 길고 아름답게 보여주지만, 현실적인 두번째 버전은 매우 짧고 간략하고 고통스럽게 롱 테이크로 넘어가버린다. 현실적인 버전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더 생동감있게 보인다.

나는 이것이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한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현실에 적응해서 보통의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든 황폐해진 정신을 치료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릴 순 없다. 그래서 "그래 이렇게 생각해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두 이야기 모두 배가 왜 침몰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둘 다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그럼 어느 이야기가 더 아름다운가? 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차피 정확히 알 수 없고 지금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면, 아름답게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 그것이 믿음이 아닐까.



극도의 기아 상황에서 식인 행위는 실제 사례도 은근 많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도 극도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오히려 이렇게 비유적으로, 곰팡이나 구더기가 끓어오르는 장면을 미어켓 떼로 표현한다던가, 시체가 상해가는 것을 식인섬이 산성으로 변하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본인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기도 한다.

게다가 파이나 어머니가 채식주의자인데, 고기를 먹는 것도 안되는데 식인까지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섬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 뜯어먹는 것도 이끼, 채소다. 채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호랑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뒷 모습도 보이지 않고 정글로 들어갔다. 그리고 장면이 흑백으로 바뀌며 영화가 끝난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 같다. 파이가 호랑이의 뒷모습에 느끼는 감정은 야속함이다.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했는데 영원히 떠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도 호랑이의 뒷모습으로 끝난다. 파이의 웃는 모습과 함께.

호랑이라고 생각했기에, 호랑이와 함께했기에 파이는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모두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속하게 어딘가로 가버릴 것이다. 그때까진 호랑이가 있다고 믿으며 웃을 수 있는것이 나름의 최선이 아닐까 싶다.



아 근데 이 호랑이가 100% CG라니 믿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실제 호랑이를 아무리 조련해도 그렇게 배 위에서 연기를 시킬 순 없을텐데, 직접 눈으로 똑똑히 봐도 믿기지가 않는다.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세상 참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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