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0/12/28 02:12(년/월/일 시:분)
1. 몇년 전부터 북유럽에 가고 싶었는데, 마침 연말에 회사 권장휴뮤 기간이라 급하게 일정을 잡았다.
2. 겨울 북유럽은 해도 짧고 매우 추운 비성수기라서 여행 예약은 순조로웠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와 설날 프리미엄은 붙었다. 비행기 티켓, 호텔 예약, 교통편을 따로따로 사는 것보다 여행사에서 자유여행으로 묶어서 사는 편이 더 쉽고 쌌다.
3. 최근 유럽에 폭설 한파가 와서, 비행기가 뜨긴 하려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다만 눈은 정말로 많이 왔고 날씨도 매우 추웠다. 나는 이렇게 추운데 사람이 어떻게 다닐까 했더니, 다들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추위를 참으며 꿋꿋이 다니고 있었다. 이 사람들도 별 수 없구나 싶었다.
특히 젊은 애들이 스키니하게 얇게 입고 다녔다. 아무리 추워도 맵시있게 보이고 싶나 보다. 그렇게 얇게 입고 덜덜 떨면서 친구들과 큰 소리로 떠들며 길에서 담배를 피웠다. 젊은이들 노는 모습은 전 세계 공통인 것 같았다.
4. 애들을 눈썰매에 많이들 태우고 다니더라. 다들 똑같은 제품 같았는데, 대형마트에서 매년 시즌 상품으로 기획할 것 같다.
5. 제설차가 하루 종일 다녔는데, 그 육중하고 재빠른 모습에 감탄했다. 원래 눈이 많이 오는데다가, 제설에도 돈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역시 복지국가.
6. 12/25일 크리스마스 0시 30분에 공항에 내렸더니, 성탄 연휴라서 공항버스가 일찍 끊겼다. 다음날인 12/26일도 마찬가지로 성탄 연휴라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마치 한국의 추석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우리는 연휴라도 대목이라고 열심히 장사하려고 하지 않나? 여기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다 같이 노는 것 같다. 여행객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했지만, 직장인의 입장에서는 부러웠다. 이러고 국민소득 4만불이라니.
7. 북유럽이 물가가 비싸다고 하지만, 적어도 핀란드는 아닌 것 같다. 음식이나, 교통비나, 물건 값이나 준수한 편이었다. 스웨덴은 이보다 2배,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2배를 예상하고 있다.
8. 유난히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는데, 이 차분하고 정갈한 정서가 확실히 일본 같았다. 다소 마이너한 일본 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조용하고 차분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딱 핀란드의 느낌이었다. 사람 많고 지진 많고 복작복작한 도쿄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면, 넓직하고 안전하고 여유로운 핀란드를 동경할 만 하다.
9. 어부가 많고 생선을 많이 먹는 것도 비슷하고, 실내 디자인의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점도 꼼꼼하고 섬세한 일본과 통하는 면이 있다. 디자인 샵에 키티랑 무민이 나란히 있으면, 일본이나 핀란드나 비슷해보인다.
10. 기내식으로 준 샌드위치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담백하고 건조한 빵에 약간의 드레싱을 바르고, 슬라이스 치즈를 한 장 끼운 것 만으로도 매우 맛이 있었다. 간편하고 단순한데도 씹는 맛이 있고 짭짤한 것이 좋았다. 앞으로 한국에 가도 종종 이렇게 먹어야겠다.
11. 소코스 호텔에 묶었는데, 여기 조식도 상당히 잘 나왔다. 빵, 야채, 과일, 씨리얼, 음료가 나오는 평범한 메뉴였지만, 워낙 재료가 충실하고 간이 훌륭해서 잔뜩 먹고 말았다. 이틀을 묶었는데 이틀 아침을 모두 과식해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12. 핀란드는 딱히 전통 요리라고 할만한 게 없는데, 그나마 찾아보자면 순록 고기, 훈제 연어 정도? 정말 평범하지만, 그래도 잘 하는 식당은 정말 맛있게 잘 한다. 굳이 특별한 재료, 특별한 요리법이 없어도, 좋은 재료와 균형잡힌 양념만 해도 충분히 맛있구나, 당연한 얘기지만 새삼 느꼈다.
13. 대성당, 암석 교회를 갔다. 대성당은 러시아 같았다. 주거지역에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들도 러시아 같았다. 다만 스테인글라스도 쓰지 않고, 화려한 장식이 없이 아주 담백했다. 암석교회도 마찬가지로 장식이 없고 심플하고 모던했다.
14. 신용카드를 아주 편리하게 썼다. 비자 IC카드였다.
15. 아라비아 핀란드에 갔다. 헬싱키 외곽에 위치한 아웃렛이었다. 예쁜 식기들이 잔뜩 있었다. 아니 다 똑같은 머그잔, 접시인데 뭐 이리 불필요하게 다양한가 싶었지만, 1시간 정도 보다보니 나도 꽤 마음에 들어 귀여운 무민 머그잔을 2개 사고 말았다. 배낭여행이다보니 더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16. 헬싱키에서 스톡홀롬으로 가는 배를 탔다. 배 안은 면세점과 카지노로 매우 향락적인 분위기였다. 라스 베가스 풍의 댄서가 밸리 댄스를 추고, 마찬가지로 라스 베가스 풍의 스턴트맨이 간단한 곡예를 했다.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들이 구슬픈 왈츠를 연주하니 이상하게도 타이타닉이 떠올랐다.
게다가 이 배에는 담배와 술 찌든 냄새가 세제 냄새가 섞여서 묘한 불쾌감을 주었다. 면세점도 80~90년대 풍의 양평 스키장이나 설악산 기념품 가게 같이 촌스럽고 구질구질했다.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면세점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미친듯이 술과 담배를 샀다. 1인당 4리터로 제한하길래 왜 이리 많은가 싶었는데, 12캔짜리 맥주를 4박스나 담는 걸 보니 오히려 적은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다들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술담배가 많이 비싼가 보다.
게다가 그 촌스러운 면세점에서 무민 머그잔이 아웃렛보다 약간 더 싼 가격이라 무척 실망했다. 심지어는 2010년 크리스마스 신상까지 빠짐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여튼 무민은 핀란드 스웨덴의 둘리 같았다. 배 탈 때도 무민이 아이들을 껴안아주었다.
17. 핀란드 수퍼에는 살미아키(salmiakki, 설탕에 감초(liquorice)를 넣은 것)가 정말 많았다. 검고 달짝지근하고 끈덕지고 무척 적응하기 어려운 퀴퀴한 냄새가 났다. 물론 익숙해지면 또 먹고 싶을 것 같지만, 처음 먹어보는 입장에서는 매우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고보니 미국인이 한국 깻잎을 잘 못 먹더라. 독특한 향이 나서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잘 못 먹을수도 있다.
18. 자일리톨도 많았다. 대부분의 껌이 자일리톨이었다. 사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19. 카모메 식당이었던 카빌라 수오미에 갔다. 주거지역에서 간단한 식사를 싸게 파는 곳으로, 한국으로 치면 김밥천국이나 또래분식 같았다. 일본인이 운영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무료로 제공하는 수프는 일본식이었다.
수오미는 핀란드어로 핀란드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카빌라 수오미는 우리로 치면 한국 식당인 셈이다. 참 멋없는 이름이다.
수오미라고 하니까 일본 여자 이름 같다. 수오미짱. 왠지 있을 것 같은 이름이다.
식당에서 내가 주문을 못하고 뻘뻘거리니까 어떤 한국인 여행자가 나 대신 주문을 해주었다. 고마웠다. 왠지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그 분도 혼자 여행중이라 심심할 것 같았지만, 나는 결국 끝까지 말을 걸지 않고 목례만 하고 식당을 나갔다.
20. 여행 이틀째에는 눈이 그쳤다. 공기가 파랗고 청명해서 눈이 아플 정도로 콘트라스트가 높았다. 이렇게 하루 하루 날씨가 변화무쌍하니 좀 더 있어보고 싶었다. 매일이 새로울 것 같았다.
한국이 사계절이 뚜렸하다고 하는데, 핀란드는 더욱 심할 것 같다. 이런 나라에서 1~2년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