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0/11/28 00:56(년/월/일 시:분)
얼마 전 북한이 연평도를 폭격했는데, 나는 그 소식을 듣고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일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정말 심각하면 나라에서 나를 부르겠지, 그 전까지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북한은 북한이고, 나는 일을 끝내야 한다. 그 정도로 바빴다.
마라톤을 끝내고 근 3주간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원래 끝내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3주나 늦어졌기 때문이다. 해도 해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4주 짜리 프로젝트가 7주가 되버렸다. 주간보고에서 같은 얘기를 7번이나 해야 했다. 힘들었다.
늦어진 이유야 변명하자면 많지만, 가장 큰 건 코드의 품질이 낮아서였다. 뭔가 화면은 나왔는데 이게 대충도 돌아가지가 않았다. 게임으로 치면 진행불가 버그. 상당히 심각했다. 문제는 이게 내가 짠 거면 어떻게든 고쳐볼텐데, 내가 짠 것도 아니었다. 개발자 분들이 짠 거였다.
우리 부문에 개발자 2분이 계시다. 한 분은 서른 중반, 또 한 분은 서른 후반이다. 경력 10년 이상의 쟁쟁한 분들을 입사한지 2년도 안 된 신참인 내가 일을 시켜야 한다.
사실 이런 상황은 내가 자초했다. 내가 경력이 부족하니, 경력이 많으신 분들을 모셔와서 좀 배워가면서 해보자, 그래서 고급 개발자를 요구했다. 그런데 막상 모셔오니까 내가 일을 시키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내가 납품하는 을이라면, 그 분들은 나에게 납품하는 병이었다. 고용 형태가 그랬다. 졸지에 내가 중간 관리자가 되어버렸다.
마치 박찬욱 감독 같다. 박찬욱이 중편영화 '심판'을 찍을 때, 원로배우들을 무료로 모셔다 썼다고 한다. 영화 내용 상 중년 배우들이 필요하기도 했고, 출연료 드릴 돈도 없었고, 하지만 영화는 찍어야겠고. 그래서 정말 배우 분들을 깍듯이 모시면서 찍었다고 한다.
보통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배우들에게 윽박도 지르고, 무리한 스케쥴로 찍기도 하고 그러는데, 박찬욱은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신참 감독이 원로 배우들에게 막 다그치면서 찍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차피 그 분들은 어느 유망한 젊은 감독의 영화에 무료 봉사해주는 것이라서, 안 찍어도 그만이다. 아쉬운 건 박찬욱이다. 그래서 잘 달래가면서 찍었다고 한다.
근데 그렇게 찍으니까 영화에서 배우가 돋보이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감독이 원하는 연기가 아니라 배우가 연기하고 싶은 연기를 하니까, 영화에서 배우의 비중이 높아진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올드 보이보다는 최민식이다. 친절한 금자씨보다는 금자씨 이영애다.
킬 빌의 우마 써먼도 그랬다. DVD를 보니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그런 스타일이더라.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도 배우의 비중이 높다보니, 배우들을 잘 달래가면서 찍더라. 연기 톤도 자기 생각보다는 배우의 생각을 더 물어보고, 원하는 방향으로 연기하기를 바란다. NG가 나도 "잘 하셨어요. 정말 좋아요. 하지만 한 번만 더 가볼까요?" 하는 식으로.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리더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IT 시스템의 근본은 결국에는 코드이고, 그 코드를 개발하는 것은 개발자다. 코드 품질이 높아야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고객이 신뢰한다. 그러므로 개발자가 좋은 코드를 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그 이전에 개발자분들의 고용이 안정되어야 하고, 고용 형태가 개선되어야 그 분들이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일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돈이 든다. 다른 회사들처럼 우리 회사도 최소한의 리소스로 최대한의 효과를, 최소한의 인풋으로 최대한의 아웃풋을 뽑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걸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다.
상황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 어쨌든 주어진 일은 끝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책임이다. 이것이 나의 어려움이다.
전에는 하도 진도가 안 나가서 새벽 3시까지 개발자분들을 붙들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답답해서 코드를 뜯어보니 사소한 코딩 실수였다. 솔직히 화가 났고, 그냥 내가 코딩하는게 빠르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분들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코딩 실수는 나도 한다. 실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신뢰하되 검증해야 한다. 도와드리되 가르쳐서는 안된다.
코드를 일일이 까보지 않고 어떻게 코드 품질을 높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딱딱한 누룽지를 으적으적 씹어먹다보니 살이 한 2kg는 쪄버렸다. 무척 어려운 고민이기도 하고, 입사 2년도 안된 신참이 할만한 고민도 아니다. 물론 무척 귀중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잘만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임에는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다행히도 같은 고민을 많은 분들이 하고 있는 것 같고, 나보다 회사를 오래 다니신 분들이 좀 더 능숙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이런 점은 나에게 위안이 된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선배님들에게 물어가면서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