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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야

15/03/25 12:40(년/월/일 시:분)

- 천국

트위터에서 성철스님 말씀을 봤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자 지옥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죽어서 지금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쁜 어딘가를 가는게 아니다. 내가 지금 사는 이 세상이 천국이자 지옥이자 중간계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장 내가 고통스럽고 불행할 때 했다. 천국이라는게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천국도 참 별 볼일 없구만. 고작 이런 곳에서 행복을 만들어가야 하나.


- 에너지

시간관리가 투철한 친구가 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을 보더니 자기가 사용한 시간을 모두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친교, 3시간" 이렇게 적었다 ㅋㅋ

그 친구가 요즘에는 에너지 관리를 시작했다. 시간과 더불어 본인이 사용한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기록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어딘가에 써버리면 다른데는 못 쓴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절대량이 정해진 것 같다.

나의 소중한 생명 에너지를 어떻게 잘 쓸 수 있을까.


-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 책이 나오고 덜컥 킨들로 영어버전을 샀다. 그래놓고 몇 년간 앞에 조금을 읽다 말았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25시간짜리 오디오북을 들었는데, 이것도 다 듣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25시간짜리 오디오북을 다 듣는데 왜 1년이 걸렸냐 하면, 그야 듣다 말다 했으니까 그렇지. 특히 초반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서 엄청 막혔다가, 중반 이후로 익숙한 IT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다행히 쏜살같이 들을 수 있었다.

거진 1년 가까이 내 스마트폰의 알림 바에 항상 상주하고 있었던 오디오북 어플을 마침내 닫았다. 정말 오랜 시간동안 함께해온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 검은 허공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그 동안 정말 즐거웠다. 고마웠어. 나는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런 거에 마음이 찡해지다니.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호텔의 연분홍색이 예뻐서 봤다. 역시나 영화 미술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생각보다 스케일도 크고 예산도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잘도 끝까지 밀어부쳤구나 싶었다.

재미있게 봤고 취향에도 맞았지만 그렇게 특별한 감상은 없었다.


- 님포매니악

야해서 봤다. 여자판 살로 혹은 소돔의 120일, 혹은 아라비안 나이트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옛날 야설, 깊고 깊은 구멍의 여자판 같았다.

처음에는 영어공부삼아 영어자막으로 보다가 허거덩... 단어 수준이 널을 뛰며 쉬웠다 어려웠다를 반복해서 포기하고 한글자막으로 갈아탔다. 여자가 자기 경험을 얘기하고, 거기에 남자가 썰을 붙이는데 그 썰이 어찌나 현학적이던지 원.

님포매니악의 님프가 그 님프일 줄이야.


- 킹스맨

정말 자극적인 영화였다. 나는 왜 이 영화가 잔인하다는 얘기가 안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간다. 한국 관객들은 잔인함에 너무 관용적이다.

이거 보고 너무 감명을 받아서, 아내와 보고 빅맥을 싸와서 집에 있는 고급 식기에 담아 먹었다. 고작 빅맥인데 왜 이리 고급스럽던지 ㅋㅋㅋ


- 성장 진보

나는 진보지만 성장주의자다. 한국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산업화, 시스템화, 자동화, 계량화, 체계화시켜서 생산성을 높일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가치가 진보적인 가치와 크게 충돌하지 않고 둘 다 살리도록 절충 가능하다고 본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근데 진보 쪽에 나처럼 성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외롭다 싶었는데, "성장 친화형 진보"라는 책이 있어 반가웠다. 이런 생각, 나만 하는 거 아니구나 싶었다. 책 내용은 그냥 제목 수준이라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나름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해준 책이었다.


- 이영돈PD가 간다

나는 이영돈이 좋다. 스튜디오에 직접 가져와서 씨익 웃으며 "제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 하는 게 좋다. 정말 방송을 즐기는 것 같다. 개인적인 욕망이 보이는 것이 좋다. 방송을 사적으로 이용한다는 느낌.

물론 거기에는 명분이 있다.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 내가 비록 내가 정말로 가슴 깊이 욕망하는 것을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한 꺼풀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든다는 껍데기를 씌운다. 그것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사실 이영돈이 다루는 소재들은 그냥 미스테리다. 일요일 오전에 하는 서프라이즈와 다를 바가 없다. UFO, 외계인, 귀신, 미해결 강력범죄, 의문의 식재료... 하지만 여기에 저널리즘을 한 스푼, 공익을 두 스푼 추가해서 예쁘게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포장한다.

나는 그래서 이영돈이 자체 프로덕션을 만들고, JTBC에 외주 형태로 공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방송을 만들지. KBS 등의 기존 조직에서 부딪쳤을 부분도 그런 고집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하여튼 자기의 순수한 욕망으로 만드는 PD가 참으로 드문지라 무척이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욕망과 공익의 아슬아슬한 균형, 이게 가끔씩 흔들리는 것 같은데 잘 중심을 잡기를 바란다.


- 수요미식회

내가 원체 먹는걸 좋아하다보니 이런 프로가 반갑다. 먹는 것에 대해 1시간동안 줄창 얘기하는 프로.

이걸 보고 서울시청 앞에 플라자호텔 중식장 도원에 갔다. 정주영 회장이 즐겨드셨다는 상어지느러미 찜하고, 항정살을 튀겼다는 과일 탕수육이 먹고 싶었다.

식당에 가서 이 얘기를 꺼내자 요즘 TV보고 오시는 분들이 정말 많으시다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왠지 TV를 보고 온 멍청한 소비자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얼굴을 들기가 부끄러웠다.

수요미식회에서 추천하는 식당들을 가보면 "와 진짜 맛있다"가 아니라 "으음 이런 맛이구나"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깜짝 놀랄만큼 맛있는 맛집이 아니라, 이 음식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 깊이있게 이해하게 만드는 맛이다.

나는 이 수요미식회가 정말로 훌륭한 식도락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다.


- 냉장고를 부탁해

크레이지 최셰프가 너무 재밌다 ㅋㅋㅋㅋ 원래 최솊이 좀 꼰대 기질이 있는데, 여기서는 정형돈이 놀리는 걸 잘 받아줘서 그 거북함이 많이 중화됐다.

이 프로 말고 예전에 최솊이 나온 "크레이지 최셰프"였나? 하여튼 거기 요리에서 경악했던게 장미액을 쓰는 거였는데, 장미액도 그렇지만 푸와그라 등 풍미가 매우 강한 고급 식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내게는 좀 투머치인 느낌이었는데.

다행히도 이 프로는 남의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한정해서 요리하는 거라, 그런 최솊의 과시성이 많이 중화된 느낌이다. 재료로 과시를 못하니 소금 뿌리는 것 같은 제스쳐로 과시하는 것 같은데 그게 너무 재미있다 ㅋㅋㅋㅋ


- 타일러 라쉬

나는 비정상회담에서 타일러가 제일 좋다. 왜냐하면 나랑 생각하는게 제일 비슷하거든. 진보 쪽이 결국 다 그런 스탠스로 갈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하여튼 타일러에 푹 빠져서 꿈에 타일러가 나올 정도였다. 타일러가 나오는 TV프로그램은 다 챙겨봐서, 시간여행자K, 문제적 남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까지 챙겨보고, 친구가 라디오에 나온 것까지 mp3로 보내줘서 챙겨 들었을 정도다.

근데 내 느낌은 타일러가 방송을 그렇게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비정상회담에서의 역할도 한정적이다. 솔직히 타일러 수준의 대화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항상 타일러는 자기의 주장을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말하고 끝내려고 한다. 마음껏 말할 기회가 없다.

시간여행자K도 한국의 과거 역사라, 역덕(역사 덕후) 타일러의 활약을 기대했으나, 역시나 공영방송 KBS 답게 조금도 나쁘거나 민감하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 밍숭맹숭한 소재들만 다뤄서 타일러가 고작 "아 정말 흥미롭네요.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같이 지루한 말만 되풀이하게 할 뿐이었다.

문제적 남자는 더욱 심각해서, 똑똑한 패널들을 데려다가 고작 대기업 입사문제, 국제중 입시문제 같은 문제나 풀게 시키고 있다. 엘리트와 브레인을 혼동한게 아닌지... 중학교 시절 IQ가 몇이었나 까보고 있고... 아 정말 못봐주겠다.

반면 내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에서는 그나마 벨기에를 가서 약간 활발해진 타일러를 볼 수 있었다. 프랑스어로 회화가 가능하다니... 넌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는거냐...

TBS 라디오 인터뷰를 보니, 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라는 질문에 서구중심적인 사고가 싫어서, 이를 벗어나고자 가장 서구의 반대편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 도서관에 갔는데 가장 신기하게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된 책이 한국어 책이었다... 하긴 한글이 서양 사람들 보기에 참 조형적으로 신기하게 생기긴 했지.

그래서 집에 와서 유튜브로 한국 자료들을 찾아봤더니 북한의 기근 문제라던가, 007 냉전 시대에서나 볼 법한 핵무기 개발이라던가, 흥미로운 주제가 많아서 빠지게 되었다고. 역시 한국에 오는 서양인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을 빼놓을 수 없겠지.

하여튼 얘는 정치외교학과를 다녔지만 그렇다고 외교관이 꿈인 건 아니고, 당장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하니 당분간은 방송 일에 전념을 할 것 같다. 그렇게 타일러의 잠재력을 발휘할만한 일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다보면 뭔가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기다릴 것 같음.



- 닥침력

나이가 들수록 말을 안 하고 닥치는 능력이 는다. 속으로 생각은 하지만, 겉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생각하는 건 옛날 철없던 시절과 별반 다를게 없다. 사람의 성향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하는 걸 그대로 내뱉지 않고,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필터링을 거치고 정제해서 예쁘게 다듬어서 말한다.

이것을 수사학, 레토릭이라고 한다. 아내는 이런 나의 말하기를 "대기업식 말하기"라고 한다. 작도닷넷의 글도 예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특히 그런 억센 맛이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하는 얘기야 거기서 거기지만,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차이라고 할까.

이것의 문제는 말하는 양이 크게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친구들 앞에서도, 트위터나 페이스북 어디에서도 나의 발언의 양이 기존에 비해 크게 줄었다. 나는 어딜가나 일관성 있게 말을 잘 골라서 하려는 편이다.

그렇다고 나의 수다력이 어딜 가는 건 아니라, 내가 안심하고 말할 수 있는 나의 가장 소중한 단 한 사람에게 이 수다폭풍이 쏟아진다. 그 분에게 주기적으로 나의 닥침력을 검사받고 보정을 해준다. 나의 훌륭한 사회생활을 위한 조율기다. 항상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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