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4/01/15 13:20(년/월/일 시:분)
먹는 얘기를 해보겠다.
나는 먹는 걸 정말로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블로그에는 먹는 얘기를 잘 안 올리게 된다. 아마도 먹는 욕구를 먹어서 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까지 차오르면 그걸 블로그에 써서 푼다. 컴퓨터를 앞에 두고 혼자서 수다를 떠는 것이다. 그렇게 한 한두시간 글을 잔뜩 쓰고나면 욕구가 충족이 된다.
내가 요즘 블로그에 정치 글을 올리는 것도 그래서다. 현실에서 정치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 욕구가 차오르고 차오르다가 블로그에서 폭발하는 것이다.
하여튼 다시 먹는 얘기를 해보겠다.
아내와 나는 먹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정말로 먹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녹두장군의 블로그를 좋아해서, 맛있어보이는게 있으면 일부러 차를 끌고 가서 먹고 오곤 한다. 먹는 시간이라 해봤자 고작 1시간 정도인데, 그 1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의 몇 배 되는 시간을 들인다. 그래도 그 시간과 돈과 노력이 아깝지 않을만큼, 어지간한 활동보다 먹는 것 하나가 우리에겐 엄청 즐겁고 신나는 경험이다.
뭔갈 먹으러 가면, 가는동안 먹는 얘기를 한다. 요즘 우리가 먹으러 가봤던 군만두들의 특징, 최근의 군만두의 경향, 나와 너의 취향의 차이, 만두라는 음식의 특성, 그 동질감 사이에서 특출남을 드러내는 비법, 적절한 염도와 건강의 트레이드 오프, 맛과 건강의 균형, 돼지기름의 진득함, 한국에서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비싼 이유, 쩐내나는 오래된 튀김유, 한국에서 중국 화상의 위상....
먹는 동안에도 계속 먹는 얘기를 한다. 군만두의 온도, 만두피의 두께, 만두소의 단단한 정도, 씹는 순간 뜨거운 기름이 입안에서 톡 튀는 질감, 부추와 두부와 고기의 적절한 비율, 중국집 인테리어, 몇개를 시킬까, 하나는 싸갈까...
먹고 돌아오는 길에도 또 지치지 않고 먹는 얘기를 한다. 이미 차 안에는 포장한 만두의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한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몇 개를 꺼내 먹는다. 그리고 약간 식고 눅눅한 감촉에서 또다른 맛을 느낀다. 손과 입이 기름범벅이 되고, 만두의 온기가 온 몸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그리고 밀려오는 포만감, 그리고 만족.
이렇게 실컷 얘기를 하니 블로그에 쓸 얘기가 있나.
나도 얘기하다보니 군침이 도네. 참고로 위에서 말한 군만두는 평택 태화루 거다.
http://hsong.egloos.com/viewer/3131933
[평택] 태화루 - 수제 군만두가 일품인 화상
말하다보니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먹는 얘기를 해보겠다. 아니 이것도 먹는 얘기지만, 원래 하려던 먹는 얘기는 이게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근 몇년간 무던히도 맛집들을 찾아다녔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 곳이 바로 신라호텔 팔선이다. 팔선은 정말 국내외를 불문하고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해도 좋을만큼 정말 정말 맛있다. 그냥 맛있는게 아니라, 신기하게도 정말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이 금방 든다. 몇 점 집어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배가 꽉 찬다. 내가 결코 양이 작지 않은 사람인데도, 너무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이상하게 금방 배가 부르다.
게다가 보통의 외식이 아주 짭짤하고 기름지게 나오지만, 팔선은 간도 정말 최소한만 하고 기름지지도 않게, 아주 깔끔하게 건강하게 나온다. 굳이 간을 세게 하지 않아도 워낙 양질의 재료를 쓰기 때문에, 그 재료의 맛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으로도 이미 맛있기 때문이다.
일단 요리가 나오면, 그 요리를 눈이 아니라 코가 먼저 안다. 거의 무취 상태였던 식당의 공기가, 요리가 나오는 순간 연하면서 확실한 향이 확 나기 시작한다. 이걸 제일 확실히 느낄 수 있을때가 불도장이다. 보통 불도장은 코스 요리에서 전반부에 나오는데, 이제 막 두근두근하면서 뜨끈한 국물로 속을 데우며 메인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불도장이 잘 나온다.
근데 이 불도장이 원래 향이 강한 요리지만은, 팔선의 불도장의 향은 옅으면서 그윽하다. 강하지는 않지만, 연하면서도 확실한 해물향이 난다. 그 향을 맡는 것 만으로도 이미 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몇 숟갈 떠먹지도 않았는데, 그 양질의 해물 국물이 온 몸을 따뜻하게 데워 오른다. 이것이 지금껏 내가 원해왔던 영양이고, 지금 이것을 먹는 이 순간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내 몸의 모든 신경이 지금 내 눈 앞의 요리에 완전히 몰입해있고, 음식과 내가 물아일체의 지경으로 하나가 되어 간다. 그 강렬하고 통렬한 경험을 나는 잊을수가 없다.
http://hsong.egloos.com/3360320
[장충동] 신라호텔 팔선
나는 팔선을 먹으면서, 틱낫한 스님의 "화"를 생각했다. 한창 유행했던 힐링 서적의 시초 격으로,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차분하게 가르치는 책인데, 특이하게도 먹는 것에 대해서도 조언을 한다. 나는 그 먹는 것에 대한 구절이 매우 인상깊어서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그것만 기억한다.
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47684
틱낫한 - 화
현대 음식들은 화를 부른다. 화가 날만한 음식을 먹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당장 입에는 달콤하지만, 먹고 나면 그 저질의 영양 성분들이 몸에서 미쳐 날뛰도록 화를 조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스님들은 육식을 안함은 물론, 신진대사를 올릴만한 채소도 먹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늘, 고추, 부추, 파 같은 것들은 먹으면 몸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어딘가에 힘을 쓰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한다. 그래서 정말 먹어도 전혀 욕구가 안 생길 것 같은 무채색의 식단을 짠다.
근데 문제는, 몸에 나쁘거나 몸이 화가 날만한 음식을 피해서, 정말 몸에 도움이 될만한 좋은 음식만 찾아 먹다보면 너무 비싸진다는데 있다. 당연하지만 좋은 음식은 비싸고, 싼 음식은 저질이다. 온갖 자투리 잡육을 섞어 구운 편의점 햄버거 패티는 몸에는 안 좋아도 싸고 맛있다. 하지만 정말 좋은 부위만을 선별하여 정성들여 구운 수제버거 패티는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가격이 많이 비싸진다.
그러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저질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저질 음식을 먹고 맨날 화를 내며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틱낫한 스님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한가지 답을 제시했다.
좋은 음식을, 적게 먹어라.
나는 이 대답이 정말로 비현실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스님이나 할만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고 해도 조금만 먹으면 돈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조금만 먹을 수 있나.
물론 우리 몸은 평상시에도 한 40일 정도는 굶어도 죽지 않을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 40일이라는 시간은 예수님도 그렇고 부처님도 그렇고 단식의 한계점으로 보는 기간인데, 삼풍백화점 붕괴 때 최장기 생존자가 15일을 버틴 것을 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여튼 우리 몸이 매일 하루 3번 이상씩 주기적으로 배고픔을 느끼지만, 그 욕구를 다 충족해주지 않아도 살아가는데는 큰 지장이 없다. 조금만 먹더라도 정말 죽을만큼 아주 덜 먹지 않는 이상, 수입이 적더라도 좋은 재료를 조금씩만 사용하여 건강한 식생활을 꾸리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스님처럼 고도의 정신적 수련을 각오해야 가능할 것이다. 이 배고픔이란, 특히 나처럼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준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고통은 정말 나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다. 설령 사는데 지장이 없는 정도라고 해도, 당장 내 입안에 저 쓰레기같은 저질의 편의점 햄버거를 쑤셔넣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폭발해버릴것 같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다. 패션모델들이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하면서 먹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칼로리가 없는 종이를 씹어먹는다던데, 나도 종이 정도야 가볍게 먹을 것 같다.
왜 못사는 사람들이 뚱뚱하겠나. 당장 돈은 없고, 눈 앞에 저질이지만 매력적인 음식들이 유혹을 하는데, 그 유혹에 홀랑 넘어가버리니 그런 것 아니겠나. 시장의 떡볶이는 아직도 꽤 싸고 배도 금방 부른다. 시장의 젊은 어머니는 자식에게 떡볶이를 먹이면서 이게 오늘 저녁이라고 신신당부를 시킨다.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 가슴이 아팠다.
팔선에서는 어느 중년의 여성이 노모를 모시고 와서, 무척이나 비싸보이는 호박찜 요리인가를 시켜 드렸다. 아마 나이가 많으셔서 씹기도 힘드시고 소화도 잘 안되니 먹기 편한 호박찜을 시킨 것 같았는데, 할머니께서는 무척이나 입맛에 안 맞으신지, 먹기가 불편하신건지 그 비싼 요리를 깨작깨작 드셨다. 반면 반대편의 여성분은 무척이나 우아해보이는 과일 볶음 요리를 시켜서는 무척이나 맛있게 드시는 것이었다. 한가로운 어느 주말 오후의 식당 풍경이 이렇게 달랐다.
우리 집은 아주 오랫동안 시장에서 약국을 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에게 시장 음식을 끼니로 준 적이 거의 없다. 약국집이라 그런지 더욱 건강을 챙겼고, 특히나 저녁으로 떡볶이를 먹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 풍경을 보며, 비록 맥락은 잘 모르겠지만, 나의 어머니라면 어린 나에게 떡볶이를 먹이지는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의 어린시절을 보냈다. 장모님께서도 아내에게 그 흔한 과자 한봉지 안 사 먹였다. 그래서 명절에 가끔 친척이 수퍼에서 파는 종합선물세트 과자를 한 박스 사오면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부유한 집안에서 어린 시절부터 좋은 음식을 먹는 훈련을 받았다. 이것도 부의 세습이라고 생각하면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곱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도 든다.
마지막으로 먹는 얘기를 해보겠다.
회사에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아, 영양가도 없는 정크 푸드를 폭력적으로 씹어먹다 보면, 불현듯 팔선의 그 따뜻하고 그윽한 향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입으로 먹기 전에 먼저 코로 느껴지는 그 풍성하고 영양 가득한 충실한 향, 그리고 그 따뜻함이 수족냉증에 시달리는 내 발끝 손끝까지 짜릿하고 기분좋게 데우는 그 풍만한 포만감. 그 느낌이 문득 뭉클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좋은 음식을, 적게 먹어라.
싸구려 저질 음식을 잔뜩 입에 채워 넣으면서 나는 틱낫한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당시 책을 읽을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때론 지금처럼 그 말의 진심이 가깝게 다가올 때가 있다. 작작 좀 먹어라. 분명히 그렇게 들렸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