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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들 - 스토리

돌고 돌고 돌고

08/03/11 10:54(년/월/일 시:분)

아침에 밥을 먹다가 생각했다. 내가 이 밥을 어제 아침에도 먹지 않았나?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아침마다 밥을 되풀이해서 먹었다. 특별히 배고파서 그런 건 아니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나는 습관적으로 아침마다 밥을 반복하여 먹어왔던 것이었다.

아침엔 아침밥
점심엔 점심밥
저녁엔 저녁밥
그리고 잠잔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
인생의 참된 것

- 안재환, "인생의 참된 것" 중에서


옳거니! 나는 안재환의 노래를 들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 인생의 참된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인생을 의미있게, 인생을 참되게 살 수 있을까, 즉 효율적으로 반복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나는 일단 왼쪽으로 한바퀴를 돌아보았다. 휙~ 핑그르르. 정말 멋진 방법이었다. 나의 온 몸이 왼쪽 다리를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아,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정확하게 돌아왔다. 아주 쉽고 간단하면서도 의미있는 반복이었다. 나는 아주 마음에 들어서 수백번을 반복해서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문제는 머리가 아주 어지럽다는 것이었다. 잔뜩 술에 취한 것처럼 어지럽고 토가 쏠렸다. 반대로 오른쪽으로 돌아보기도 했지만 어지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나는 도는게 마음에 들어, 그 후로 매일 왼쪽으로 300바퀴, 오른쪽으로 300바퀴를 돌았다. 친구에게 "돌았냐?"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돌았다."고 답했다.

약 3개월간을 그렇게 돌다보니, 이제 제자리에서 말고 좀 더 크게 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을 시작해서 러시아를 거쳐 북극점을 지나 알래스카, 캐나다, 미국,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거쳐 남극점을 지나 호주,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일본, 태평양을 건너 미국, 칠레, 브라질, 대서양을 건너 가봉, 콩고, 우간다, 수단, 이디오피아, 예멘,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 에미레이트,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중국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회전에는 지난번과 달리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는데, 첫째는 돈과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돈과 시간 때문에 반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반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나는 노트북을 수리하러 용산 서비스센터에 갔다. 컴퓨터를 심하게 사용하면 팬이 갈리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증상이었는데, 직원은 수리를 마친 후 나에게 다음과 같은 시연을 보였다.

시작 - 실행(R) - cmd

copy con a.bat
a
(Ctrl+Z)


그리고 a.bat를 실행시키면 스스로를 반복하여 무한 호출하면서 CPU 사용률이 100%가 된다.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팬이 빠르게 돌았지만 예전만큼 시끄럽지는 않았다.

나는 이 간단한 a.bat의 반복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단순하고 아름다운 반복이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나는 신이나서 컴퓨터를 사용할때마다 a.bat를 만들어 반복을 시켰다. a.bat가 무한 반복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지겹지가 않았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아까 "돌았냐?"고 물어봤던 그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돌고 있어. 양자가 스핀하잖아."

정말로 그랬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위로 도는지 아래로 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어떻게든 쉬지 않고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굳이 내가 힘을 내어 돌 필요가 전혀 없었다. 우주는 그 자체로 명쾌하고 우아하게 스스로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아침에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오늘은 냉이 무침, 마파두부, 흰밥이다. 매일 300번씩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때도 아침을 먹었고, 북극점과 남극점을 지나 지구를 한 바퀴를 돌때도 아침을 먹었고, 컴퓨터에서 a.bat를 무한 반복할때도 아침을 먹었고, 양자론에 따라 모든 것이 원래 회전한다는 것을 이해한 지금도 아침은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다.

나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반복하여 아침을 먹었다. 아침밥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반복하여, 매우 맛이 있었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 인생의 참된 것이다. 쩝쩝.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1023

  • 동동이 08/03/11 17:48  덧글 수정/삭제
    오아. 좋습니다.
  • honey 08/03/12 10:14  덧글 수정/삭제
    인생의 의미..라..
  • 황진사 08/03/12 15:10  덧글 수정/삭제
    하하 안재환 그노래 TV에 나와서 한구절 부르는거 보다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나름 심오한 뜻이 있구만... 얼핏 기억에 고등학교때 활동하던 밴드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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