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3/11/23 02:36(년/월/일 시:분)
최근 손석희 사장이 진행하는 JTBC 뉴스 9 가 좋다. 손석희가 진행했던 옛날 MBC 뉴스데스크를 보는 기분이다. 그때는 그런 뉴스가 당연하고 평범했는데, 이제는 어느새 희귀하고 소중해져 버렸다.
JTBC 뉴스 9 에서는 맨 마지막에 매일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주는게 이것이 참 재미있다. 손석희는 원래 자기의 생각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데, 보통 방송사의 메인 뉴스에서는 앵커가 맨 마지막에 자신의 생각을 짤막하게 드러내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것 대신에 여론조사를 넣은 것 같다. 여론조사 결과를 툭 던지고 논평하지 않는다. 영리하다.
여론조사를 보면 이것이 진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구나 하며 실망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최근 10월 25일 개최하려던 커밍아웃 데이 행사를 마포구에서 불허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인권침해냐고 물었더니 무려 반반이 나왔다. 이 땅에서 동성애의 갈 길이 멀구나 싶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37&aid=0000015391
[JTBC 여론조사] '성소수자 행사 불허 인권침해' 42.2% vs '아니다' 43.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37&aid=0000015852
[JTBC 여론조사] '국정원 수사 검찰에 맡겨야' 34.5% '특검해야' 51.8%
한편 국정원 댓글 사건을 특검해야 할까 물었더니 그래야 한다고 나왔다. 도대체 국정원이 왜 댓글을 쓰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고 화가 많이 났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구나 싶어서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여론의 방향성이 새누리당, 민주당, 정부의 입장과는 비슷할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지만, 안철수의 입장과는 거의 비슷하게 간다는 것이다. 안철수가 말을 아끼고 간을 본다 싶은 사안들은 대체로 여론조사 결과가 반반으로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다가 여론이 어느 한 쪽 방향으로 기울어졌을때 비로소 안철수가 입을 연다.
- 교조주의 vs. 계몽주의 vs. 시장주의
안철수는 여론에 철저히 후행한다. 새누리당이 교조주의고, 민주당이 계몽주의라면, 안철수는 시장주의다. 여론을 확 잡아 이끄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분석해서 입장을 정하고 이익을 볼때까지 기다린다.
새누리당은 대중을 일을 시킬 게으른 하인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규제도 하고 저렇게 규제도 해서 똑바로 일을 잘 하는 사람으로 키우려는 것 같다.
한편 민주당은 민중을 잠들어있는 멍청한 아들 딸로 보는 것 같다. 잠은 그만 자고 어려운 책도 읽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해서, 깨어있는 시민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근데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같은 것이, 국민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비록 방향성은 다르지만 어떤 목표지점, 이상향이 있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이 나라를 끌고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반면 안철수는 국민들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현재의 국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국민들의 성향을 요리조리 분석해서, 이 사안은 롱을 잡을까 숏을 잡을까 고민해서 포지션을 잡고 기다린다.
예를 들어 동성애 이슈도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로 갈 길이 멀다. 사람들은 아직 동성애가 정확히 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것을 이해시키고 공감시키고 법을 바꾸는데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는데 새누리당처럼 교조주의로 끌고 갈 수도 있고, 민주당처럼 계몽주의로 끌고 갈 수도 있지만, 안철수처럼 말을 아끼며 간을 보며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2&aid=0002194872
오다 노부나가는 새가 울지 않으면 베어버린다고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를 울게 만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나는 대중의 여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도 있지만, 길게 보면 보통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일시적으로 확률이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게 튈 수 있지만, 몇 개월이고 몇 년이고 지나서 다시 물어보면 여론은 분명히 평균으로 수렴해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론을 후행하는 전략은 아주 좋은 결과를 내기도 어렵지만 아주 나쁜 결과를 내기도 어렵다. 다만 철저히 위험을 관리하며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빈틈이 보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면 다소의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승리들이 쌓이고 쌓인다면 아주 길게 봐서 이 나라를 조금씩 전진하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굉장히 답답한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 가장 일반적인 사업가 정신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