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음악
13/11/06 12:21(년/월/일 시:분)
최근 무한도전은 김태호PD의 색깔을 지우는 느낌이 든다. 기존에는 PD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악랄할 정도로 출연진들을 괴롭히는 재미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가학성이 크게 줄어들었고, 고군분투하며 고생하는 재미보다는 새내기 PD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을 자유롭게 발산하도록 내버려두는 느낌이 든다. 이젠 김태호도 PD가 아니라 CP이니 짬도 찼고 해서 슬슬 발을 빼는 게 아닐까. 이제 김태호도 아랫사람들에게 맡겨놓고 휴가도 다녀오고 그래야지 ㅋㅋ
하긴 무한도전 멤버들이 지난 8년간 성장하여 더 이상 실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니(길 제외), 예전같은 "못난 남자들의 무모한 도전" 컨셉을 바꿀 때도 됐다. 이번 가요제도 예전과 달리 실패한 곡이 하나도 없다. 유재석도 노래를 꽤 잘 부르고, 노홍철도 박자를 안 놓치고, 박명수도 음이탈을 안 한다. 가수들도 무도 멤버들의 특징을 잘 파악하여 맞춰주고 받춰준다. 뭘 해도 잘 된다. 감개무량하다. 그래서 이제는 무모함보다는 완숙함으로 컨셉을 바꾼 것 같다. 그래서 예전같은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퀄리티는 높다.
노래를 하나씩 들어보자.
1. 정준하, 김C - 사라질 것들
김C는 이런 노래를 대중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에서 정준하에게 끝까지 비밀로 하고 공개를 하지 않았던 것도, 무도 이전에 만들었던 곡이어서가 아닐까. 일단 공개하면 고쳐야 하니까, 원곡의 순수함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방송에서는 북유럽풍이라고 했지만, 북유럽풍은 아바, 시크릿 가든, 에이스 오브 베이스처럼 훨씬 서정적이고 멜로디가 강하다. 다소의 우울함은 있지만 이렇게 담백하지는 않다. 화성도 거의 안 쓰고 무척 건조하게 뽑아냈다. 이건 오히려 시규어 로스에 가깝다. (시규어 로스는 아이슬랜드)
그리고 장르를 미니멀 일렉트로닉이라고 했는데, 난 솔직히 이런 장르를 처음 들어본다. 그보다는 내가 10~20년 전에 한창 들었던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황신혜밴드 3집, 황보령, 곤충스님 윤키, 볼빨간 등의 90년대 홍대 인디 테크노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매우 매니악하지만 그래도 의외로 보컬 멜로디가 꽤 대중적이라 머리에 계속 맴돈다. 보컬만 나중에 급하게 만든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주는 뜨거운 감자 스타일이 아닌데, 보컬만 뜨거운 감자 스타일이다.
하여튼 지난번에 정재형의 순정 마초도 본인의 앨범에 넣기에는 너무 튀고 매니악한데, 일부러 무한도전을 빌어 대중들에게 꼭 한번은 들려주고 싶은 자기색깔이 강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김C의 사라질것들도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정준하는 정작 맨 가운데에 세워놓고도 음악에서 가장 소외되었다 ㅋㅋ 그래도 이번에 정준하의 비음과, 긴 음에서 쓸데없이 감정 넣는 것을 담백하게 디렉팅한 것으로 정준하가 엄청 잘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 큰 소득이 아닐까. 이렇게 교정한 정준하의 발성은 이후 단체곡 "그래 우리 함께"까지 이어진다. 아마도 앞으로도 정준하는 이렇게 계속 부르지 않을까 싶다.
2. 정형돈, GD - 해볼라고
지난번 "바람났어"에 비하면 너무 대충 만들었다... 좀 신경 좀 쓰지.
그래도 정형돈의 랩은 좋다. 형돈이와 대준이 "안 좋을때 들으면 더 안 좋은 노래"에서도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하는 정현돈의 랩만 좋고 나머지 대부분의 데프콘 부분은 별로였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3. 유희열, 유재석 - Please don't go my girl
난 R&B를 한다길래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의 R&B처럼 코믹하게 풀어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리드 "이 밤의 끝을 잡고"같이 완전 정통 R&B로 풀어낼 줄은 몰랐다.
이번에 유희열은 왜 이리 신났는지, 열심히 만들어봤자 음원수익도 안 나오는 무한도전에 엄청난 공을 들였는데, 이 노래도 정말 잘 만들었다. 나중에 김조한 only 버전으로도 들어보고 싶다 ㅋㅋ
4. 프라이머리, 박명수 - I Got C
이번에 가장 흥행하는 음원이나 안타깝게도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프라이머리가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을 가장 민감하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뮤지션일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뮤지션 개인의 독특한 정체성이 느껴지지 않아서 무디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외국에 잘 나가는 음악을 깔아놓고 그 위에 적당히 쌓아올리는 식으로 만들어서 표절 논란이 있었던 모양인데, 만화로 치면 거의 트레이싱에 가까운 거라 표절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만 화성을 바꾸고 멜로디만 바꾸면 엄밀히 기술적으로 따져서 표절이 아니도록 회피할 수 있기 때문에 표절까지 가지는 않아서 좀 얍삽하고 치사하다고 할 순 있다.
이런 조립식 작법이 나쁘다고는 할 순 없지만 자기 색깔이 없다는 점에서 나는 매력을 느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이나믹 듀오도 그렇다. 오히려 CB Mass 시절에 커빈이 프로듀싱을 하던 시절에는 일말의 정체성이라도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외국에 잘나가는 스타일을 반주로 깔고 그 위에 적당히 랩만 입혀서 팔다보니 확 관심이 없어져 버렸다.
지나가는 얘기지만 최근 한국 예능계에 이런 베끼기가 성행한다. 영화에서도, 그대로 베끼면 표절이니까 아이디어나 플롯만 베낀다던가, 음악에서도 화성과 멜로디만 빼고 나머지 컨셉, 악기 구성, 사운드, 스타일, 이런 것들을 베낀다. 법적으로 민감한 것만 빼고, 예술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죄다 베낀다. 이거야 원. 90년대 대놓고 베끼기에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대학교때 레포트 베끼기 수준을 못 벗어난 것 같다. 차차 나아지겠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프라이머리에 대한 실망을 뒤로하고, 박명수를 보자면 의외로 갈수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 같아 놀랍다. 원래도 그렇게 못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에 연습을 안 하고 체력이 약한지라 라이브에 약했던 건 있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배철수가 박명수도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이라고 칭찬했다가 실시간 문자로 엄청 답글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사실 나도 조용히 동의하는 편이긴 했다. 그래도 무한도전을 8년이나 하다보니 이런저런 연습량이 쌓였는지 어째 점점 잘 부르게 되는 것 같다. 하긴 이젠 정준하도 얼마나 웃기는데, 박명수가 잘부르는 거야 그럴만도 하지. 시간이 무섭다.
5. 장미여관, 노홍철 - 오빠라고 불러다오
이번 가요제에 노력상을 준다면 장미여관에 줘야 하지 않을까. 방송에서 유희열도 언급했지만, 원래 자기 색깔까지 버려가면서 철저히 노홍철에게, 그리고 무한도전에게 맞춘 음악으로 정말 열심히 만든 것 같다.
장미여관이야 탑밴드로 떴지만, 무한도전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가 정말 절실하고 소중한 기회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정말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정말 스타덤에 오른 것 같다.
노홍철은 도대체 어디 갔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지만 그래도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박자를 하나도 안 틀리더라. 물론 그만큼 박자를 쉽게 만들어준 것도 있지만.
6. 장기하와 얼굴들, 하하 - 슈퍼 잡초맨
반면 장기하는 좀 힘을 빼고 편하게 간 것 같다. 멜로디의 밀도를 떨어뜨리고, 철저히 락페용 노는 음악으로 만들었다. 이런걸 보면 장기하는 정말 프로다. 처음부터 인디라는 느낌도 없긴 했지만.
이번에 재미있었던 건 하세가와 요헤이, 양평이 형이 화제가 되었던 것. 나야 뭐 옛날 "곱창전골" 시절의 "안녕하시므니까"부터 시작해서 최근 "미미 시스터즈"의 프로듀서까지 익숙한 분이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기타를 치기 시작한 건지, 또 무한도전에서 그 어색하고 쑥스러운 한국어로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세븐티 핑거즈는 7명, 70개의 손가락이라는 뜻도 있지만 70년대 음악이라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방송에는 안 나왔지만) 양평이형도 신중현, 산울림 등의 초창기 한국 사이키델릭 락이 좋아서 일부러 한국으로 온 거고, 그 점에서 장기하와 통하는 면이 있었을 것이다.
7. 보아, 길 - G.A.B.
GD에 이어 보아도 참 신경을 안 썼다. YG나 SM이나 왜 이리 힘을 뺐어, 실망. 앨범으로 치면 한 7번 트랙 쯤에, 팬들조차도 잘 안 들을듯한, 그냥 앨범 구성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음악 같은 느낌이다. 보아 3집 "서울의 빛" 정도. 그래도 SM인지라 사운드는 정말 트렌디하게 잘 뽑아냈다.
길은 원래 못했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웃기는데 정형돈도 3년, 정준하는 7년 걸렸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아이돌 풍의 안무라고 해서 기대했더니만 에잉 이게 뭐야 실망.
8. 유희열, 무한도전 - 그래, 우리 함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도 그렇지만, 유희열은 이렇게 마지막에 자기가 피아노 치고, 뒤에 스트링 쫙 깔고, 모두가 합창하는 마무리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9. 유희열, 유재석 - 댄스왕
아니 유희열이 히든 트랙으로 한 곡을 더 넣었다. 와 정말 돈도 안되는 음악에 정말 열심이다. 정말로 무한도전을 사랑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