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08/03/21 22:26(년/월/일 시:분)
나는 컴퓨터공학부에 다니고 있다. 이를 직역하면 Computer Engineering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할때 내 전공이 Computer Engineering이라고 하면 잘 못 알아듣더라. 미국에서는 컴퓨터'공학'이라는 말을 잘 안 쓴다. 대신에 컴퓨터'과학'(Computer Science)라고 많이 한다.
컴퓨터공학과 컴퓨터과학, 이 둘의 차이는 사실상 없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도 똑같고, 졸업하고 하는 일도 똑같다. 컴퓨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과학적으로 되어있고, 조금만 과학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도 전혀 동작하지 않는다. 그런 한편 기초과학과 달리 이론을 배우자마자 실제로 바로 적용할 수 있다. 과학인 동시에 공학이다. 이론과 실기가 따로 없고 동시에 나간다. 아주 이론적인 학문인 동시에, 아주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컴퓨터'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가? 나는 예전에 CMMR(Computer Music Modeling and Retrieval) 저널을 보면서 한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미국, 독일, 프랑스, 한국 등 세계의 논문이 실려 있었는데, 약간의 경향성이 보였다.
프랑스 논문: 이게 컴퓨터 논문인가 싶을 정도로, 인문과학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바칼로레아 때문인가? 물론 이 저널은 컴퓨터와 음악의 접점에 있으므로 그런 시각도 충분히 필요하다.
독일 논문: 이론만 파고, 실제 응용 부분은 언급이 거의 없다. 대단히 딱딱하고 일절 군더더기가 없다. 칸트, 헤겔이 나올만도 하다.
한국 논문: 이론 부분은 남의 논문 인용해서 쓰고, 실제 응용 부분만 집중적으로 판다. 실제 돌아가는 스크린샷을 첨부하는 것이 특징.
미국 논문: 모든 것의 짬뽕이다. 프랑스+독일+한국을 섞어놓은 것 같다.
여기서 한국의 경향을 보자면, 실제로 돌아가고 앞으로 어떤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는 실용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다루는 편이다. 보다보면 이게 논문인지 사업계획서인지 싶을 정도로 상업적인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는 논문도 있다. 물론 논리적으로 형식을 갖춰서 쓴다면 그 어떤 글도 논문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의 측면에서 '과학'보다는 '공학'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도, 어감이 실용적이고, 돈이 되는 것처럼 들려서가 아닐까? 과학자 하면 왠지 상아탑에만 웅크리고 앉아서 맨날 알 수 없는 실험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잘 모르는 느낌이잖아? 반면에 공학자라고 하면 어디 카센타에서라도 얼굴에 잔뜩 기름을 묻히며 열심히 일할 듯한 이미지가 있고.
그래서 컴퓨터 "공학"도라고 하면 어쩐지 열심히 기술을 배워서 나라를 위해 땀흘려 일할 일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실제로는 컴퓨터를 한다고 해서 땀이 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여전히 회사에서 사람들을 부리는 기본 컨셉은 "땀흘려" 일하게 만드는 컨셉인 것 같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공학"보다는 "과학"이 돈 되는 어감이 있어서 그렇게 쓰는게 아닐까. 이건 미국에 얼마 안 살아봐서 구체적인 예를 들기가 힘들지만, 그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