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2/12/31 00:36(년/월/일 시:분)
북유럽에 가서 느꼈다. 겨울의 항구도시 베르겐의 상점에서 정말 흉칙하게 생긴 트롤 인형을 보며, 반지의 제왕의 북유럽 신화가 그대로 보이는 듯 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길을 걸으면, 침엽수림 어딘가에서 트롤이 정말 걸어나올 듯 했다.
또 북유럽의 어두운 겨울 풍경을 보며,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이 그대로 보였다. 어떤 카메라 필터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맨눈에 보이는 풍경이 그냥 그랬다. 북유럽의 12월 오후 4시가 딱 그렇다. 밝은듯 하면서 어두운, 초현실적이었지만 충분히 현실적인 밝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빈센트 반 고흐의 독특한 색감도 어찌보면 자기가 보인대로 그린 건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압생트가 유행이었는데, 이 술은 색감을 이상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래서 반 고흐의 색감이 마치 포토샵에서 Hue를 살짝 밀어낸 것 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보통의 색감대로 보정해보니 대단해 평범해보였다.
http://www.visualnews.com/2011/12/30/was-van-gogh-colorblind/
WAS VAN GOGH COLORBLIND?
또 고흐의 구불구불한 선도 전형적인 난시로 보인다. 나도 난시가 심해서 안경을 벗고 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대단히 심하게 일그러져 보인다. 때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꾸물꾸물 피어오르게 보이고, 어떤 것은 복잡한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도 안경이 없었다면 고흐의 그림같은 세상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새삼 드는 생각이다. 어쩌면 인간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들은 그저 자기가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자기가 디디고 있는 땅을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미련한 생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부지런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싶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다. 최근 제임스 카메론이 자기 돈으로 심해를 직접 탐험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부자의 뻘짓일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본인의 창작을 위한 부지런한 노력일수도 있겠다.
http://biotechnology.tistory.com/1053
2012년 3월 제임스 카메론이 마리아나 해구의 챌린저 딥을 단독 탐사
우리가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그런 제약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면, 나는 그만큼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넓은 땅을 모험하며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현실적인 제약을 조금이나마 더 확장하고 싶다.
나는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으련다. 단순한 노력이나 성과에 매달리지도 않으련다. 더 크고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 더 많이 깊이 생각을 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