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8/02/08 06:35(년/월/일 시:분)
나는 요즘 음반이나 책을 사기가 매우 꺼려진다. 수백장의 CD와 그보다 많은 책을, 집에 놓을 공간도 없고, 가지고 다닐 수도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사고싶은 음반을 팔지도 않는다.
요즘 60~80년대 한국 사이키델릭 음악에 관심이 생기면서 인터넷으로 이것저것을 보고 있는데, 나는 김완선의 "리듬속의 그 춤을" 음반을 살 수 없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아니 김추자나 펄 시스터즈라면 60년대니까 이해할만 해. 그런데 김완선이나 민해경은 80년대잖아. 그런데도 파는데가 없어. 전혀 구할수가 없다.
집에서 나와보니 주변에 있던 음반가게도 다들 망했다. 음반을 사려면 교보문고 핫트랙스까지 가던가, 테크노마트 SKC 플라자를 가던가, 아니면 인터넷으로 주문하던가 해야 한다. 그러고보니 핫트랙스도 그렇고 대부분의 오프라인 음반매장이 온라인을 겸하고 있으니까, 결국 온라인 매장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불황이구나 싶었다.
그나마 파는 거라면 CD 10장짜리 신중현 박스 세트, 혹은 서태지 박스 세트. 무려 13~15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야 한다. 그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무거운 CD덩어리를 음악을 듣기 위해 사야 한다. MP3로 변환하면 1기가도 안 나오는 것을.
예를 들어 아이팟 클래식 160G에는 대략 1500~2000장의 음반이 들어간다.이건 음악 매니아도 만족할만한 음질(192~320kps)일때 얘기다. 음질을 128kps로 낮추면 4000장도 들어간다! 이걸 실재하는 CD나 LP로 가지고 있다면 방 하나를 통째로 써야 한다. 이사도 함부로 못 간다.
하지만 요즘은 그 많은게 아이팟 하나에 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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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음악감상실 '한울림'과 아이팟 클래식 160G |
http://www.xacdo.net/tt/index.php?pl=488
음악CD에서 iTunes MP3로 마이그레이션
이제와서 생각하니 음악을 듣기 위해 실제로 부피와 무게를 가지는 가지는 물체를 산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음반이나 책을 꾸준히 구입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게 한 5년만 넘어가도 버겁고, 10년만 넘어가도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진다. 불과 27살인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수십년씩 음반을 수집해온 중년이나 노년의 음악팬들은 과연 그걸 어떻게 다 짊어지고 살고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음반 시장의 쇠퇴는 당연하다. LP나 테이프나 CD나 할 것 없이, 현재의 MP3에 비교하면 너무 심하게 불편하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불편하다. 음질이나 아날로그적 감수성이나 하는게 무색할 정도로, MP3는 압도적으로 편리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역사적인 흐름으로 볼때, 음반시장이 쇠퇴하므로 전체적인 음악 산업도 쇠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음 그래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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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음반시장과 디지털 음악시장 규모 비교 |
http://cimio.net/315
디지털 음악 산업과 음반판매를 합하면 과거의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회복된 지금
두 그래프, 음반과 디지털 음악의 규모를 합치면, 음반시장의 호황기였던 1990년대 중반과 지금을 비교해도 현재 규모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물가가 올랐으니까 그대로인건 좀 마이너스 겠지만, 그래도 의외로, 건재하다.
음반시장은 몰락하지 않았다.
디지털로 이동했을 뿐이다.
구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 | 2004년 | 2005년 | 2006년 | 2007년(추정) |
음반시장 | 4,104 | 3,733 | 2,861 | 1,833 | 1,338 | 1,087 | 848 | 600∼700 |
디지털음악시장 | - | 911 | 1,328 | 1,811 | 2,112 | 2,621 | 3,500 | 3,700 |
무선(컬러링/벨소리) | - | 890 | 1,290 | 1,767 | 1,911 | 2,251 | 2,300 | 2,200 |
유선 | - | 21 | 38 | 44 | 201 | 370 | 1,200 | 1,500 |
총규모 | 4,104 | 4,644 | 4,189 | 3,644 | 3,450 | 3,708 | 4,384 | 4,400 |
http://it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285360
출처=디지털음악산업발전협의회, *표에서 총 시장규모는 음반시장과 디지털음악시장(무선+유선)만을 합한 수치입니다.
당연하다. 여전히 가수들은 노래를 부르고, 우리는 노래를 듣는다. 누군가는 가수가 되고, 가수 중 누군가는 돈을 번다. 여전히 음악은 돈이 되는 산업이다.
물론 요즘은 옛날처럼 진득하게 한시간씩 CD 한장이나 테이프 하나를 듣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30초씩 짤막하게 어디서 울리는 벨소리나 컬러링을 듣고 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시간을 듣던 30초를 듣던, 쓰는 돈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것.
그래프의 2000년을 주목하자. 그 시점만 해도 기존의 음반 시장은 그대로였고, 400억 규모의 새로운 디지털 시장이 "부가적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하지만 "부가수익" 정도일줄 알았던 디지털 매출액이 어느덧 음반을 압도하고 메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레코드 회사가 벨소리, 컬러링을 만만하게 보다가 통신사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셈이지.
그래서 요즘은 벨소리, 컬러링 등으로 고작 30초씩 음악을 짤막하게 듣는다. 예전처럼 진득하게 듣는 맛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도 원래 대중음악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나는 펄 시스터즈 "나팔바지"가 1분 30초밖에 안 되는데 충격을 받았다. "빗속의 여인"은 2분 39초다.
비틀즈(Beatles)도 그랬다. "The one" 앨범을 보자. 1번 트랙 "Love me do" 2분 21초, 2번 트랙 "From me to you" 1분 56초, 3번 트랙 "She loves you" 2분 21초. 물론 "Hey Jude"는 7분 4초로 길지만, 이건 한창 사이키델릭에 빠졌던 시절이니 예외적이다.
퀸(Queen)은 어떨까? "We will rock you" 2분 3초, "We are the champions" 3분 1초,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2분 44초. 물론 "Bohemian Rapsody"는 5분 58초로 길지만, 역시 이 노래도 퀸 치고 긴 편이다.
60-80년대만 해도 대중음악의 길이는 2분 내외였다. 길던 짧던, 좋은 노래는 좋고, 별로인 노래는 별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벨소리나 컬러링으로 중요 부분 30초만 듣는다고 해도, 그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30초만 들어도 좋은 노래는 좋고, 별로인 노래는 별로일 테니까.
결론. 음악산업의 미래는 1. 노래가 짧아지고 2. 음반 대신 디지털로 나오지만 3. 어쨌든, 어떤 형태로는 음악산업의 규모는 여전할 것이다.
이건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노래가 좋고 나쁘고는 음악장사가 잘 되고 안 되고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스타벅스에도 음악을 틀어야 하고, 롯데마트에도 음악을 틀어야 하고, 예능프로에도 음악을 깔아야 하고, 영화에도 깔아야 하고, 축구경기때 응원가로도 무언가 불러야 한다. 어쨌든 음악은 좋고 나쁨을 떠나서, 반드시 필요하다.
음반시장이 다 망해서 CD가 하나도 안 나와도, 아니 앞으로 MP3 마저도 망해서 아이팟도 아이튠즈도 안 팔리는 시대가 와도,
휴대폰을 걸고 받는데 1초도 기다릴 필요가 없어져서 더 이상 벨소리도 컬러링도 필요 없는 시대가 와도,
누군가는 노래를 듣고 싶어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를 위해 노래를 불러줄 것이다.
그러니까, 팔리겠지. 어떤 형태로건.
(문제는 어떤 형태가 되느냐 하는 거겠지만)
ps. KTF 도시락을 써본 소감으로는... 한국은 "구매"가 아니라 "대여" 쪽으로 가는 것 같다. 음악을 소유하는게 아니라 한달씩 빌려서 듣는다... 어떤 의미로는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보다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아이팟에 수십~수백기가씩 저장해놓고 듣는 것도 귀찮긴 귀찮다. 앞으로는 이 대여 쪽을 잘 정비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이거 잘만 하면 단순한 "스토어"가 아니라 "매스미디어"가 될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