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의 이해
07/10/25 13:00(년/월/일 시:분)
뉴욕은 다른 도시와 달리 "뉴요커"라는 말이 있다. 도시가 크기야 LA도 크지만 LAer라는 말은 없잖아. 그만큼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도시와 달리 확연히 구분되는 캐릭터가 있다.
내 얘기를 해보자. 나는 기후 좋고 땅값 비싸고 사람들 잘 사는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6개월을 살았다. 집 앞에는 야외 수영장과 자쿠지(야외 월풀)가 있고, 길거리는 항상 깨끗하고 잔디도 잘 정돈되어 있고 사람들은 여유롭고 친절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뉴욕에 오자, 나는 이게 같은 나라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문화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퉁명스럽고, 어딜 가나 요금을 매기고, 사소한 것도 안 도와주고, 길거리는 쓰레기로 널렸고, 비온 후에는 정체모를 검은 물이 철벅철벅 흐르고, 배수구에서는 정체모를 더운 증기가 뿜어 나오고...
기숙사라고 도착한 건물은 지은지 100년도 더 돼 보였다. 우중충하고 더럽고 녹슬었고. 한국 같았으면 당장에 재개발을 할텐데. 지하에는 주차장도 없고, 중앙 집중 냉방도 없어서 다들 창문으로 다닥다닥 에어콘을 내놓고 있었고, 방에서는 휴대폰도 안 터지고, TV도 안 나오고, 텅 빈 바닥에 먼지만 뒹굴고 있었다. 이게 어디가 월세 80만원 짜리야!!
일단 빨래는 해야지 싶어서 지하 빨래방으로 내려갔다. 탈수와 건조를 마치고 밤 12시 10분에 내려가는데, 막 경비아저씨가 문을 잠그고 있는거야. 알고보니 밤 12시~ 새벽 6시에는 빨래방을 잠근다더라. 그래서 나는 잠깐만 열어달라고 그랬지. 그랬더니 안된다네.
나는 사정을 했다. 막 비행기 타고 와서 잘 몰랐다. 방금 잠궜는데 잠깐만 열어주면 되지 않느냐. 금방 다 마른 빨래를 가지고 오겠다. 그랬더니 절대로 안 된다는 거야. 그러면서 갑자기 내 이름도 묻고 사정도 차근차근 다 들어주면서, 만나서 반갑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하면서 나를 로비로 끌고 올라오더라.
나는 화목한 분위기로 잘 얘기하면서 끌려오고 나니, 허탈했다. 아니 이게뭐야. 말은 친근하게 잘 해놓고, 결국 끝내 열어주지는 않았잖아. 겉으로는 친절한데 뭘 해주는 건 없네. 한국 같았으면 반대였을거 아니야. 막 열어달라고 사정했다면, 겉으로는 화를 내면서 잠깐 열어줬겠지.
하긴 뉴욕 같은 험한 곳에서 함부로 화를 냈다가는, 칼 맞을수도 있을테니까, 생글생글 웃으면서 잘 달래야 하겠지. 실제로 내가 도착한지 며칠만에 기숙사 앞 지하철역에서 누가 칼에 찔리는 사건이 있었지.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경찰이랑 구급차랑 잔뜩 있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http://subwayblogger.com/2007/09/12/110th-street-columbia-university-area-multiple-stabbing/
110th Street (Columbia University area) Multiple Stabbing
September 12, 2007
하여간 이렇게 범죄가 성행하는 곳이다보니, 경비원으로서도 함부로 학생들의 말을 들어줄 수도 없겠고, 그렇다고 함부로 화를 냈다가는 언제 칼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내 경우처럼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거겠지.
그 후로도 정말 사소한 생활 문제, 예를 들면 열쇠를 깜빡 놓고 나와서 문을 열어달라거나, 방에 전화를 놓는다거나, 케이블 TV를 신청하거나, 부엌을 쓰는 문제 등으로 구질구질하게 충돌이 있었다. 물론 언제나 목소리를 높이는 쪽은 내 쪽이었고, 그들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아무 것도 안 들어줬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에 반 편성 고사를 보러 들어가니까, 시험료로 20달러를 내래. 사전에 공지도 없었고, 어째서 이게 수업료에 포함이 안 된건지 모르겠다. 아니 한 학기에 6천달러를 넘게 내는데, 고작 20달러짜리 반배치고사가 왜 포함이 안 된거지? 중간에 떼먹는 거 아니야? 왜 오자마자 돈을 내래?
시험을 보고 나온 뉴욕의 길거리는 비가 온 후라 검은 구정물이 철벅철벅하게 곳곳에 고여 있었다. 사람들은 횡단보도 신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위험하게 도로를 건너고 있었고, 그 위로 100년 묵은 뉴욕 지하철이 시커멓게 더러운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빌딩은 곳곳에 녹이 슬었고, 녹이 슬은 위로 페인트를 지저분하게 덧칠해버렸다. 녹물이 뚝뚝 떨어지는 선반에는 아예 종유석 같은 것이 자라 있었고, 그 작은 틈으로 쏙 지나가는 것은 다람쥐... 가 아니라 그냥 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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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묵은 뉴욕 지하철 내부 |
그렇게 3개월이 지났다. 이젠 "섹스 앤 더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뉴욕 거리도 어디쯤인지 눈에 익을 정도다. 하지만 정작 영화나 TV의 화려한 뉴욕의 모습은 여기에는 없다. 물론 명품 핸드백도 많이들 가지고 다니지만, 이제는 이게 루이비통 스피디인지 시장바구닌지 구별이 안 갈 정도라니까. 아니 진짜로 수퍼에서 시장바구니로 쓴다니까. 그러니까 이젠 그게 내 눈엔 더 이상 화려하게 보이지도 않고 별로 멋있지도 않다.
그런가 하면 내가 있는 콜럼비아 대학교에서는 한 흑인 교수 문에 KKK단의 상징인 교수형 밧줄(noose)가 걸려있지 않나, 이틀 후에는 화장실에 나치 상징(Hakenkreuz)을 그려놓질 않나... 그것도 내가 공부하는 건물에서. 참 살벌한 동네다.
http://www.foxnews.com/story/0,2933,301141,00.html
Department of Justice Investigates Columbia University Noose Incident
한편 나는 어느 늦은 밤에 할렘(Harlem)을 지나가다가 이런 일도 있었어. 갑자기 내 앞으로 어떤 흑인이 펄쩍 뛰어오더니, 랩을 하기 시작하는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부리나케 도망을 갔지. 아니 모르겠어, 그게 진짜 위협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야심한 밤에 할렘가를 지나가는 아시아 사람이 신기해서 장난을 친건지. 하여간 너무너무 무서웠다.
아, 돌아가고 싶다... 신기하게도 내가 그리운 곳은 한국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얼바인이었다. 그 깨끗하고 살기 좋았던 동네... 수영장과 자쿠지와 골프 코스가 딸린 부자 동네...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 혹은 미국 남부에 가지고 있는 아련한 노스텔지어(향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캘리포니아에 산불이 5일째 계속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office_id=096&article_id=0000054317
닷새째 이어지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일단 한 고비는 넘어서고 있습니다만, 대피했다가 돌아온 주민들을 맞은 건 잿더미 뿐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금 밖이 뿌옇게 연기로 가득해서 밖에 나가기는 힘들다고 한다. 미국 방송에서는 역시 자본주의의 나라답게 보험회사에 막대한 타격이 갈 거라고 하는군. 하여간 그 공기좋고 날씨좋고 밖에서 놀기좋은 동네마저도 산불때문에 연기로 가득차 버리다니.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