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7/08/21 06:26(년/월/일 시:분)
요즘에는 어학원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나야 소설을 한두편 써본게 아니라 방심하고 즐겁게 썼더니, 의외로 정석 작법에 따른 지적을 많이 받고 좌절하는 중.
정석 작법은 발단-전개-절정-해소 로 대표되는 긴장,갈등의 흐름을 만드는 것. 이것도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확실한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면 된다. 예를 들어 사랑 이야기라면 남녀간의 사랑이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애매한 상태를 계속 고조시키면 되고, 추격극이라면 잡힐지 안 잡힐지 아슬아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된다. 그렇게 긴장과 갈등을 조였다 풀었다 반복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우르르 한꺼번에 무너트리면 "재미"가 생기는 건데.
http://xacdo.net/tt/index.php?pl=248
재미란 무엇인가 - 재미의 경계
작품의 재미란 '축적된 긴장의 해소를 이해함에 따르는 감정적 흥분'
문제는 내가 이 긴장을 축적하는 것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 글을 쓰다보면 내가 답답해서 못 견딘다. 나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고, 답이 뻔히 보이는 상태에서 주인공들이 가슴을 졸이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감당하기가 힘들다.
http://xacdo.net/tt/index.php?pl=588
주인공이 잘 안되는 꼴을 도저히 눈뜨고 못 봐주겠다
예를 들면 유리 가면에서 마야와 아유미 중에 누가 홍천녀가 될지 가슴졸이기 싫고, 축구 한일전에서 막상막하로 대결하면서 누가 이길지 확실하지 않게 오래 끄는게 싫다. 물론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연속하는 편이 더 재미있긴 하지만
재미있으려면 주인공이 그만큼 고통을 겪어야 하잖아.
긴장/갈등을 축적한다는 건 그만큼 주인공이 깊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얘기다. 나중에 해소할때 낙폭이 커야 재미가 커지거든. 그러므로 작가는 될 수 있는 한 주인공에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생을 시켜야 하는데.
무한도전도 똑같다. 김태호 PD가 6명을 괴롭힐수록 재미가 있다. 그들이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면 그 자체가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작진은 그들을 가능한 한 많이 괴롭힐 필요가 있다.
작가의 입장도 똑같다. 작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주인공을 있는 힘껏 괴롭혀야 한다. 고통의 바다 속으로 하염없이 끌어들여야 한다. 나중에 잘되든 안 되던, 그 결말의 반대 방향으로 최대한 잡아당겼다가 한 순간에 놓아버려야 한다.
나는 그 과정을 견디기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긴장/갈등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