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7/05/07 15:37(년/월/일 시:분)
병이 "도진다"는 말이 있다. 한번 다치면 신기하게도 몸이 기억하고 있다가, 다 나은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다시 그 부분이 욱신욱신하고 아픈 것을 말한다. 작년에 김미기 교수님께 니체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도 같은 걸 겪어봤다는데
한번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심하게 넘어져서 몇 달을 고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후로 매년 그 다친 즈음이 되면 다시 다친 것도 아닌데 발목이 욱신욱신하고 아픈 것이었다. 병원을 가 봐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통증만이 매년 같은 시기에 되풀이 됐다. 이것을 나이든 어르신께 물어봤더니 "그걸 병이 도진다고 하는거야"라고 가르쳐주셨다고 한다.
즉 병이 도진다는 것은, 아마도 그 통증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에스컬레이터를 탈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좀 더 조심하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아마도 인간이 거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뇌가 1년 중의 봄 쯤에 다친 것으로 조건이 잘못 설정되어서, 1년 중에 봄이 돌아올때마다 뇌에서 그 발목 부위에 경고를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때론 우리 뇌는 잘못된 조건을 연결시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 - 상실의 시대"에 보면 주인공은 비행기에서 나오는 "비틀즈 - 노르웨이 숲" 노래를 듣고 옛날 생각이 나서 일시적인 호흡곤란을 겪는다. 정작 그때 그 여자와의 기억에서 "노르웨이의 숲" 노래는 정말 사소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런 사소한 것이 아픈 기억과 잘못 연결이 되어서, 후에 별 상관도 없는 "노르웨이의 숲"을 들을 때마다 호흡곤란을 겪는 것이다.
가수 이승환도 발톱을 깎다가 눈물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 나이 마흔 넘어서 어렵게 한 결혼, 그때만 해도 발톱을 깍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혼한 후로 혼자서 집에서 발톱을 깎다보니 그 발톱깎는 사소한 것과 이혼의 아픈 기억이 잘못 연결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병이 도진다. 어떤 사람은 1년 중 봄이 돌아올때마다, 또 어떤 사람은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노래가 나올 때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히 발톱을 깎을 때마다 병이 도진다. 지금은 완전히 나아서 아무런 통증도 없는 부위에, 순전히 뇌 속의 기억으로만 동작하는 통증이 다시 찾아온다. 주기적으로, 때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통증이 돌아온다. 상처는 사라지고 통증만이 남는다.
병이 도진다, 기억이 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