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들 - 스토리
06/08/19 01:58(년/월/일 시: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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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ek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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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보이스웨어 / BGM: Energy Flow - 사카모토 류이치
하이네켄, 선명한 초록색의 하이네켄.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초록색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편의점 냉장고의 항상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는 모습으로 초록색의 매력을 뿜어대고 있는 하이네켄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새콤한 매실 맛이라도 날 듯한 초록색, 풋사과의 알싸한 맛이라도 날 듯한 초록색, 저 푸른 초원의 넘실대는 자연의 풍미를 가득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선명한 초록색은, 편의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지만 정말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성년자였다. 미성년자는 맥주를 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저 초록색 하이네켄을 마셔보고 싶은걸. 하지만 미성년자라서 안 돼. 그치만 먹고 싶은걸. 하지만 안 돼. 편의점을 들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편의점을 들르면서 나는 항상 먼발치에서 하이네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유리 진열장 너머로 선명한 초록색을 내뿜는 하이네켄, 아아 나는 아직 너를 마실 수 없어.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는걸. 내가 성인이 되는 날 너를 따 마셔줄께. 조금만 더 참아줘.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하이네켄을 마실 수 없었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절에 누가 하이네켄같이 비싼 수입 맥주를 마실 수 있겠는가. 맥주를 마신다 해도 다들 치킨과 생맥주를 마실 뿐이었다. 여전히 하이네켄은 유리 진열장 너머 차가운 냉장고에 갇혀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사실 언제든 저 굳게 닫힌 냉장고 문을 열고 너를 꺼내 따먹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수입 맥주라는 면보다, 편의점에서 술을 사먹는다는 건 나 같은 모범생에게는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나는 아직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거나 볼링을 치면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술 먹고 오바이트를 해본 적도 없었고, 필름이 끊긴 일도 당연하지만 없었다. 그런 건전한 나에게 수입 맥주 하이네켄은 너무도 사치였다.
선명한 초록색의 하이네켄, 초록색 매실 같은, 초록색 풋사과 같은, 초록색 초원의 넘실대는 대자연의 풍미를 지닌 달콤새콤 알싸한 하이네켄. 때때로 나는 멍하니 서서 하이네켄만 생각했다. 한 번도 마셔본 적도 없으면서 항상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 나도 하이네켄을 마셔봤으면 좋겠다…. 편의점에 갈 때마다 저 먼발치에서 진열장 너머로 하이네켄의 선명한 초록색이 보이면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몇 년째야. 처음에는 성인이 아니라서 못 마시고, 이제는 남의 눈이 두려워 마시지 못하다니. 나는 하이네켄을 정말로 마시고 싶은데 왜 세상은 우리를 갈라놓는 거야! 나는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흐린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그날따라 편의점 앞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마셔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굳게 닫힌 진열장을 열고 차가운 냉기가 서린 냉장고 안에 가장 앞에서 선명한 초록색을 뿜어대고 있는 하이네켄 한 캔을 집어들었다. 아직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았다. 이거 낮술이잖아?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굳게 쥐었다.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어. 이젠 나도 대학교 3학년이야. 이제 낮술 정도는 마셔도 돼. 누가 나를 보고 뭐라고 하겠어? 그래 나는 하이네켄을 마신다, 어쩔래!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몰라.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되던 나의 사랑이 이제서야 이루어지는구나. 나는 한 캔에 얼마 하는지도 모른 채 하이네켄을 카운터에 퉁명스럽게 내려놓았고, 캐셔는 별 감흥도 없이 하이네켄의 바코드를 찍었다. 예상보다 약간 비싼 금액이 찍혀 나오자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돈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에 상관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하이네켄을 집어들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먹어야 하나. 하긴 상관없잖아? 될 대로 돼라지!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하이네켄의 뚜껑을 땄다. 날카로운 금속의 마찰음이 잠시 들리더니 하이네켄의 입술이 뻥 하고 뚫렸다. 나는 그 구멍에 입술을 포개고 있는 힘을 다 하여 안의 내용물을 빨아들였다. 눈을 감았다. 나의 첫사랑과의 첫 키스였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하이네켄을 꼭 껴안으며 좀 더 힘을 내어 쭈욱 차갑고 쓰고 거품이 나고 지린내가 나는 알 수 없는 액체를 마구 빨아들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윽 써…"
그렇다. 하이네켄은 썼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하이네켄은 맥주 중에서도 비교적 쓴 편에 속했다. 내가 상상했던 초록색 매실 맛이라던가 풋사과의 단맛이라던가 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많은 양을 마신 터라 하마터면 울컥 뱉어버릴 뻔했다. 겨우 참고 꿀꺽 목구멍으로 넘겼다. 위장에 들어간 후에도 그 거북한 쓴맛은 여전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게 이런 거라니. 나는 실망했다.
어찌됐건 비싼 돈 주고 샀으니까 다 마시긴 해야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쭉쭉 빨아대며 굿바이 키스를 날린 나는, 캔을 적당히 구겨 병/캔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를 했다. 입술이 따진 채로 나에게 안의 내용물이 완전히 빨린 하이네켄은 그렇게 자신의 1회용 이용가치를 다 한 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나는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고 그저 배신감만 느낄 뿐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쓴맛이었을 줄이야.
그렇게 하이네켄에 대한 나의 첫사랑은 끝이 났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참 바보같은 짓거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안 2002년 8월
집필 2003년 4월 18일
맞춤법 검사 2006년 8월 19일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bungle5/120022267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