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영상
06/06/29 08:19(년/월/일 시:분)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 1999)
각본: 찰리 카프먼 Charlie Kaufman (이터널 선샤인, 어댑테이션, 컨페션)
주연: 존 쿠삭(크레익), 카메론 디아즈(로티), 캐서린 키너(맥신), 존 말코비치
감독: 스파이크 존즈 Spike Jonze (뮤직비디오 감독, MTV 프로듀서)
112분. 예산 1300만 달러. 수익 2200만 달러.
줄거리 (참고로 이 영화는 내용 다 알고 봐도 상관없다)
크레익은 인기 없는 인형사다. 일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임시로 서류정리 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우연히 존 말코비치라는 유명 배우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고, 15분 동안 말코비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이용해 돈을 번다. 그런데 크레익은 인형사라서 인형을 조종하듯 말코비치를 조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코비치의 유명세를 이용해 유명한 인형사가 된다.
한편 애완동물 가게를 운영하는 크레익의 부인 로티는, 크레익의 동업자 맥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크레익도 로티도 모두 맥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맥신은 크레익을 사랑하지 않고, 로티는 말코비치 안에 들어 있을 때만 사랑한다. 맥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크레익은 로티를 질투하고, 총으로 위협하여 로티 대신 말코비치 안으로 들어가 맥신과 사랑을 한다. 로티는 맥신에게 이를 폭로하지만, 크레익은 말코비치를 조종할 수 있다는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맥신은 로티를 버리고 크레익을 선택한다.
버림받은 로티는 크레익이 일하는 회사 사장인 레스터 박사에게 놀라운 사실을 듣는다. 그것은 말코비치의 머릿속에는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있으며, 그 통로가 아이에게 상속되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머릿속에서 자아를 가지고 머물러있으면 감옥처럼 갇히게 되지만, 자아를 버리고 머무르면 흡수되지 않고 통로를 옮겨 다니며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래서 레스터 박사와 친구들은 세대를 넘어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크레익이 의지를 가지고 말코비치를 조종하기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스터 박사 일행은 맥신을 납치하고 크레익이 말코비치에서 나갈 것을 요구한다. 고민 끝에 크레익은 맥신을 위해 말코비치에서 나가지만, 맥신은 크레익을 버리고 로티를 선택한다. 버림받은 크레익은 다시 통로로 들어가지만, 말코비치 안에는 레스터 박사 일행이 들어갔기 때문에, 크레익은 말코비치의 아이의 몸으로 들어가 갇히고 만다. 그 후로 로티와 맥신은 사이좋게 말코비치의 아이를 키우지만, 그 아이의 머릿속에 크레익이 갇혀 있다는 것은 모른다.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영화다.
존 말코비치가 누군가?
이 영화는 '존 말코비치'라는 실명의 배우를 소재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영화사에서는 "말코비치를 섭외하면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고, 존 말코비치 본인이 의외로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기 때문에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여기에는 스파이크 존즈의 와이프가 영화 '대부'의 감독 딸이라는 점이 작용했다고도 한다. 하여튼 여기서 우리는 존 말코비치가 누군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존 말코비치는 40대의 중견 배우로, 특별한 히트작은 없지만 탄탄한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악역 전문 연기파 배우다.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해서 지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연예인이라기보다는 연기자이며, 인기보다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유인촌(전원일기, 역사스페셜), 정진영(왕의 남자의 왕역)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재미는 그런 엄숙한 배우인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서 자아가 붕괴되는 과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결코 쉽지 않은 연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소화해내는 걸 보면 역시 뛰어난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존 말코비치라는 배우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객은 이 영화의 재미를 상당 부분 깎아먹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이입이 잘 안된다면, 존 말코비치를 유인촌이나 정진영이라고 생각하며 보자.
왜 하필 존 말코비치가 되고 싶어 할까?
크레익은 못난 인간이다. 인형극도 실패하고, 맥신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고, 로티와의 결혼 생활도 실패한다. 하지만 인형을 조종할 때 그는 인형극 안에서는 자유롭다. 현실 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맥신과의 사랑도 인형극 안에서는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크레익은 말코비치 안에서 자유롭다. 크레익에게는 없던 명예와 능력이 말코비치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존 말코비치는 이상적인 존재다. 그런 말코비치를 크레익은 인형처럼 조종하는 것이다.
크레익의 부인 로티도 마찬가지다. 결혼 생활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던 그녀는, 존 말코비치의 단단하고 섹시한 몸 안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쾌감을 얻는다. 그래서 존 말코비치의 몸 안에서 맥신을 사랑하지만, 맥신은 로티를 존 말코비치 안에 있을 때만 사랑할 뿐, 평범한 로티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존 말코비치의 몸을 탐하게 된다.
존 말코비치 안에서는 사랑이 이루어진다. 똑같은 인형극을 해도 존 말코비치의 이름으로 하면 유명해질 수 있다. 존 말코비치 안에서는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존 말코비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렇다면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에 크레익이 들어가 말코비치를 조종한다면, 이 사람을 말코비치로 봐야 할까, 아니면 크레익으로 봐야 할까? 실질적인 의지는 크레익에게 있으므로 크레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행동은 말코비치의 과거 명예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말코비치로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크레익은 맥신이 돈을 벌기 위해 이용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므로, 맥신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불명확한 자아의 경계는 레스터 박사에 와서 더욱 복잡해진다. 레스터 박사 또한 말코비치 같은 몸이라, 실제 머릿속에는 머독 선장이 있다. 머독 선장은 레스터 박사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고, 레스터 박사는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말코비치는 자신의 딸인 에밀리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에밀리는 누구인가? 말코비치? 레스터 박사? 머독 선장?
사람도 동물이다
크레익은 맥신과의 첫 만남에서 맥신의 이름을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알아맞춘다. 그것은 맥신의 눈치를 보며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나열하여, 맥신의 표정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순간의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이름을 맞추는 것이다. 존 쿠삭의 뛰어난 연기로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이다.
이것은 대단해 보이지만, 실은 "숫자 계산하는 말" 사기에서 이용했던 방법이다. 동물에 불과한 말에게 "사 더하기 오" 라고 말하면 말은 말발굽을 아홉 번 두드리고 멈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이 숫자 계산을 할 줄 안다고 신기해했는데, 실은 말이 주인 눈치를 보면서 발을 구르다가 주인의 표정이 변하는 시점에서 멈춘 것뿐이었다.
또한 애완동물 가게를 운영하는 로티의 경우, 침팬지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며, 이구아나도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는다. 남편 크레익의 질투 때문에 원숭이와 같은 우리에 갇히며, 거기서 도망치게 도와주는 것은 다름 아닌 원숭이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며, 결국에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렇듯 이 영화는 어떤 형식에 고정되지 않고 기존의 틀을 부수고 있다. 어떤 화끈한 결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용도 갈피를 잡기 힘들고, 장르를 정확히 구분하기도 힘들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데도 그 유명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소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존 말코비치라는 실명 배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보통의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면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포스트 모더니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 조차도 뛰어넘은 시대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영화가 다시 나와도 더 이상 파격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1999년 한창 세계가 세기말적 광풍에 빠져 있을때 그 사이를 틈타 나왔던 어느 획기적인 영화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ps.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프먼은 2007년에 다시 뭉친다고 하니까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