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6/04/16 13:54(년/월/일 시:분)
오늘 문득,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존재는 자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자연스럽다, 친환경적이다 하는 것들 보면 인간에게 불편한 것들이잖아요. 그쪽이 더 거칠고, 불편하고, 손이 많이 들고, 춥고, 피곤하고, 재미 없고. 인간이 편하고자 하는 방향을 거스르는 것들이죠.
뭐 그래서 자연을 이용한 SM도 있습니다. 11분이라는 소설에 나오죠. 추운 겨울에 옷을 약간 얇게 입고 맨발로 산책하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큰 고통을 줄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인간은 벌거벗고 태어났는데, 맨 몸으로는 단 한시간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연약한 피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정말 이 자연이라는 것은, 우주라는 것은 얼마나 인간에게 가혹한가 하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우주가 가혹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고 알려줘 봐야 좋은 소리 못 듣는 법이다.’ - 커트 보네거트
아니 우리 인간은 서로 도우고 살잖아요. 장애인을 예로 들면, 선천적으로 장애인으로 태어나도 어느 정도 살 수 있게 정부에서 보조금도 지급하고, 법으로 보호도 하고, 물론 부족한 점은 있지만 인간으로서 대우해주는 그런게 있잖아요.
반면 자연은 어떻습니까. 장애인으로 태어나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뻔히 알면서도, 장애인이 태어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자연이잖아요. 분명히 100명에 한명 꼴로, 2000명의 한명 꼴로, 만명에 한명 꼴로. 지금도 꾸준히 자연스럽게 우주의 법칙을 따라 장애인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 태어나고 있습니다. 가혹하게도 말이죠.
만약 인간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렇게 반인륜적인 짓은 차마 못하겠죠.
어느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녁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하늘은 무슨 책으로 공부를 했길래 저토록 아름다운 색깔을 내는 걸까? 단순히 랜덤에 불과한 것을 나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뿐일까?
아름다운 하늘을 볼 때마다, 봄이면 새록새록 돋는 새싹과 꽃들을 볼 때마다, 야 이런 복잡하고 기기묘묘한 규칙을 가진 것들이 과연 랜덤하게 이루어진 것이 맞을까, 사실은 자연이나 우주에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어서 이런 걸 다 프로그래밍하고 설계해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그런 신이 있다면, 왜 이렇게 세상을 가혹하게 만들었나 꼭 한번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에 나오는 여호화 하나님도 가혹한 신입니다. 분노하는 신이고 질투하는 신이고, 잘못하면 무시무시한 벌을 내리고, 때론 별 잘못을 안 해도 단순히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 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벌로 보입니다. 다 잘못한게 있어서 벌을 받는 거야. 겨울이면 손이 트고 갈라지는 약한 피부를 가진 것도 다 내가 잘못이 있어서 그런 거고, 관절염이 생기고 척추 디스크가 생기고 암에 걸려서 밤마다 잠을 자기도 힘들 정도로 괴로운 것도 다 내가 잘못이 있어서 벌을 받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할 것도 같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라는 소설에 보면 고문을 피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고통을 견디기 힘들면, 자기 머리속에 집을 상상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피하면 된답니다. 지금은 내가 온 몸이 묶여서 가혹한 채찍질을 당하고 있지만, 머리속으로는 아주 안락하고 편안한 집 안에서 쇼파에 누워서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낄낄대고 있다, 이렇게 상상하는 거죠.
상상이 구체화될수록 환상은 견고해집니다. 쇼파는 고급 가죽쇼파에, TV는 LG에서 새로 나온 타임머신 TV로. 화이트 와인과 훈제 연어를 곁들이며, 방 안에는 뱅앤 올프슨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 황홀한 저녁. 그렇게 머리 속의 환상으로 도피하면, 아무리 심한 고문을 당해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인간은 이런 환상의 힘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머리 속에서 견고한 환상의 집을 지으며 도피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세상이 가혹하고, 나는 사실 쓸모없는 인간으로 세상에 던져졌을 뿐이고, 인생은 짧고 도망칠수도 없고, 죽으면 그걸로 끝이고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렇게 믿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교황은 죽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과연 교황이 행복했을까요? 저는 교황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거짓말로 세상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이라는, 사랑이라는, 평화라는 환상의 집을 그들의 머리속에 견고하게 지을 수 있다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오는 날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랑을 하며 지낼 날도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는 것 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나잖아요. 저는 사랑과 평화를 온 세상에 뿌리며 살고 싶어요.
ps. 요즘엔 왠지 종교적 체험을 해보고 싶어요. 방학때 단식원이라도 들어가볼까 생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