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6/04/01 14:05(년/월/일 시:분)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잘 생긴 사람도 있고 못 생긴 사람도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뜯어고쳐도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일 뿐이다. 사회적으로 못 생긴 병신들을 보호하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못 생기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잘 생긴 사람들이 미리 들어놓는 보험 같은 것이지, 실제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잘 생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못 생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구분되어 있다.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산다.
간혹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봤자 잘난 사람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가 있다. 그녀는 양 손을 합쳐 네 손가락밖에 되지 않는 기형아로 태어났다. 배트맨에 나오는 펭귄맨보다 더 적은 손가락 숫자다. 그런데도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고 다섯 손가락을 가진 사람도 치기 어려운 쇼팽의 즉흥환상곡 피아노 연주를 해냈다.
하지만 내게 그 연주는 한편의 서커스 묘기 쑈 정도로 보였다. 마치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며 엉성하게 악기 연주를 하는 것 같았다. 희아의 피아노 연주는 솔직히 형편없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음악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희아처럼 원래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뜻하지 않게, 클론의 강원래처럼 갑자기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잘 생긴 사람도 언제나 못 생긴 사람이 될 수 있다. 억울하게도.
잘 생긴 사람으로서도 특히 억울한 점은, 한번 못생겨지면 다시는 잘생긴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성공해서 강원래를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젊은 몸뚱아리를 격렬하게 움직이며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치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반대 방향은 불가능하다. 잘 생긴 사람도 언제나 못 생긴 사람이 될 수 있는 반면, 못 생긴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생긴 사람이 될 수 없다. 이건 정말 불공평한 일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게 원래 그렇다.
이런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받아들이고 인생 뭐 있어?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못 생긴 사람은 못 생긴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올바른 길일 것이다.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아둥바둥 할 수도 있겠고, 어떻게든 잘 생긴 사람의 길에 끼어들려고 아둥바둥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돌아오는 것은 못 생긴 사람으로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깨닫는 것 뿐일 것이다.
물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얼마든지 자기의 길을 벗어나서 다른 길을 걸을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일 뿐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그저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권리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하늘이 정해준 올바른 운명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아무리 그 운명이 올바른 길이더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고 어리석은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말로, 못생긴 사람을 위한 인생일까?
운명이라는 네비게이션이 정해준 최적경로를 따라가기도 벅찬 것이 인생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