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들 - 스토리
10/08/11 12:02(년/월/일 시:분)
그러니까 사랑을 처음 발명한 것은 16세기 초 였다. 그 전까지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단순히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했고, 섹스를 했고, 아이를 키웠다. 가끔 설레는 마음으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입맞춤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깐 꿈을 꾸듯, 돌부리에 채여서 넘어지듯, 간혹 일어나는 불상사였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21세기에 들어서 사랑도 변화를 맞이했다. 그 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놀라운 사랑,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둘 만의 비밀스러운 사랑, 사랑이라는 말에 차마 다 담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개념들이 사랑으로 흡수됐다. 그러면서 사랑은 팽창을 거듭하다가 그만 뻥, 터지고 말았다.
그 후로 사랑은 오랜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사람들은 사랑을 천대했으며, 매일 버러지 같은 신세로 빌어먹으며 생을 연명해야 했다. 여름이면 곰팡이가 피는 반지하 월세방에서, 21세기의 찬란했던 사랑의 나날을 떠올리며 눈물로 하루를 지새웠다. 눈물을 흘리다가 술을 마시다가, 혹은 누군가를 탓하기도 하다가 뻥 뚫린 가슴으로 때론 피가 나도록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는 우연히 길에서 양복을 보았다. 무척이나 허름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윤이 반질반질 나는 양복을 단돈 5만원에 팔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싸구려 양복을 사서 매일 입기 시작했다. 수퍼에 갈 때도 양복을 입었고, PC방에 갈 때도 양복을 입었다. 심지어는 밤에 잘 때도 양복에 벨트에 구두까지 꼭 갖춰입고 잤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랑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복입은 모습이 섹시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양복은 믿음직스러움, 든든함, 폭신하게 안기고 싶은 편안함을 주었다. 사람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녀에게 안겨서, 맨질맨질한 양복에 두 뺨을 부비며 보풀을 일으켰다.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그녀는 기쁜 마음에 바나나우유를 먹기도 하고, 신포 닭강정에 칠성 사이다를 먹기도 했다. 그녀가 꺼억 하고 트림을 하면 사람들은 향긋한 바나나향 양념통닭향 칠성사이다의 레몬라임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사랑의 향기를 킁킁 맡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명동 거리에서 사랑의 향기를 맡는 광경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그것이 벌써 2333년 7월의 일이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향기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그리워했고, 사랑에 아파했고, 사랑에 못이겨 기념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매년 여름이면 사랑 전국 체전이 열렸고, KBS에서는 사랑의 리퀘스트를 방송했다. 그러던 것도 6만 년이 지나자 사랑의 열기는 크게 사그러들었다.
사랑을 기억하는 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 홀연히 사랑이 돌아왔다. 그녀는 무척이나 마르고 초연한 얼굴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뿌리러 왔다고 말했다. 사랑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끈적끈적한 가루로 자신을 부수어 뿌렸다. 사랑의 가루가 온 세상에 퍼지자 사람들은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사랑의 가루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의 암흑물질에까지 이르렀다. 암흑물질은 훗날 사랑을 추억하며 "그녀의 가루가 내 손에 닿자, 나는 모든 것이 무너지며 새 삶을 얻은 것만 같았다"며 아주 짧은 시간동안 빛을 내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미약한 빛이었지만, 순간 주변에 많은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불꽃놀이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랑은 그렇게 온 우주에 걸쳐 널리 조금씩 존재하게 되었다. 어느 작은 닭강정의 튀김 조각에도, 길거리표 5만원짜리 양복 보푸라기에도, 반지하 월세방의 여름 곰팡이에도 사랑은 무수히 존재했다. 그녀를 사랑했던,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곰팡내나는 사랑의 노래를 홀로 조용히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