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5/06/21 00:50(년/월/일 시:분)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 문화,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오타쿠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내가 좋아하는 특정 작품의 동인지를 볼 때 특히 크게 느낀다. 대부분의 동인지가 나에게는 재미가 없다.
그 이유는 동인지의 낮은 품질 때문이다. 동인지는 보통 원작의 특정 캐릭터, 또는 특정 설정에 과도하게 파고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그러다보니 그림을 못 그리거나 스토리가 재미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원작에서 암시적이었던 부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아이디어가 대부분 그렇게 번뜩이지는 않다. 그냥 그럴 바에는 원작을 한 번 더 보는 편이 더 재미있다.
또한 가격 대비 재미의 비율도 낮다. 동인지는 상업지에 비해 페이지가 얇으면서 가격도 비싸다. 일반 매장에서 팔지 않기 때문에 접근성도 떨어진다. 이렇게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싸고 품질도 떨어지는데 일부러 어렵게 구해서 볼 매력이 나에게는 안타깝게도 크지 않다.
물론 나도 재미있게 본 동인지가 간혹 있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작가는 보통 시간이 지나면 동인지보다는 상업지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남의 얘기를 하는 것보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생산적이다. 그런 작가의 작품들도 보면 동인지보다 상업지가 더 재미있다.
사실 오타쿠가 되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예를 들어 나는 중학생때 에반게리온을 매우 감명깊게 봐서 여러 번 되풀이해서 보았는데, 많은 오타쿠들처럼 맹목적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나는 안타깝게도 천성이 분석적인지라, 작품을 볼때 자꾸 제3자의 시선으로 객관화하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을 보면서도 "그래, 이 부분은 아주 훌륭하군." "아니, 이 부분은 좀 별로야." 라고 판단을 했다.
내가 에반게리온에 빠진 계기는 1화에서 아주 정교한 기계류 묘사 때문이었다. 그 다음으로 더 푹 빠진 계기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 때문이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종말론적 모티브는 나에게는 곁가지였다. 에반게리온 이전에 이미 신의 지문, 소설 정감록, 소설 무당(정강우 저), 라엘리안 무브먼트 등으로 종교적 종말론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나는 레이나 아스카에 빠지는 남자 오타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가졌고, 연애보다는 치료와 관심이 필요한 소녀들이었다. 게다가 미성숙한 사춘기 소녀에게 자기 능력 이상의 과분한 과제가 주어져 스트레스도 심했고, 당장의 국가적 갈등이 심각하여 자기 마음을 추스릴 여유도 없었다. 그럴때 사귀어봤자, 서로의 호감이 좋게 발전될리가 만무하다. 외모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나라면 사귀기 이전에 먼저 건전한 취미를 가지고 훌륭한 병원을 소개시켜주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심약한 소년이 소녀의 극성 히스테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니, 잘 만든 아스카 피규어를 봐도 나에게는 오타쿠적 감수성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 아스카와 신지를 연인으로 엮는 동인지를 봐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결국 원작에서도 아스카와 신지가 엮이긴 했는데, 상당히 안타까운 방식으로, 게다가 일방적인 관계로 엮였는데 나는 이 쪽이 동인지보다 훨씬 납득이 갔다.
그나마 재미있었던 건 애니메이션 설정집이었다. 처음에는 신지, 아스카, 레이가 보통 체형이었으나, 기획 단계에서 좀 더 마르고 신경질적인 체형으로 변했다. 이런 이해를 통해 나는 원작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신지가 원작보다 체중이 10kg는 더 나가고 먹는 걸 좋아했다면, 또는 아스카가 좀 더 글래머러스했다면 작품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나는 이런 마른 아이들의 신경질적인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 이런 점은 오타쿠스러웠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가 아닌,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보통의 팬보이들이 생산해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훨씬 재미가 없었다. 나도 처음에는 한참을 찾아서 보았지만 대부분 별로였다. 적당히 만든 미디오커(mediocre)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에반게리온이라 다 좋은 게 아니라, 훌륭한 작품이어야 좋은 것이었다. 이런 점은 오타쿠스럽지 않았다.
차라리 오타쿠가 되는 편이 훨씬 즐거웠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빠져드니 말이다. 나에게는 맹목성이 없다. 이것이 논리적, 감성적으로 납득이 되는지, 미적으로 아름다운지 자꾸 판단하고 분석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래 성격이 그런 걸 어떡하겠나. 이것이 내가 안타깝게도 오타쿠는 못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