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09/06/29 13:44(년/월/일 시:분)
어디 뭐 놀러갈 데 없을까
다음 맵으로 낙동강을 따라 무작정 쭉 따라가던 차에
웬 일본인 묘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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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사키린따로묘 |
아니 우리나라처럼 반일감정이 심한 곳에
일본인의 묘지가 버젓이 지도에 표시되다니!
궁금함에 못이겨 나는 차를 끌고 놀러갔다.
마침 그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다.
날이 너무 안 좋아서 옴니아 내장 GPS는 위성을 못 찾고 헤메고
갑자기 내 차는 바다 위 연평도 근처를 시속 260km로 달리곤 했다.
차에서 내려서 우산을 써도 옷이 그냥 막 젖어버리고
미즈사키 린타로 묘는 표지판도 없었고 가는 길도 없었다.
정말 다음 맵에만 의지해서 물어물어 찾아가는데
"아저씨, 혹시 이 근처에 미즈사키 린따로 묘라고 아세요?"
"아~ 그 일본놈?"
아저씨가 가리킨 곳에는 표지판도 없이 방치된 묘지가 하나 있었다.
http://www.natsukusa.com/hist/6.htm
미즈사키린따로(水崎林太郞)
명치(明治) 중기 애지현(愛知懸) 기부정장(岐阜町長)을 역임한 미즈사키린따로(水崎林太郞)의 묘.
수성못은 옛 둔동제, 세종조 「경상도지리지」에 나와…
수성못은 대구시민들에게 1924년 일제가 수리조합비를 거둬 들일 목적 하에 만든 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성못은 조선조부터 있어 왔던 것임을 세종조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예종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수성못’에 대한 최초의 문서인 세종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을 살펴보면, 대구군에는 4개의 큰 수리지(水利地)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중 둔동제(屯洞堤)라 불리는 것이 지금의 수성못이다.
4개의 수리시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佛上堤(현 배자못, 소출 양 64결)
(2) 釜堤(현 동촌, 소출 양 52결)
(3) 聖堂堤(현 성당못, 소출 양 48결)
(4) 屯洞堤(현 수성못, 소출 양 21결)
그리고, 예종 원년(1468년), 대구군에 18개의 수리지(水利地)를 더 축조하여 총 22개가 되었다. 이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1469년에 만든「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조선조가 쌀 농사를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조조 43~47년 사이에 편찬된 읍지중에 하나인 「대구읍지」(大邱邑誌)에 ‘둔동제’가 수동(현 범물동 일대)에 있다고 나와있다. 둔동제는 둘레가 1,429척이고 수심이 7척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대구읍지 번역판은 1997년 김택규·박대현 편역으로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하였다.
이후, 일제가 1924년 5월에 수성수리조합을 만들고, 수성못을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부사」에서도 수성못이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성못에 대해 “옛 수성현 동문산리 소재, 현 달성군 수성면 상동 수성저수지”라고 서술되어 있다.
미즈사키린따로는 일제시대 대구지역 관개용수 확보를 위한 저수지를 조성하는 등 지역의 농업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소는 고인의 뜻에 따라 저수지 옆에 만들어졌다.
1914년 가족과 함께 대구에 정착한 그는 농업에 종사하며 현지 농민이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저수지의 설계, 측량을 끝낸 후 경북도의 일본인 지사에게 직언을 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한국인을 배려하지 않은 것은 일본인의 잘못”이라고 격노하여 조선 총독과 직접 면담하고 공비 1만 2천엔(현재 10억엔 정도)을 받아 못을 조성. 관리했다.
당시의 수성평야는 현재 주택과 음식점(들안길 등) 등이 들어서고 수성못은 유원지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양지로 변모하였다.
주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산 21-8 연락처 : 053)784-6667
정리하자면.
미즈사키 린타로는 일제시대 수성못을 만든 사람이다.
원래 수성못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그의 제안으로 현재와 같이 치수 용도로 개조되었다.
원래 일제는 조선 통치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로 미즈사키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미즈사키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었기 때문에 약 100억의 공사비를 들여 수성못을 증축했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내심 자랑스러웠는지 죽어서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성못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묘지를 지었고, 현재도 그의 묘지를 한일친선교류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참 가뭄에 콩나는듯한 일제시대 일본인의 선행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여기에는 다소 찝찝한 부분들이 있다.
1. 기상청장까지 지내신 분이 돈도 많으실텐데, 자기 사비를 들여서 수성못을 증축했으면 베스트였을텐데, 결국은 일제의 돈, 한국인의 세금으로 만든 거라서 좀 찝찝하다.
2. 한일친선교류회 같은 친일파에서 이런 일부 일본인의 선행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아서 찝찝하다.
그래서 현재는 완전 방치된 상태고, 그나마 수성못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는 묘지도, 바로 앞에 '레스토랑 르네상스'가 들어서는 바람에 전망이 완전히 가로막혔다. 대구에서도 특별히 유적지로 지정하거나 하지 않아 변변찮은 표지판도 없고, 묘 주변에서는 마침 주민들의 술자리가 시끄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치수시설이 잘 정비되어서 수성못은 예전처럼 가뭄이나 홍수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제는 주변에 오리보트, 야구연습장, 식당 등이 한적하게 들어선 한산한 휴양지로 변모했다.
매일 밤 9시마다 분수 쇼를 틀어준다지만, 그마저도 우천시에는 하지 않아서 나는 정말로 볼 거리가 없었다.
그저 우산을 쓰고도 척척하게 젖은 옷과, 양말까지 다 젖어버린 신발과, "한국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일본인의 잘못"이라던 미즈사키 린타로와, 그 묘지를 짓는 한일친선교류협회의 양복입은 아저씨들 사진과, 이제는 수성못의 전망을 완전히 막아버린 레스토랑 르네상스와, 그 바로 옆에서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진 대구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야, 여긴 별로 올만한 데가 아니구나 싶었다.
무척이나 피로한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