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06/02/18 12:21(년/월/일 시:분)
KBS 도올의 논어이야기
35강 불혹 지천명의 참뜻 (2001년 2월 9일)
http://www.kbs.co.kr/1tv/dol/
xacdo 정리
유교사회에서 예는 불문법이다.
높은 사람에게는 엄하게 적용하고, 백성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
나는 원래 말을 막 하지만 KBS에서는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죄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똑같이 도덕성이 없다. 일본말로 메챠쿠챠.
이 자리에서 현 정권을 두둔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는 빨리 젊어져야 된다.
내가 다녔던 하버드 대학 총장도 30대였다.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에서는 정치철학도 함께 가르친다.
거기서도 대학원도 안 나온 26살 먹은 사람을 조교수로 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게 뭡니까? (흥분)
나도 노인이라 어서 빨리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한창 40대 때 정치를 했어야지 다 늙어서 뭐야.
그래서 중고등학교 정년을 낮추기 전에 대학교 교수부터 정년을 낮춰야 돼.
일본도 대학교수 정년이 55세다. 옛날 일본이 아니다.
무슨 교수평가다 뭐다 하면서 교수 권위나 떨어트리고
내가 정치는 얘기할 수 없고, 일단 대학부터 얘기하자면
내 아내도 연대 교순데, 타협해서 60세에 퇴임하자고 얘기
이 문제는 우리 사회를 젊게 만드는 첩경이다. 지식인부터 각성하자.
- 공자가 자기 일생을 회고한 이야기
15세 지학(志學), 30세 이립(而立), 40세 불혹(不惑), 50세 지천명(知天命), 60세 이순(耳順), 70세 종심(從心)
이것처럼 널리 알려진 논어 구절도 없다.
73세에 죽었다면 아주 늙어서 죽기 직전에 자기 인생을 회고한 말일 것이다.
공자란 사람이 참 대단한게 헛소리가 없다. 참 평범한 이야기다.
그 정도면 구라를 칠 만도 한데 (웃음)
보통은 15살에 아름다운 사랑을 했지. 20살에 결혼을 하고, 30살에 대학을 1등으로 졸업해서 유학을 갔지. 갔다와서 민주화 투쟁에 참가를 해서 감옥에 갔지. 그러다가 출마를 해서.. 보통 이렇게 사건 업적 중심으로 얘기하기 마련.
그런데 공자는 자기 인생의 원칙만을 말했을 뿐. 보편적이고 쉬운 이야기.
15살 사춘기 시절에. 아버지 없이, 무당 어머니 밑에서 구박받으며 컸다.
나중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공자는 상복을 입고 잔치집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다.
공자는 그런 사회적 예절에 대해 분노를 학문에 대한 뜻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청춘의 본질은 좌절이다. 회상할때만 아름다워 보이지. 그런 좌절과 분노를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30세면 자기 두 발로 서야지! 자립.
40세면 다들 자립한 사람들끼리 만난다. 자립은 경쟁이 아니다. 뜻을 가지고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40세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합리적인 자기 기준을 가지고 미혹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공자 인생의 가장 위대한 점이다.
나는 무언가에 의존하는 학생들에게는 철학을 못 가르친다. 철학은 무전제의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공자는 귀신에 대해서도 "존경은 하지만 멀리한다" 말을 할 순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
나이 사십에 불혹할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 사람인데! 신문에 "불혹의 나이에.." 쓰는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그러려고.
가만 보면 불혹, 지천명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그 말은 우리 사회의 중심 세대가 40-50대라는 의미다.
하늘이라는 것은 나를 벗어난 전체를 말한다. 내 개인의 행동이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사는 것. 칸트도 그렇게 말했다.
나는 논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모든 가능성을 따져서, 가장 보편적인 생각을 추려서 강의한다. 우리 사회, 우리 민족, 우리 인류가 같이 공용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원칙을 찾아서 나의 하루하루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지천명의 길이다.
50세면 천명을 알아야 하는데, 보통 내 나이정도 되면 다들 이 사회의 지도급이다. 그런데 지천명이냐 이거지! 나는 걱정이 많다. 구체적으로 얘기할 순 없지만.
60세면 이순. 주자는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이해하는 경지라 했는데 나는 이것을 공자의 신격화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자의 위대함은 지식의 축적에 있지 않다.
귀가 순하다고 하는 것은, 남이 아무리 고깔스러운 소리를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인들은 60세면 귀가 순한게 아니라 귀가 역해! 그 나이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나도 그게 잘 안되!
나는 눈이 2.0에 하루종일 공부를 해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지독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도 나이를 먹으니까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글자가 안 보이고, 그나마 보이는 글자도 잘 안 보여서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가까운 것은 안 보이고 멀리만 보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른 자연의 법칙이다. 가깝고 자세한 건 보지 말라, 이것이 이순이다.
노인들은 멀리 보고 살 줄 알아야 한다. 귀가 어두워지는 것도, 웬만한 소리는 안 듣고 살라는 거다. 기억력이 감퇴되는 것도, 쓸데없는 것을 기억하지 말라는 거다. 이것도 다 좋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허해지고 남을 용서할 줄 알면 된다.
70세면 내 마음이 욕심나는 대로 따라가도, 법도를 넘어감이 없다.
꼴리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가지 않는다. 꼴리다는 나쁜 말이 아니다. 하지만 길 가는 여자를 꼴리는 대로 하면 어떻겠어.
자유는 무제약적일 수 없다.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자유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자발적 의지의 문제다.
규구: 컴파스와 ㄱ자. 한비자의 사상에 나오는 법도. 규구로 세상을 창조해다는 설화도 있다.
칸트는 인간의 의지와 도덕률이 일치하는 세계가 최고선으로 친다. 하지만 이런 경지는 일생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어서도 인간은 거기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영혼만이라도 영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칸트가 생각한 천당이다.
인간 세계에서 덕과 비례해서 행복이 보장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인간은 덕을 유지하고 사느냐? 덕과 행복의 일치를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다.
즉 칸트는 '하나님이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은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요청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의 요지다.
공자의 말은 칸트와 위배되지 않는다. 인간이 70세까지 훈련하면, 꼴리는 대로 해도 사회적인 규약을 어기지 않는 경지가 될 것이다.
이 강의를 듣는 70세의 양반들, 반성하십시오! 저도 반성하겠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