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6/06/14 02:00(년/월/일 시:분)
1.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에 흠뻑 빠져 지낸 사람으로서, 한국의 뿌리깊은 반일감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참 고민되는 주제다. 예를 들어 내가 일본 하면 생각나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차이는 이렇다.
나: 디지캐럿 (좋음)
보통: 일본침략 (싫음)
...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역사를 보면 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반일감정이 생기는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일본 식민지였다고 해서 반일감정이 꼭 생겨야 할까? 이 생각이 바뀐게 대만을 놀러갔을 때였다.
2.
대만을 놀러가니 대만 TV에서는 놀랍게도 아따맘마, 짱구는 못말려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일본 글자가 그대로 나왔다. 한국에서는 왜색이 짙다며 일본 글자를 다 블러 처리하거나 한글로 땜질하는 것과 달리, 대만에서는 일본 글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TV에 나오고 있었다.
오히려 블러 처리가 되는 건 중국어 간자체였다. (대만은 번자체를 쓰고, 중국은 간자체를 쓴다) 차이나 갓 탤런트였나, 보이스 오브 차이나였나 하는 컴피티션 프로그램이었는데, 반중감정이 느껴졌다.
중국은 싫지만 일본은 좋다. 생활 뉴스로 코스프레 행사를 보도하기도 했고, 곳곳에서 개인적인 동인활동은 물론 상업적인 코스프레까지 간간히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에도 일본풍의 게임 광고가 많았다.
일본 뷰티 및 약품 전문 매장도 있고, 가격도 일본 현지 가격과 거의 차이가 없어 경제적인 특혜도 (잘은 모르지만) 있어 보였다. 중국에 먹히느니 차라리 일본에 자주적으로 편입되는게 낫겠다는 느낌이었다.
3.
왜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이고, 우리는 반일일까?
생각해보면 식민지배가 꼭 반제국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만처럼 오히려 식민지배를 통해 친제국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게 대만만은 아닐거다.
식문화의 예를 들면,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프랑스 빵 등을 자국의 전통 음식과 접목시켜 반미를 만든다거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에서 독일식 맥주를 생산한다거나, 천진(티엔진)의 오대도(우다다오)도 식민지 시절 지었던 유럽풍 건물들을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식이었다면, 한국도 일본이 지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잘 짓긴 했다)을 중국처럼 관광지로 활용한다거나, 한국어에 남은 일본어의 여러 흔적들도 그냥 그 시절 문화로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이런 것들을 굳이 순화하고 해체하면서 완전히 없애버리려 하는 걸까?
어쩌면 한국의 반일감정은 식민지 시절 이전부터 생긴 게 아닐까? 그래서 그만큼 더 뿌리깊은 게 아닐까?
4.
한국의 반일감정은 언제 처음 생겼을까? 임진왜란 때였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한국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본에 별 관심이 없었다. 가끔 오랑캐들이 쳐들어오긴 했지만, 일본에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외각 지역의 소수 세력에 불과해서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관심 밖이었다.
반면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발판삼아 한국을 침략한 것이라, 기존의 침략과는 달랐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월등한, 본격적인 규모의 침략이었다. 지금까지 무시하듯이 지내왔던 바다 건너 나라가, 어느날 갑자기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쳐들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임진왜란이, 한국이 일본에게 처음으로 피해다운 피해를 처음 입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일본에 대한 기록도 딱히 없다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갑자기 일본에 대한 기록이 생기기 시작한다.
5.
근데 사실 우리가 침략을 받은 건 일본만이 아니었다. 중국에도 당했고, 몽골에도 당했다. 다들 제국주의에 심취한 대국들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반중, 반몽골 감정은 크지 않은데 유독 반일 감정만 클까? 내 생각엔 일본이 다른 제국들에 비해 한국을 잘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JTBC 차이나는 도올 방송때, 방송중은 아니었지만 인터뷰에서 도올 김용옥이 미 제국보다 중국 제국을 편애하는 이유로 좀 더 리니언트(관대)한 제국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315593
“중국이 미국보다 조금 더 리니언트한 제국 되지 않을까”
이건,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좋아하는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의도적으로 수위를 높인 발언이었다. 그 과장된 감정을 좀 덜어내고 수수하게 바꿔보자면, 제국에도 급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국이라는 정치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국주의 시절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에도 나름 훌륭한 제국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못했던 제국이 있었다. 그 중에서 일본 제국의 품질을 평가해보자면,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제국의 품격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떤 제국에 속할지 여부를 식민지 스스로가 선택한다는 측면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제국이 아닌 식민지가 주체적으로 가져가겠다는 발상이다. 도올 김용옥 다운 생각이다.)
일본 제국의 실기를 따져보자면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특히 나는 그 중에서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 나왔던 정복의 방식을 인용하고 싶다.
일본은 섬나라라서 내전이 많았는데, 전쟁이 잦은 것 치고는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지방 영주들의 꿈은 고작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해서 세금을 받는 정도여서, 전쟁한다고 소작농들의 논밭을 다 파괴해버리면 세금을 걷을래야 걷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질적이기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여서, 설령 영주가 바뀌더라도 본인들이 내는 세금에 큰 차이가 없으면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오히려 여기서 세금을 조금 내려준다거나 하면 없던 충성심이 생길 정도였다. 지배하는 사람이나 지배받는 사람이나, 다들 경제적인 동기로 움직였던 것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도 훌륭한 군주로 추앙받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도, 나는 가장 잘한 점이 전쟁 감소, 지역 통일보다도 경제적 성장이라고 본다. 세금을 40% 이상 걷지 못하게 하고(이게 낮은 거라니;;), 당시 지방 소도시였던 에도(도쿄)를 무역 중심지로 성장시켜 당시 수도였던 교토보다도 더 부유한 도시로 만들었다.
즉 일본은, 우두머리가 그 누가 됐던,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군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철저히 봉건주의적이었다. 아마 조선 침략도 이런 경제적인 확장이 가장 큰 동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일본의 전쟁은 철저히 우두머리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단 우두머리가 죽으면, 아랫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새로운 우두머리를 받아들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난번 우두머리와 비슷하거나 적어도 나쁘지는 않은 수준으로 경제를 유지한다는 암묵적인 계약 아래였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을 침략할 때 일본의 방식을 따랐다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장의 목을 따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삼국지의 일기토 전투처럼, 우두머리가 1:1로 다이다이 붙어서 이기면, 조선 정복도 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의 정서는 봉건주의보다는 국가주의였다. 섬과 반도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우두머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혹은 굴욕스럽게 머리를 조아린다 하더라도,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할지언정 속으로는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었다. 내 눈 앞의 짧은 경제적 이득보다는, 선비로서의 고고한 명예를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위계질서 상의 가장 높은 위치의 수장의 목을 땄는데도, 관군 및 민간인까지도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순신도 정치적인 입지가 그다지 높지 않았는데, 전투에서 이겨도 자신에게 그다지 돌아올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해 싸웠다.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준의 단심가 중에, 한국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정몽준의 단심가 쪽이었다. 설령 나에게 경제적인 이득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이제는 망해가는 정권이라도, 대세가 바뀌었다고 해도 모든 것을 떠나 내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쪽으로 나의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그 고집.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보수적이라고 해야 할까, 진보적이라고 해야 할까. 변화에 저항하고 현재 상태에 머무른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라고 해야겠지만, 자잘한 사리사욕을 떠나 현실을 넘어 고귀한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여담이지만, 독립운동 시절을 보면 이런 일본인의 습성, 우두머리만 죽이면 나머지는 따라온다는 것을 잘 이해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만 암살하면 조선의 독립은 따라올 것이다... 생각했을 것이고. (안타깝게도 그 이후 이어지는 역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그나마 온건파였고, 그 이후 그보다 더 한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강경파가 조선 총독을 넘겨받아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나쁜 통치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안중군의 업적이 무의미했다는 건 아니고.)
6.
일본 역사를 보면 놀라운 점이, 옛날부터 부유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하여튼 돈은 참 잘 벌었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전혀 낯선 외국의 사상이라도 적극적으로 들여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돈을 벌었다.
일본 여행을 다녀보면 지방 소도시까지도 그 부유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일본식 정원을 보면 이게 부자의 여흥이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다.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반면 일본은 전쟁은 하여튼 못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섬나라니까 내전이야 그렇다 치고(내전도 그렇게 잘 한건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지리멸렬하다), 일본을 떠나 세계로 나가기 시작하면 정말 한심할 정도로 전쟁을 못한다(지리멸렬하다 못해 개탄스럽다).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그랬고(제국 중에 이렇게 전쟁을 못했던 제국이 또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일본이 전쟁은 하지 말고, 경제적이거나 학술적인 쪽에 힘을 쏟았으면 좋겠다. 하여튼 돈은 정말 잘 버는 나라이니, 자기가 잘 하는 쪽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게 더 낫지 않나? 왜 자꾸 못하는 걸 하려고 하나?
나는 전쟁하는 일본은 싫지만, 돈 잘 벌고 열심히 연구하는 일본은 좋다. 안타까운 점은, 일본은 항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싶으면 항상 전쟁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다. 먹고 살만 하면 항상 딴 생각을 했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답답한 섬나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 방법이 꼭 군사적이어야 할까.
한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그 어떤 다른 나라보다도 일본의 가장 추악한 속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본인들도 잘 모르는, 깊이 내재한 검은 욕망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그 혐오의 감정이 아직까지도 충만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언제까지나 등을 돌리고 있을 수는 없다. 하여튼 나는 일본이 전쟁만 안 하면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가정폭력만 빼면 괜찮은 남편 같은 소리지만.
나는 전쟁 안 하는 일본만을 선택적으로 좋아하려 한다. 일본을 2개의 인격으로 나누어, 전쟁하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 일본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그래서 전쟁하는 일본은 예전처럼 계속 싫어하고, 전쟁하지 않는 일본만 좋아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 한국에 뿌리깊은 반일감정의 나아갈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7.
예를 들어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진격의 거인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 바닥에 깔린 정서가 군국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진격의 거인과 달리, "아이 앰 어 히어로"는 재미있게 보았다. 좀비로 뒤덮인 폭력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끝까지 자기만의 도덕을 지키며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런 점이 평화적이었다.
그렇게 보니, 이제와서 창천항로를 보려니 거부감이 들었다. 간웅 조조를 앞세워, 무력을 숭상한다. 인물들의 세부적인 감정, 사정은 힘센 자의 입장에서 각색되거나 생략된다. 모든 것이 지배자를 위한 변명으로 들린다.
이렇게 나에게 일본 문화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문화의 저변에 군국주의가 깔려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런 정서가 충분한 작품과, 이를 휴머니즘으로 극복한 작품이 크게 차이가 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좀 애매하다.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휴머니즘에 기반하지만, 전쟁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그 시절에 아련한 향수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정확히 전쟁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의 기계류 묘사나 전투기 조종사의 감정에 이입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 든다. 세계대전 시절에도 그 나름의 로맨스가 있었다는 건데, 이해가 가기도 하면서 까딱하면 군국주의로 넘어갈 수도 있어서 참 위험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감독이지만 반딧불의 묘도 마찬가지다)
반면 내가 사랑하는 디지캐럿이나 에반게리온을 보면 (이 작품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내 나이가 보여 부끄럽다) 이런 군국주의 색채가 없다. 그냥 순수하게 좋다. 에반게리온도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분노가 있지만, 그건 정말 싸우는게 싫어서라는 감정이 느껴진다. (전쟁도 차라리 철저히 오락적으로 접근하면 불편하지 않다)
물론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이니, 그냥 작품은 작품으로 순수하게 즐겨도 괜찮겠지만(작품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니), 왠지 그 바닥에 작가의 군국주의적인 인성이 투영되는 게 보이면 정말 보기 싫어진다. 나는 그래서 진격의 거인 작가 극우라고 논쟁이 되었을때, 자세한 걸 보지 않아도 이해가 갔다. 작가의 사상을 떠나, 작품 자체가 너무 폭력을 숭상하고, 적을 저능하고 혐오스럽게 그렸다.
원래 혐오는 이해, 소통의 부족에서 온다.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소통하면 좋은 점, 싫은 점이 투명하게 보여 오히려 혐오의 감정이 없어진다. 잘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혐오는 숭배와 닿아있다. 잘 모르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이 숭배라면, 무작정 싫어하는게 혐오니까. 숭배던 혐오던, 잘 모르니까 그러는 거다.
숭배던 혐오던 나는 싫기도 하지만, 작품에서 그런게 느껴지면 단조롭게 느껴진다. 현실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이해해서 편협하게 느껴지고, 그러다보니 이야기의 풍부함도 떨어질뿐더러, 솔직히 혐오나 숭배가 나오면 스토리가 흘러갈 방향이 뻔하다. 예측이 되니 궁금함이 줄어든다.
군국주의로 빠지면 생각이 쉬워진다. 그 얘기는 생각의 결이 읽힌다는 얘기다. 나는 이야기는 이게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심지어는 작가조차도 모르는) 역동성이 있어야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재미가 있는 것은 이야기가 우리 삶의 시뮬레이션이고, 그런 상황을 가정했을때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열심히 생각하면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주의"에 빠지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8.
생각해보면 한국에 일본 문화가 개방된게 겨우 김대중 대통령 때였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다.
http://namu.wiki/w/%EC%9D%BC%EB%B3%B8%20%EB%8C%80%EC%A4%91%EB%AC%B8%ED%99%94%20%EA%B0%9C%EB%B0%A9
좋은 일본문화 개방
김대중 대통령은 "좋은 문화는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자"며 일본 문화를 개방했다. 이 논리가 여전히 우리의 뿌리깊은 반일감정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