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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광화문과 새민족 새역동성

15/12/01 16:04(년/월/일 시:분)

1.

기술사 학원이 광화문에 있어서, 여러 집회나 행사를 자주 본다. 마라톤 행사로 도로가 통제되고, 세월호 시위로 도로가 통제되고... 나도 물론 마라톤을 좋아하고 세월호 시위에도 찬성하지만, 그래도 길이 다 막히면 매우 지치고 시간도 많이 뺐긴다. 일에 공부에 하루종일 치이는데, 거기에 도로까지 통제되면 짜증이 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에 불편을 끼치지 않는 평화 시위란, 부모님이 허락하는 힙합같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좋은 말로 좋게 좋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분명히 있고, 하다 하다 안되면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물론 싸우더라도 잘 싸워야겠지만, 싸울수밖에 없다면 피하지 않는 태도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2.

토요일 저녁 7시였다. 이제 막 학원을 마치고 세종문화회관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5분만 있으면 집에 가는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시위를 하던 분들이 도로로 나와 청와대를 향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대기하던 전경 버스들이 도로를 막았고. 모든 차량의 통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버스정류장 전광판의 남은 시간은 5분에서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남은 시간이 5분에서 영원히 멈춰버렸다. 피곤이 몰려왔다. 조금만 더 일찍 나왔어도 버스를 타고 가는건데, 괜히 나머지 공부를 한다고 버티다가 늦게 나와서...

하여튼 불가항력으로 세월호 시위를 눈 앞에서 보게 되었다. 나의 평소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로, 나의 육체적 피로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을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그 확성기 소리가 한심하게 들렸다.

"청와대로 가자!"
"박근혜 나와라!"
"진실을 밝혀라!"

혹시라도 세월호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격해서, 박근혜 대통령께서 친히 시위대를 영접하여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모르겠다. 나는 이 구호가 그냥 구호를 위한 구호로 들렸다. 시위 동력을 얻기 위해 그냥 하는 말로 들렸다.

그래도 자기에게 딱히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오로지 명분을 위해서 목이 터져라 헌신하시는 분들께 미안하기도 했고, 그래도 나처럼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다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있어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분이 훨씬 낫다는 생각에 뭐라고 원망할 수는 없었다.


3.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세월호 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 촛불시위의 연장선 상에서, 이번에도 운동권 색깔을 많이 빼고 대중적으로 다가가려고 한 것은 좋았다. 다만 멜로디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따라부르기가 힘들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윤민석 작사, 작곡

F Bb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Gm Gm7 C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F F7 Bb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Gm C7 F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래도 귀에 꽂히는 부분은 3번째 소절 F - F7 - Bb 코드인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부분이다. 세월호 시위대가 가장 주요 구호로 꼽는 "진실규명"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이 부분은 가사도 좋고, 멜로디도 쉽다.

근데 정말 귀에 안 꽂히는 부분은 2번째 소절 Gm - Gm7 - C 코드인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부분이다. 형식상 2번째 소절은 4번째 소절과 달리 끝나는 느낌이 없어야 해서 좀 애매해지긴 하는데, 코드 전개로 보면 그렇다쳐도 멜로디가 너무 갈곳을 잃고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산만한 흐름이었다.

4소절도 문제다. 앞에까지는 어둠-빛, 거짓-진실의 대립 흐름으로 가다가 갑자기 4소절에서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감정선이 끊긴다. 마지막 소절에서는 결말을 내거나 여운을 남겨야 하는데, 갑자기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다. 급하게 만든 느낌이다.


4.

가사도 그렇다. 세월호 사고를 진실/거짓 프레임으로 가져가는 건데, 나는 이 프레임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정치적 프레이밍은 여론을 선동하여 동력을 얻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꼭 실제 사실와 정확히 부합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진실/거짓 프레임이 이번 사건의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번 세월호 사건은 너무나 많은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사건이며, 그 바탕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간과했던 환경안전의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우리 한국이 지금까지 빠른 산업화와 민주화까지는 이룩했을지 몰라도, 안전화와 의식 선진화까지 이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진정한 선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동력으로 삼아 다시한번 매우 힘들지만 언젠가는 꼭 한번은 가야 할 길을 지금 전력으로 달려가기 위해 이번 사건의 슬픔을 동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런 운동이 구호도 안전의식, 선진시민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


5.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지만, 정작 저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침묵했다. 왜냐하면 나는 세월호 시위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약하고 취약하지만 겨우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꺼트리고 싶지 않았다.

반대편이 틀렸다고 해서, 우리편이 꼭 옳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편도 많이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이겨야 하기 때문에 진영논리도 필요하다. 전략적 침묵은 물론, 전략적 거짓말도 때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편이 틀린 걸 언제까지나 용인할 수는 없으니, 지금처럼 열기가 한 차례 사그러졌을때를 기다렸다가 지금 글을 쓴다. 알리바바 마윈 회장도 "맑은 날에 지붕을 고친다"고 했다. 장마철에 비가 새도, 그때 지붕을 고칠 순 없다. 일단 그때는 바닥에 대야를 받치며 몸을 웅크리고 어떻게든 버텼다가, 비가 그치고 날이 맑아졌을때 기지개를 켜고 지붕 위로 올라가 수리를 해야 한다. 나는 지금이 지붕을 고칠 때라고 생각한다.

http://www.kbs.co.kr/1tv/sisa/globaltalk/about/program/index.html
KBS 글로벌 경제토크, 마윈에게 듣는다
본방송 : 2015년 5월 23일 (토) 밤 8시 ~ 9시까지 (60분 간 / KBS1TV)


비가 올때는 일단 바닥에 대야를 받치는 것이 임시해결책(workaround)이고, 비가 그친 뒤 지붕을 고치는 것이 영구해결책(Request For Change)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임시해결책과 영구해결책이 둘 다 시점에 따라 필요하다.

비가 온다고 바닥이 축축해질 순 없으니, 일단은 급하게라도 대야라도 받쳐야 한다. 전략적 침묵도 하고, 전략적 거짓말도 하면서 상황을 모면한다. 하지만 그때만 잘 넘겼다고 해서 지붕을 고치지 않으면, 다음에 비가 또 올때 대야를 꺼내야 한다.


6.

불만까지는 좋다. 잘못을 지적하는 건 필요하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나는 여기까지 가야 글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제기했으면 대응방안까지 꼭 써야 한다.

기술사 답안을 쓸 때도, 취약점을 썼으면 꼭 대응방안을 써야 점수가 잘 나온다. 취약점은 단점이 아니다. 예를 들어 SQL Injection 취약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SQL문법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처음 SQL문을 만들때 이럴 줄 몰랐으니, 코딩할때 PreparedStatement 같은 걸로 취약점을 방지하면 된다.

SQL 문법이 Injection에 취약하다고 해서, 우리가 SQL문을 쓰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단지 코딩할때 이런 취약점을 감안해서 잘 시큐어 코딩을 하면 되는 문제다. 세상의 아무리 위대한 기술도 취약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점은 아니다. 자책하지 말아라. 용기를 가져라.

http://youtu.be/H7Wd_6mFrjk
취약하다는 것의 힘 _ TED 강의 브레네 브라운

http://youtu.be/m6P66ppnnqw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_ TED 강의 브레네 브라운


7.

진보세력의 선동 구호도 마찬가지다. 시위 구호가 너무 후지다. 아저씨 냄새나서 못살겠다. 정치적 지향성이 비슷하다고 해서, 정치적 정체성까지 비슷하게 가기에는 감수성이 너무 차이가 많이 난다.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정서가 안 맞는다. 맞춰드리기 참 힘들다.

그렇다고 이 진보 아저씨들이랑, 나같은 진보 젊은이들이 따로 가기는 너무 쪽수가 후달린다. 같이 가긴 해야 할텐데 참으로 친해지기가 어렵다. 이 어려운 매듭을 풀 실마리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 민족주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력한다. 같은 아시아 권이라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구분짓는 가장 큰 정치적 차이점이 이 민족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단일한 감성이 한국, 일본,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대한의 한 겨레라는 단일한 감성이 없었다면 그토록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힘으로 똘똘 뭉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힘으로 우리가 좀 더 이 나라를 진보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빠지기 아주 좋다는 것이다. 단일한 민족이라는 감성은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다문화 사회에도 나쁘다. 차이를 인정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동성애 및 여성 인권 운동에도 궁합이 좋지 않다.

하지만 이런 민족주의가 있었기에 한국의 다이나믹함, 역동성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빠른 변화와 발전을 주도한 힘은 여기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인권, 다양성 존중 등의 서구의 훌륭한 가치를 더해 포용적인 세계 시민의 새민족주의로 나가는 것이 진보 세력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파시즘에 빠지지 않는 수정 민족주의. 토종 한국인은 물론 한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민자까지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는, 세계 시민, 세계 민족으로서 한국을 코스모폴리탄으로 만드는 새 민족주의.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한국 팀을 응원하면, 그 어떤 피부색이라도 모두 한국인으로 퉁 치는, 비빔밥의 고추장처럼 모든 식재료를 하나의 맛으로 비벼버리는 새 민족주의. 다이나믹 코리아. 코리안 드림. 당신의 꿈을 이뤄주는 새 겨레, 새 대한민국.

이 정도까지 가야 한국을 크게 진보시킬 원동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2525

  • 15/12/03 12:29  덧글 수정/삭제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황진사 15/12/03 12:31  덧글 수정/삭제
    송곳 봤어? 얼마전에 몰아서 봤는데 볼만함 사회 구조를 꿰뚫어보는 시각이 탁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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