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출판
15/09/09 12:39(년/월/일 시:분)
아내가 만화 "중쇄를 찍자"를 샀다. 만화책을 파는 영업사원의 힘찬 이야기였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기죽지 않고 끝까지 노력해서 결국에는 성공하는 이야기였다. 아내는 이런 일본 특유의 AKB48 스러운 "힘내자!" "화이팅!" 하는 톤이 좋았다고 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429886
중쇄를 찍자 1 - 마츠다 나오코
나도 다장조의 1도 -> 4도 화성 진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마찬가지로 이런 티없이 밝은 전개가 주는 위안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회사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답답하고 화가 나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 회사에서 분위기 메이커는 여자 신입사원이 담당한다 : 성차별, 연공서열
- 서점에 보내는 공문을 손글씨로 수백통을 쓰는데다, 회사 공식 편지지 / 편지봉투를 쓰지 않고 성의를 들어 사제를 사서 쓴다 : 표준 절차 부재, 생산성 고려 부재, 무엇보다 전문성 부재.
- 홍보용 책자 비용을 아끼기 위해, 만화책을 한 화 분량으로 손으로 찢어 수제 책자를 만든다 : 생산성 떨어지게 뭐하는 짓이야... 전문성도 떨어지고.
- 업무가 과중해서 영업사원이 홍보 이벤트를 열지 않는다 -> 이것을 열정이 식었다고 생각한다 : 열정만능주의
-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고 스트레스가 과중하여 식었던 열정이, 신입 여사원의 생기로 회복된다 : 열정만능주의...
- 시대가 바뀌어 만화책 판매량이 줄어들지만, 전자책 등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보다는 우직하게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여 죽어라 노력하여 결국에 잘 팔고야 만다 : 노력주의....
나는 무엇보다 출판사 편집실에서 철야를 계속해서, 소파에서 잠들고 제대로 씻지도 못해 퀴퀴한 땀냄새를 풍기는 문화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 또한 일이 많고 납기가 빡빡해서 수시로 밤을 새고 주말까지 나오는 경우도 많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거지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땀냄새도 안 나는 편이 낫고, 옷도 갈아입는 편이 낫고, 머리도 감는 편이 낫고, 일하는 시간도 짧을수록 좋다. 정 급하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만큼씩이라도 일하는 방식과 시스템을 개선하여 인력을 좀 덜 쓰는게 좋지 않을까.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IT 쪽이라 그렇지만, 기계라는 건, 컴퓨터라는 건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머리를 비워도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은 컴퓨터에 맡기고, 창의적이고 직관적인, 좀 더 가치있는 일에 우리가 집중해야 생산성도 올라가고 좀 더 인생을 덜 낭비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 "신입사원 효과"라고 해서, 파릇파릇한 신입사원이 들어올때마다 축 쳐진 사무실 분위기를 업 시키기보다는, 오래 일하신 분들에게 업무의 과중함을 잠시라도 떨쳐버리고 온전히 자신의 심신의 휴식과 안정, 자기계발에 집중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히려 오래 일하신 분들이 회사의 분위기를 주도하도록 하는 거지.
- 거래처에 보내는 공문을 사람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손글씨로 정성들여 쓰기 보다는, 그럴 시간과 돈으로 거래처에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프로모션을 하는 것이 어떨까.
- 돈 아낀다고 책을 일일이 찢어 홍보책자를 만들 시간에... 20페이지짜리 무료 전자책을 SNS 등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배포하는 것이 어떨까.
- 홍보 이벤트를 열지 않고 일찍 퇴근하는 직원을 "열정이 식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성과만 잘 난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 업무가 적성에 맞거나 열정이 식은 직원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관리가 아닐까. 진정한 관리자라면 성과는 물론 팀 멤버들의 마음까지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 1인가족이 늘면서, 집의 크기도 줄어들었고 자주 이사도 다니고 해서, 예전처럼 많은 책을 집에 두기가 어려워졌다. 나도 워낙 책을 많이 읽어서 책이 많지만, 하도 자주 이사를 다녀서 포기하고 PDF로 스캔해서 아이패드에 넣었다. 책값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보관비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의 전환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여기에 닌텐도처럼 끝까지 장인정신을 발휘해서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기존의 "잘 만드는 점"은 유지하면서 이런 장인정신을 담는 그릇, 틀만 바꿔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정말 잘 만든 게임이라면 3DS에서 해도 재밌고, 스마트폰에서 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정말 좋은 만화라면, 종이로 봐도 재밌고, 태블릿으로 봐도 재밌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종이가 화면보다 화질도 좋고 색표현력도 풍부하고, 특유의 촉감, 종이가 삭아가는 냄새, 책 그 자체가 가진 양감, 무게감, 존재감 등의 실제 존재가 풍기는 아우라를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정말로 종이책으로 봐야만 재미있는 만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자주 이사하고 좁은 집에서 사는 현대 젊은이들이라면 그런 실체의 아우라를 포기하더라도, 종이책만큼은 못해도 전자책이라도 비슷하게 재미있을 수 있다면 그 복제물을 수용할 준비가 충분히 돼 있을 것이다.
이런 준비된 전자인들의 간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집값도 비싸고, 책장도 비싸고, 이사비용도 비싸다. 어쩔 수 없어서 전자책을 보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보고는 싶은 거다. 그러니 제발, 종이책만 팔지 말고 전자책도 팔아주시오. 시대가 원하고 있지 않소.
이야기가 옆길로 많이 샜는데, 하여튼 일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일하는 방식에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지만, 앞으로 갈 길이 훨씬 더 멀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가 안주할 때가 아니라, 앞으로 더 험하고 먼 길을 가가 위한 초입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기업 문화의 장점이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최고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방식을 매뉴얼화하고, 표준화하고, 정확하게 공식화하여 그 누가 와서 일해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길고 자세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지루할텐데도 굳이 그 많은 항목을 하나 하나 매겨가며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그 꼼꼼한 장인정신이 일본의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전통을 중시하고, 해왔던 방식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자칫하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수 있다. 특히 요즘같이 빠르게 바뀌는 현대 사회에서 일본의 느린 변화는 어쩌면 자승자박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시대상황이 어쩌면 우리 한국에 다행히도 딱 잘 맞는 시기인 것 같다. 경박하긴 하지만, 엉덩이를 한 곳에 가만히 못 두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누구보다도 발빠르게 받아들이고 바꿔버리는 역동성, 이 역동적인 민족성이 지금 이 시대에 빠른 변화에 적응하여 진보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식 꼼꼼한 관리와 한국의 역동성을 겸비한다면, 만화책 영업도 좀 더 스마트하고 근대적이고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으로 가치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램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