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2/10/04 01:41(년/월/일 시:분)
안철수가 마침내 대선출마를 했다. 가슴이 찡했고 무척이나 기뻤다.
1. 안철수의 판(frame)
난 개인적으로 안철수가 문재인과 단일화를 안 하거나 미루길 바랬는데, 그 이유는 TV토론에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3명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 3명이 의미있게 대등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정말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해서 무척 기뻤다. TV토론이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그 다음으로 기뻤던 것은 "국민의 반을 적으로 돌릴 수 없다"며 보수 쪽으로 자리한 것이었다. 사실 안철수는 원래 성향상 보수 쪽이 맞긴 했는데, 새누리당이 워낙 보수같지 않은 보수다보니 함께 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문재인은 이미 진보를 선택했으니 개인적 성향과 상관없이 보수쪽을 끌어안을 수 없다. 그런데 안철수가 대신해서 진보와 보수에 적당히 걸친 포지셔닝을 해줬다. 그래서 무려 박근혜의 표를 빼았아왔다! 보수긴 하지만 박근혜는 찜찜해하던 사람들의 표를 훔쳐온 것이다. 이건 정말 안철수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안철수의 대표색으로 "파란색"을 쓴 것이다. 파란색은 원래 한나라당의 색깔이었는데, 박근혜가 좀 더 세련되고 여성적이고 따뜻한 대통합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빨간색으로 바꿨다. 마치 SK텔레콤이 스피드011의 차가운 이미지에서 행복날개 빨간색으로 바꾼 것과 같았다. 즉 원래 보수의 이미지는, 유능하지만 냉정한 옛날 스피드011의 이미지가 맞다. 그런데 그 파란색을 안철수가 가져왔다! 그렇지 잘했다!
이번 안철수에 실망하는 진보 지지자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이헌재를 영입한 것에 특히 불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에 안철수가 일부러 의도한 것 같다. 확실한 진보 지지자들을 실망시켜서 문재인 표에 편입시켜야,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의 1:1:1 구도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이 1:1:1 구도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안철수라면 굳이 1:1:1 구도를 안 만들어도 된다. 다른 구도도 가능하다. 본인의 말대로 정말 대선승리만을 생각한다면 훨씬 덜 불확실하고 덜 위험한 구도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공평하게 지분을 가지도록 유도한 것은, 정말로 치열한 싸움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게 누가 이길지 모르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싸움을 해야, 그 과정에서 대선후보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정말 열심히 해서 경쟁의 순기능을 하지 않을까? 물론 본인들은 죽을만큼 힘들겠지만, 그 결과로 누가 되던 더 훌륭한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좋은 일일 것이다.
2. 단일화 전망
근데 참으로 아쉬운 것은 민주당, 문재인의 무능함이다. 원래 민주당은 무능하긴 했지만, 안철수 건에 대응하는 건 정말 무능해보인다. 일단 안철수가 민주당과의 단일화를 애매하게 만든건 솔직히 민주당을 위해서다. 민주당이 충분히 긴장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이렇게 1:1:1의 치열한 구도가 된 지금에도 유일하게 민주당만 긴장감이 없다. 무척 실망스럽다. 민주당은 지금 단일화보다 진보로서 포지셔닝을 더욱 확실히 해야 한다. 안철수와 문재인이 다르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일부러 캐릭터가 안 겹치게 안철수가 자리를 비켜준 걸 모르나? 민주당은 오히려 안철수를 안 받아줄 수도 있다는 블러핑을 칠 수도 있다. 본인의 우월한 위치를 모르는 것 같다.
http://seoul.blogspot.kr/2012/08/blog-post_19.html
문재인을 위한 전략
안철수가 민주당의 후보가 되면 당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럴 가능성은 오로지 민주당 대선후보의 양보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안철수가 갖고 있는 한계들은 문재인이 안철수와 연대하지 않을 때 명확히 드러난다.
http://seoul.blogspot.kr/2012/08/2.html
문재인을 위한 전략2
안철수와 안철수의 지지자로서는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문재인의 제갈공명이라면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안철수와 단일화하지 않는다.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철수는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니다. 문재인이 단일화해주지 않는 안철수는 장전되지 않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고 배터리 없는 최첨단 애플 6세대 폰의 신세다.
자, 이런 힌트를 주는 안철수의 한마디. 이번 대선출마가 끝이 아니라, 기왕 시작한 이상 앞으로 정치를 계속할 생각이다, 라고 답했다. 그 얘기는, 자기는 대통령이 아니라 총리 자리 같은 것도 할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선후보들이 정정당당히 정책 경쟁을 하고, 지더라도 깨끗이 승복하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좋은 정책이 있으면 상대방 후보의 것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렇게 제안했다. 이것이 결국 문재인에게 양보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대선과정에서의 흥미진진한 경쟁을 위해서 안철수가 이 이상의 암시를 흘리진 않겠지만, 사실상 나는 안철수가 이미 민주당과 단일화를 생각해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안철수가 원하는 것은 이 속터지도록 답답하고 무능한 민주당을 조금이나마 정신 차리도록 충격요법을 주는 정도일 것이다.
자, 이렇게 안철수가 판을 짠대로 흘러갈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문재인에 대해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문재인은 성격 좋고 잘생긴 좋은 아저씨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답고 인간적이고, 무엇보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서로 이견이 있고 본인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어떻게든 잘 조율을 해서 이끌어나갈만한 남자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본인 자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그렇게 강렬한 통찰이나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심지어는 안철수나 박근혜도 그 정도로 얕진 않다. 그런 점은 정치인으로서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그래서 앞으로 단일화 논의는 문재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갈 것이다. 결정은 문재인이 아니라 민주당이 내릴 것이다. 문재인의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나꼼수를 들어보니, 나꼼수에 민주당 대선후보들이 전부 나와서 30분씩 얘기를 들어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중에 그나마 가장 괜찮았던 것이 문재인이었다.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은 너무 정치를 오래해서 그런지, 너무 정략적인 측면을 강조해서 구태 정치인의 모습이 많았다. 문재인은 인간적인 매력은 물론,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근데 민주당의 베스트라고 데려다놓은 문재인도 정작 박근혜와 안철수와 싸우려니 너무 초라해보인다.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정도는 충분히 될만한 그릇이지만, 대통령 대선후보는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3. 공은 박근혜에게 넘어갔다
하여튼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것이냐는 크게 2가지가 남았는데, 하나는 궁지에 몰린 새누리당 박근혜가 어떻게 이 위기상황을 뚫고 나갈 것인가 하고, 또 하나는 문재인이 어떤 방식과 명분으로 단일화를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비록 비인간적이고 치사하긴 하지만 정말로 유능한 집단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라도 뭔가 정말 대단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 쇄신의 방향이 지금까지 구태 정치의 탈을 벗고 진정한 보수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면, 설령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민주당이 단일화를 이끌어가는데, 워낙에 무능한 집단이라 과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안철수에 끌려다니는 형국이니 결국 안철수가 짜놓은 판대로 흘러갈 터라 그렇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앞으로의 키는 오히려 새누리당 박근혜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4. 안철수 검증공세 전망
마지막으로 최근 안철수에 대한 검증공세가 계속되고 있고, 그만큼 안철수에 대해 다소 실망하는 부분도 생기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검증이 시작되기 이전에 안철수 캐릭터를 간파한 분이 2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두분 다 무릎팍도사를 본 시점이었다. 한 분은 강용석이고, 또 한 분은 Hubris님이다.
강용석은 무릎팍도사에서 젊은 시절 일탈을 심야영화 보러 간 거라고 어물쩍 넘기는 걸 보고 발끈했다고 한다. 저건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사실로 드러났다. 역시 강용석의 "촉"은 상당한 것 같다. 물론 그 촉에 너무 의지하고 크게 베팅하다가 박원순에게 한방에 가긴했지만... 비록 지금은 본인의 블로그에서 제기했던 안철수/박원순 의혹을 모두 내렸고, 그 의혹들이 틀릴수도 있지만 대체로 맞을 것 같다.
http://www.dcnews.in/etc_list.php?code=succeed&id=22643
무릎팍도사에서 안철수가 그런 식으로 얘기하더라고요. 일탈했던 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심야영화 보러간 거라고. 제가 그거에 열 받아서 사실 시작한 거예요. 말도 안되는 소릴 해가지고. 안철수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 고등학교 때 심야영화같은 소리를 해요. 저는 일탈행동이 많죠. 전과가 몇 개인데요.
그리고 Hubris님은 안철수연구소 시절 유명 외국 백신회사에서 무척 고가에 회사를 사겠다고 제의했을때 단칼에 거절하며, 아무리 비싸게 사더라도 결국에는 회사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러면 한국에는 백신 회사가 하나도 없어지게 되니 사명감 때문에 못 팔았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발끈했던 것 같다.
나도 여기서 "외국 백신회사에서 인수를 하면 결국 안철수연구소는 없어질 것이다"는 사실이었다고 본다. 회사 이름이나 재단 이름에 항상 자기 이름을 넣을 정도로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라, 본인의 회사 이름이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서 못 팔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하지만 경영자의 입장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솔직한 회사의 가치보다 훨씬 크게 불렀는데도 응하지 않은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상하고, 이후 포스코 이사시절 보여준 행동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https://twitter.com/hubris2015/status/248520918043852800
난 사람의 말 자체에는 둔감한 사람이라 안철수의 말보다는 삶에 감동을 받고 싶다. 국가를 위해 회사를 팔지 않은 경영자의 마인드는 포스코 스톡옵션을 행사하는 마인드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노무현 문재인과 달리 브랜드는 좋다. 들을만한 스토리는 없다.
강용석이나 Hubris님이나 둘 다 발끈했던 부분은 안철수의 위선이다. 실제론 그정도까지는 아니면서 다소 과장해서 착한척 하는 것이 오글거리고 화가 나서 못참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나오는 검증공세도 그런 안철수의 위선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안철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주 청렴결백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어느 정도는 잰체하면서 하는 말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위선인건 사실이다.
자, 그럼 국민들은 안철수가 위선적이라서 싫어할까? 다소 그렇긴 하지만 아주 크진 않을 것이다. 다소의 위선은 상관없고,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위선적이더라도 경영자나 대통령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쪽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위선에 죄를 묻는 것은, 오히려 수많은 국민들을 공범자로 만들어 동지의식이 생기게 만들수도 있다. 검증공세는 사소한 잽은 될 수 있지만, 되려 역풍이 불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새누리당은 더이상 검증공세를 직접 하지 않고, 군소 보수 언론 또는 MBC에 역할을 돌리고 있다. 영리한 판단이다.
5. 안철수의 감동
나는 안철수의 13분짜리 짧은 대선출마 선언을 보고 무척 감동을 받았다. 예전 스티브잡스 시절 키노트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내가 좋아하는 Hubris님은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틀렸나 싶어서 일부러 Hubris님의 글을 다시 읽고, 여러 안철수 반박글을 챙겨읽고 다시 동영상을 봤는데, 여전히 찡한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장 찡했던 부분은 "저는 이제... 이번 18대 대선에 출마함으로서" 부분이었다. 무척 긴장된 표정으로, 특유의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그 유약해보이는 여성적인 말투로, 다소 뜸을 들이며, 차마 말을 못할 듯 하다가 겨우 힘을 내어, 하지만 의외로 굳건한 말투로 다음 말을 이어간다. 무척이나 비장하고 경건하다. 본인이 신나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무겁게 고민하고, 어떻게 보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캐릭터가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위압적이지 않고, 잘난척하지도 않고, 무심하지도 않고, 본인의 흔들리는 마음을 충분히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먹은 의지까지도 같은 비중으로 드러낸다. 한 회사를 이끌만큼의 카리스마로도 충분하고, 한 국가를 이끌만큼의 매력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IT쪽 사람이라 이런 유약한 여성적인 남자들을 많이 만나봐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동질감을 느끼고 비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면이 Hubris님과 나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Hubris님은 영화 "돈의 맛"을 좋아하고, 중국 무협영화를 좋아하고, 문재인을 좋아한다. 나는 "돈의 맛"이 별로고, 중국 무협영화도 별로고, 그래서 안철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호감은 내가 정말로 대선에 안철수를 찍을지, 혹은 대선에서 안철수가 승리할지와는 별개다. 나의 감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을 소재로 한 인터넷 유머도 보고, 유명 SF소설가의 문장을 인용하는 대선후보를 IT업계 종사자로서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http://seoul.blogspot.kr/2012/05/blog-post_18.html
임상수, 돈의 맛
http://seoul.blogspot.kr/2012/06/blog-post_28.html
액션의 진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7&aid=0002269611
안철수, 대선출마 선언 “진심의 정치를 하겠다” (출마선언문 전문)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미래는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http://www.ilbe.com/116131483
안철수의 하급생
http://4drip.net/xe/1097782
안철수 슈퍼마리오 설.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