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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인간의 최후 (1987) - 피터 잭슨에 대한 나의 오해

06/01/17 11:34(년/월/일 시:분)

Bad taste

피터 잭슨 감독을 접한 것은 '반지의 제왕'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보진 않았지만) 고무인간의 최후, 데드 얼라이브 등 참신한 B급 호러 영화를 만들던 재기넘치는 감독이었는데, 반지의 제왕 때문에 타락해서 특유의 재치를 버리고 평범한 블록버스터로 편입된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옛날 작품인 고무인간의 최후를 봤다. 얼마나 타락했나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어렵던 시절에 만들었던 옛날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겉 껍데기는 무지막지한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즉 피터 잭슨 감독은 그 돈 없던 시절부터 이미 대작을 지향하고 있었고, 별 내용도 없는 3류 영화에 쓸데없이 블록버스터에나 어울릴법한 대규모 액션 씬들을 집어넣고 있었다.

솔직히 영화는 별 재미가 없었다. 외계 식품 회사 직원들이 사람고기가 맛있다고 해서 무차별 도살하는 것을 우리의 주인공들이 물리치는 얘긴데, 언뜻 보면 특별하고 재치가 넘치는 것 같지만, 정작 영화에서는 그런 스토리를 전달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그보다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외계인과 지구 영웅들의 대결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줄까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내용과는 별 상관도 없이 자동차가 폭팔하고, 바주카포를 쏘고, 주택이 우주선으로 변신해서 날아가는 것이다.

결국 피터 잭슨 감독은 자기가 그런 스토리를 원해서 만든게 아니라 단순히 스토리를 쓸 능력이 안 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내용과 연출에 상당한 부조화가 일어났다. 그런 면에서 요즘 들어 남의 명작만 맨날 리메이크 하는 행보는 피터 잭슨 감독에게 매우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는 없는 스토리 능력을 옛날 작품에서 가져오고, 자기는 평소 하던대로 대작 스타일로 만들면 되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로 다행히도 피터 잭슨에 대한 나의 오해는 풀렸다. 앞으로도 피터 잭슨 감독은 고무인간의 최후 같은 옛날 작품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고무인간의 최후는 별로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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