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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야 하는 딸들 - 요시나가 후미
그때는 아직 이등병도 달지 못했던, 훈련병 시절이었다.

논산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그놈의 군용열차를 타고 동두천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기서 나를 포함한 4명을 불러내더니, 너희들은 항작사로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딸랑 기차표만 주고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졸지에 갓 6주 훈련을 마친 새파란 신병들은, 일반인들이 가득한 일반열차에 섞여 타게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사회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같이 가는 군인 아저씨들은 휴대폰을 빌려서 통화를 하기도 했다. 마침 나도 옆좌석에 한 아가씨께서 만화책을 보고 있길래, 용기를 내서 빌려 보았다.

그때 보았던 만화가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다.

나는 군대가기 전부터 요시나가 후미의 팬이었다. 특히 '서양골동양과자점'은 거짓말 안 하고 100번을 읽었을 정도로 팬이었다. 그 와중에 옆좌석에서 빌려읽은 '오후'에서 내가 볼 만화는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밖에 없었다. 나는 6주만에 보는 만화가 신선하기도 하고, 만화가 재미있기도 해서 정신없이 읽었다. 거기서 이 대사를 읽었던 것이다.

- 사랑한다는 건 사람을 차별하는 거잖아.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정말 멋지다. 나중에 휴가나가면 꼭 사봐야지. 그래서 나중에 휴가를 나오자 오후는 망해있었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에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전역을 몇 달 앞둔 이제와서야 그때 봤던 만화를 보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사연이 있는 만화다.

이제 만화에 대해 얘기해보자. 사실 요시나가 후미의 작품은 버릴 것이 없다(동인지 포함). 이미 품질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이 만화가 재미가 있네 없네 만화가 잘 만들었네 못 만들었네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보다 내용을 보자.

스토리는 뭐니뭐니해도 모르고 보는 편이 제일 재미있기는 하지만, 나는 결말을 미리 듣는 걸 좋아하고 말해주는 것도 좋아한다.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결말이라는 생각에, 나는 최대한 많은 결말을 머리속에 넣어놓고 계속 결말만 되새김질한다. 그래서 결말만 골라서 얘기하자면

1편 - 어머니에게 딸보다 3살 젊은 애인이 생겼다. 변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는 딸.

2편 - 매저키스트 여자가 노멀 남자를 잡으려다가 결국 깨지는 이야기.

3편(전/후) -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는 방법은, 남녀간의 사랑으로는 불가능하다. 수녀가 되는 수밖에.

4편 - 여자도 권리가 있어! 말만 앞서다가 결국 세상과 타협해서 속물이 되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최종화 - 예쁜 딸이 너무 예쁜 척만 하자 일부러 못나게 키운 어머니. 그래서 그 딸은 어머니가 되어 못난 딸에게도 항상 예쁘다 하면서 예쁘게 키운다. 하지만 두 방법 모두 실패해서 둘 다 컴플렉스를 가진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머니가 죽었을때 울어줄 수 있는 딸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어머니로서의 최고의 보람이겠지.

맨날 BL물만 하던 사람이 왠일로 여자 얘기를 하나 했더니,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여자의 심리를 묘사해낼 줄은 몰랐다. 여러 여성들의 대표적인 결함사례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렇게 여러가지로 못난 여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여러가지로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여.
|hit:1603|200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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