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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 남극처럼 광활하고 공허한 영화 | 혈의 누 - 볼거리로 충만한 블록버스터
사실 남극일기는 전혀 보고싶지 않았다. 도대체 송강호가 왜 이런 재미없을 영화에 출였했을까 의아했을 정도로, 남극일기의 내용은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재미없을 것이 뻔했다.

그런 내가 남극일기를 보게 된 이유는, 그놈의 빌어먹을 그랜드 슬램 달성 때문이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하여간에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고 해서 나는 너무 궁금해졌다. 아니 도대체 정말 수명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던 걸까? 물론 협찬이 들어오니까 그 돈으로 먹고 살수는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그런 협찬만으로 그런 고생을 할리는 없잖아.

난 정말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런 남극 원정이라던가 그랜드 슬램이라던가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걸까. 그런 고민 덕분에 중학교때부터 고민해온 '진실의 나라를 찾아서' 스토리의 마지막 부분이 완성되기는 했지만, 나는 어쨌건 납득할 수 없었고, 혹시나 '남극일기'에서 그 답을 해주지 않을까 해서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송강호가 인터뷰 때 '올드보이'와 견줄만큼 섬뜩하게 사람 심리를 묘사했다는 건 말이 그렇다는 거고, 재미없었다. 물론 남극의 광활하고 공허한 면을 아주 리얼하게 (그거야 진짜로 추운 뉴질랜드 가서 찍었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보여준 면은 있지만, 그런걸 리얼하게 보여준다고 해서 좋아할 관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정말로 무미 건조했다. 연기도 잘 했고 남극도 잘 담아댔지만, 그 뿐이었다.

나는 군대에서 혹한기훈련을 대비해서 보여준 일본의 군사영화 '팔갑전산八甲戰山'이 떠올랐다. 나는 원체 잠이 많은 타입인데다가 그때는 이등병이라서, 무슨 교육이라던가 비디오 시청만 하면 시작과 동시에 졸기 시작해서 끝과 동시에 깼다. 그런 생활을 하는 도중 보게 된 팔갑전산이라는 무지하게 재미없는, 그래서 모두가 졸아버린 그 영화를 나는, 졸지도 않고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봐버렸다.

팔갑전산의 내용은 간단했다. 일본의 두 군대가 혹한기훈련으로 똑같은 산을 2주간 돌아오는 훈련을 계획했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출발해서 중간에 만나고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계획이었는데, 한 부대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으로 지휘관이 지휘를 잘 해서 성공적으로 훈련을 마쳤지만, 다른 부대는 준비와 계획도 제대로 안 하고, 그나마의 준비와 계획도 완전 무시하면서 지휘관이 자기 멋대로 지휘를 하는 바람에, 부대는 조난을 당하고 얼어죽고 실종되고 추워서 미치고 반항하고 하다가 결국 전부 얼어죽는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 이 남극일기는 팔갑전산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놈의 송강호라는 탐욕에 눈이 먼 대장만 아니었다면, 원정대는 원정에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생명은 건졌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장이 완전 똘아이라서 실패한 거 아니야. 결국 영화는 인간의 욕심과 똘아이본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놈의 빌어먹을 본성 때문에 전부 죽고 만다. 하여간에 우리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한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에서 군주는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어떤 나쁜 방법을 써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쁜 방법으로 지도하더라도 최소한 그 결과가 좋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성으로서는 오로지 군주의 자비만을 바랄 뿐이다. 안 그러면 모두 죽으니까.

그런 면에서 '혈의 누'도 빌어먹을 지도자 때문에 전부 싸이코가 되서 아주 난장판이 되는 섬 주민들 얘긴데, 물론 이건 영화의 포인트는 아니고. 혈의 누는 1800년대 조선 한 섬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 이걸 추적하는 그 시대 경찰. 그 사이에 얽힌 권력의 비리와 사랑 이야기.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볼 거리로 풍성한 블록버스터다.

특히 볼 거리 면은 아주 훌륭한데, 무대로 조선의 한 섬으로 잡은 탓에, 너무 규모가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세트를 아주 밀도있게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 대신에 정교한 시체 특수효과들로 고어물의 재미도 있었고. 어째 소년탐정 김전일처럼 하루에 한명씩 차례로 죽어가는데, 주인공 차승원은 김전일과 똑같이 결국 다 죽을때까지 범인을 못 찾고, 범인을 찾은 후에도 살인을 막지 못한다. 하여간에 이놈의 김전일이나 차승원이나 얼굴마담 밖에 안 된다니까.

차승원은 사실 사극에 어울리는 배우는 전혀 아니었지만 (특히 그 진라면 광고 투로 밥상머리에서 고개를 건들건들거리며 대화하는 장면은 정말 안 어울렸다) 그 차승원 특유의 개김성이 영화에 아주 잘 맞아 떨어졌다. 액션씬도 잘 소화했고 열 받아서 막 대드는 장면도 잘 어울렸다. 덕분에 사극인데도 사극답지 않게 영화가 파워 있었다.

결론. 남극일기 재미없다. 혈의 누 재밌다. 끝.
|hit:1810|200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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