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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트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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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헉..."
"으윽.."

질퍽한 땀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휴우.."

오늘도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하려는 찰나에 나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실망이야."

실망이야.. 4음절 짧은 음성에 어디 숨겨진 의미가 없나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이건 개그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말의 의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말은 계속 이어졌다.

"시간도 너무 짧고, 조루 아니야? 아니 그보다, 남자와 여자가 느끼는 메카니즘이 다르다는 것을 잊은 것 같아. 요즘 왜 그래, 도대체가."

아무리 생각해도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말의 의미를 해석해가자 내 머리는 충격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

"처음엔 안 그랬잖아. 나도 사실 니가 좋아서 만나는 건 아니고. 니가 하도 쫒아다녀서 성의 좀 봐줬더니, 이젠 화장실 들어올때 다르고 나갈때 다르다는 거야? 실망이야."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결정할 차례였다. 이미 내 표정은 통제범위를 벗어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마구 일그러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예상 외의 것이라 대응기제를 생각해 놓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것은 이별의 신호탄인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만 만나.. 라는거야?"
"그건 아니지."

"그럼 뭐야?"
"일종의 컴플레인이랄까."

"원하는게 뭔데?"
"애프터 서비스를 해달라는 거야. 사랑했으면 책임을 지라고."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정말 이 여자애는 영악해. 머리가 너무 좋아. 나는 '애프터 서비스'라는 단어의 선택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너무나 적절해서 혀를 내둘렀다.

"내가 무슨 전자제품이야? 애프터 서비스를 해주게?"

아직도 나는 농담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아쉬울 게 없어. 사랑에는 기술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구. 니가 그런 테크닉을 습득하지 못해서 아쉬울 사람은 너밖에 없을껄."

여전히 이녀석의 말은 어려워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하는 동안에도 말은 이어졌다.

"즉 내 말은, 넌 사랑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너무 서툴러. 내가 조교해 줘야겠어."


퇴근길 전철 안.
그래서 다음부터 내가 사랑을 훈련시켜줄께.. 라고 해서 헤어진지가 일주일이 지났다.
물론 나도 사람을 사귀는게 처음이긴 하지만, 이런 여자는 정말 처음이다. 당돌하고 영리해서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젤까, 흐음..

"역시 조룬가.."

걱정이 되서 나는 가는 길에 약국에 들려 SS크림을 샀다.


"꽃."
그녀석은 만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여자를 만나는데 꽃 한송이 없어서야 쓰겠나. 어서 가서 사와. 벌로 100송이다."

나는 기가 찼지만, 어디 좋아 해보자.. 라는 생각에 장미 100송이를 사왔다.

"실망이야."
"또 뭐가 실망이야?"

"겨우 이런 장미 100송이 정도로 사랑을 고백할 생각이었다면, 내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친다구. 좀 금가루도 뿌리고 노란 장미를 사오던가 하는 특별함이 있어야지. 아, 요즘엔 장미를 향수에 절여 놓았다가 파는 곳도 있다던데."

이녀석이 기껏 사줬더니 하는 말이.. 너 장미 100송이가 얼만줄 알아?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기껏 사놓은 SS크림이 아까워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하. SS크림이네."
들켰다.

"이건 가벼운 마취제야. 신경을 마비시켜 둔감하게 하는 것 뿐이라구."
나는 왠지 모를 모멸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봐봐. 넌 역시 훈련이 필요해. 조루란건 말이지 철저히 심리적인 거야.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심리적 바운더리가 몇가지 있는데, 조루는 그 첫번째 경계선 조차도 넘지 못하는거야. 즉 겁을 내고 있다는 거지."
나는 이녀석이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바라보니까 왠지 울화도 치미고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 뺨을 붉히네? 너 이런 적 있었니? 부끄러운 거야? 하하."
그녀석은 정말로 즐거운 듯이 웃었다.

"자, 내가 가르쳐줄께. 천천히 해봐. 천천히. 그렇게."

그렇게 녀석의 조교는 시작되었다. 정말 녀석은 섹스의 천재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다방면의 깊이있는 성지식을 쌓았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걸 다 맞춰주느라 힘들어서 녹초가 되어 버렸다.

'나는 뭣때문에 이녀석을 사랑했던 거지?'

나 자신에게 회의가 들었다. 나 따위는 상관도 안하고 나를 이용해먹는 것 뿐이잖아. 이래서야 나는 움직이는 딜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왜 그래?"
나는 마치 고장난 딜도에게 말을 거는듯한 여왕님의 면전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래 난 고장난 딜도다!"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나는 마치 오바이트를 하듯이 말을 쏟아냈다.

"그래 난 니 성적 쾌락도 제대로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건전지가 다 닳아서 모터가 붕붕 돌아가서 진동도 시원찮고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망가진 딜도라구! 나같은 걸 어디다 쓰겠어 그냥 쓰레기통에나 버려야지 애프터 서비스도 제대로 안 되는걸!"

말해놓고 보니 좀 우습기도 하고 화를 낸게 맞나해서 멋적어 하고 있는데..

동그래진 그녀석의 눈에서 안약을 넣은듯 물이 고이더니 뚝뚝 떨어졌다.
아아, 눈에서 물이 나오는구나.. 가 아니라 슬퍼하잖아 이녀석!

고백하건데 그때 처음 여자를 울렸다.


"야.."
"그래 맞아. 기술적인 결함이야."

"뭐?"
"사랑을 훈련시키면, 사랑을 더 잘 하게 될거라는 내가 잘못이었어."

"미안해."
"그건 내 대사야."


어찌됬건, 여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나는 그녀석을 안아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것이 오랜만의 기분좋은 경험이었다. 가슴께가 척척하게 젖는 것이 마음에 묘한 파동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녀석도 서툴렀던 모양이구나.. 나는 내가 첫사랑이라 나만 서툰 줄 알았어. 그렇게 보면 다행이네.

"다행이지."
"어라? 어떻게 내 마음을 읽은거야?"

"나도 첫사랑이니까."

심리적으로는.. 이라는 말이 들리는 듯 했지만, 자잘한 건 무시하기로 할까.

그날 여관비가 아까워서라도 한번 더 했던 것도 무시하기로 하고.
그 후로도 그녀석이 점점 여왕님을 닮아갔던 것도 무시하기로 하자.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는 어떤 것도 무력하니까.


written by xacdo 2003 07 22

"다나카 유타카 - 못말리는 달링 - 능숙한 그녀의 사랑법"에 나오는 대사 "좋아하는 여자애를 기쁘게 해주는 방법같은 건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에서 착상을 얻었습니다.
|hit:3005|2003/07/22
  
xacdo 그보다 어떤 게시판에서 요즘 커플들이 너무 유치하게 논다는 말에 "좋아한다면 방법같은건 상관없는거 아닐까"는 리플에서 착상을 얻었던 것 같다. 2003/07/23  
스토우 아이디어가....좋아요. 너무 좋아... 2006/01/04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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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cdo 2003/07/22 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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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cdo 2003/07/22 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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