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와
에반게리온은 많은 점이 닮아 있습니다.
하긴 매트릭스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따라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겠지요.
제가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매트릭스는 세상에 선보인지 몇년 안 됩니다.
그런데 에반게리온이 세상에 나온지 10년 가까이 되었으니 충분한 분석이 있었겠고,
에반게리온이 어땠나 따져보는 것이 매트릭스가 어떤가 알아보는데 도움이 되겠죠.
그래서 일단 에반게리온부터 보겠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대단한 붐을 일으켰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른바 오타쿠집단인 가이낙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당시 유행하던 용자물 시리즈와는 달리, 좀 더 진지하고 대단한 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드려고 했는데요, 감독으로 온 안노 히데야키 씨도 보면 원래가 로봇 쪽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대체로 괴물같은 디자인을 하거나 남녀간의 복잡한 사랑이야기에 관심이 있었죠. 그래서 후반부에 스토리가 삼천포로 빠지는 데 일조하기도 했죠. (안노 감독이 나우시카의 괴물 디자인을 했다는건 많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너무 괴물같이 그리니까 지브리에는 안맞는다고 ?겨났죠)
어찌怜? 전에 NHK에서 '플란더스의 개' 작은아씨들' 같은 '세계명작'시리즈의 일환으로 가이낙스에 맡겼던 '해저 2만리'의 21세기판 '나디아'가 꽤나 인기가 있었던 탓에, 이번에 대박 터트리면 진짜 뜬다는 생각으로 다들 부풀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전부터 그랬듯이 온갖 것들을 마구 모아서 정말 대단한 것을 해보려고 포부에 차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해저 2만리'의 재해석으로 시작했던 나디아가 결국 그 꼴이 난 걸 보면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怜?가이낙스는 삼천포로 빠지는데 천재들이니까요.
정말로 진지하긴 했나 봅니다. 애들용으로 안 만든다고 하면서, 로봇 애니메이션이면 당연히 협찬을 받아야 할 완구회사의 협찬도 거부했습니다. 덕분에 '완구형 디자인'은 피해갈 수 있었죠. 하지만 결국에는 협찬을 받지 못해서 로봇과는 영 관련이 없는 맥주회사라던가 세가라던가 하는 곳에서 협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사토의 맥주 마시는 장면이 만들어진 것이고, 에반게리온 게임이 세가 새턴 용으로만 발매된 것입니다.
어찌怜?에반게리온은 TV방영을 시작했습니다. 뭔가 화려하고 대단한 액션이 있긴 한데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만 줄창 늘어놓는 통에, 시청률은 7%대에 그쳤고 그다지 인기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후반부에는 셀을 살 돈조차 없어서, 예전에 방영했던 부분을 짜집기해서 목소리만 입혀 방송하는 엽기적인 시도까지 했었죠. 그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심리묘사, 그것의 정체가 사실은 자금난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너무 방대해진 스토리에 감당을 하지 못한 스탭들은, 이왕 간거 갈데까지 가보자 하면서 말도 안되게 스케일을 크게 한채 결말도 보여주지 않은채 갑자기 끝내버립니다.
결국 TV방영이 끝난후, 끝없이 궁금증만 안겨준 스토리에 발광하는 팬들이 늘어나고, 재방영이 시작됩니다. 이제 봤던 사람이 또 보는 셈이죠.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로 궁금증만 늘려 놨으니 자꾸 다시보고 싶게 되는 것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게 봐도 봐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도대체 벌려만 놓고 수습을 안하는 끝도 없는 미궁, 그 끝에 있는 '레이' 라는 캐릭터. 매일매일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나지 않는 결론에 에바 매니아는 자꾸만 늘어갑니다.
에반게리온의 재미는 바로 '내용의 포만감'에 있습니다. 안노 감독도 밝힌 바 있지만, "독자의 서비스라는 측면에서, 내용의 분량은 정말 뛰어났다고 본다"고 합니다. 정말 보면 끝도없이 많은 내용이 감당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도저히 한번에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 놨습니다. 심지어 어떤 장면은 1초도 안되게 지나가서 일시정지를 하고 봐야 보일 정도입니다. 사실은 그게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장면일지라도 말이죠. 정말 애가 타는 일입니다. 영상물의 특징은 "흘러간다"는 것, 아무리 천천히 보려고 노력해도 천천히 볼 수 없다는 점을 역이용한 겁니다. 에반게리온의 1화분은 다른 애니메이션의 4-5화분 수준입니다. 속도가 거의 지난줄거리 수준이죠. 정말 열심히 봐야 하고 까딱이라도 놓치면 앞뒤가 안 맞습니다. 보는 사람으로선 죽을 맛이죠. 그런데 그래도 궁금하니 어쩜니까, 봐야죠.
이 점에서 매트릭스와 에반게리온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사실 매트릭스의 재미는 그 엄청난 분량에서 옵니다. 매트릭스 안에는 그게 제대로 된 것이든 아니든 엄청나게 많은 철학, 신화, 애니메이션 등 많은 것이 들어있고, 그 속도 또한 대단히 빨라서 한번에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분명히 눈 앞에서 뭔가 지나간 것 같은데 뭔지는 모르겠고, 난해한 대사는 궁금증을 유발하죠.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설명을 안해줍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저건 또 뭐야? 바로 이겁니다. 이게 매트릭스의 재미고 에반게리온의 재미입니다.
아 이걸 보니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나왔을때가 기억나는군요. 최종 완결이라고 나왔던 극장판에서 밝혀진 비밀이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환상을 깨버렸습니다. 그때 레이의 인기가 엄청나게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 레이라는 캐릭터도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 속에서 자라난 환상의 캐릭터였으니까요. 그런 점을 보면 결국 에반게리온이나 매트릭스의 재미는 독자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에반게리온이나 매트릭스를 보면서 재미를 느낀다면 그 재미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매트릭스나 에반게리온의 재미는 독자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다'는 부분의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 부연합니다.
저는 게임을 무진장 못합니다. 하고 싶긴 한데 요즘 나오는 게임들은 정말 어렵더군요. 스타크래프트가 인기가 있다길래 좀 해보려다가.. 무슨 놈의 게임이 공부해야 할 것이 그렇게 많은지 끙끙 매다가 결국 때려 쳤습니다.
하지만 게임이 재밌는 건 알기에 하고 싶긴 한데.. 그래서 제가 생각해 낸 방법은 다른 사람 하는 걸 구경하는 겁니다. 일단 동생에게 게임을 사주고 저는 뒤에서 하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드라마나 영화 보는 식으로요. TV에서 게임채널에서 해주는 프로게이머의 경기를 구경하듯이요. 물론 직접 하는 것보다는 재미가 없겠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
제 동생은 어려운 게임을 즐겨 합니다. 요즘은 길티 기어라는 격투게임만 몇달째 하고 있지요. 그 수많은 기술과 응용을 매일매일 게시판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생각하고 해보고 익히고 응용하고 하는 것을 질리지도 않고 계속 하더군요. 마치 게임을 공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저도 해보고 싶긴 한데 워낙 게임이 어려워서 엄두가 나야죠..
음.. 얘기가 좀 딴데로 빠졌군요;; 어쨌든 영화와 게임의 차이는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느냐 수동적으로 참여하느냐 문제인 것 같습니다. 게임은 일단 마우스나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뭔가 액션을 취해야만 리액션이 나오죠. 철저하게 능동적입니다. 계속 무언가를 생각해야 하고 응용해야 하죠.
그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는 수동적입니다. 일단 재생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지가 알아서 다 설명해주고 보여주고 흘러갑니다. 독자는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죠. 뭐 그 상황에 자기가 뛰어들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선택도 필요없습니다. 참 편하죠. 그래서 게임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영화 싫어하는 사람은 없나 봅니다. 싫어하는 영화는 있더라도 영화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워낙 받아들이기 쉬운 매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반게리온이라던가 매트릭스 같은 (만화)영화 말입니다. 이건 그냥 의자에 등을 기대고 떡하니 재생버튼만 누르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보면서 열심히 대사의 의미를 생각하고 세계관을 응용해서 상황에 끼워 맞춰야 합니다.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죠. 마치 게임처럼요. 바로 이점이 포인트입니다. 가만히 그냥 보면 이해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열심히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야 비로소 재미가 느껴지는 게임같은 영화죠.
퍼즐게임의 예를 들겠습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면 그곳에는 '룰'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비싼 돈을 주고 불과 룰에 불과한 것을 산 겁니다. 그 룰 안에서 어떻게 응용을 하면서 게임을 즐길 것이냐는 전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분명히 제작사에서는 그 안에 재미있는 요소들을 곳곳에 집어넣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게임은 직접 하면서 그 재미를 찾아내지 않으면 재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보드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3-4만원의 비싼 돈을 주고 사면 그 안에는 주사위 몇개와 종이 쪼가리들만 들어있습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보드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건 원가가 5천원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뭐가 이렇게 허접해. 처음 보드게임을 할 때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이죠. 하지만 일단 손에 카드를 들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손에손에 카드를 들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게임을 즐기다보면, 어느새 돈 생각은 사라지고 게임에 빠져들게 됩니다. 보드게임의 예가 어렵다면 화투를 들겠습니다. 참 그 간단한 룰 가지고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즐겨오셨습니까. 혹자는 화투의 재미는 도박성에서 온다지만, 설령 돈이 안 걸린다 하더라도 재미있는건 재미있는 겁니다. 실제로 요즘 유행인 보드게임에는 도박성이 거의 빠져있습니다. 그래도 건전하게 밤새워 즐길 수 있죠. 즉 우리는 단순한 룰, 생각의 틀 만으로도 즐길 수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즉 이것은 생각의 틀을 파는 겁니다. 그 안에서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놀 수 있는 틀을 비싼 돈을 받고 파는 거죠. 이런걸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매트릭스의 가장 큰 재미는 세계관에서 옵니다. 이 세상이 사실은 완벽한 가상세계라는 것, 실제 세상은 너무도 암울한 상태라는 것,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역으로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 그것을 초월할 방법이 과연 있는가 하는 질문.. 이런 이 세상에 대한 체계적인 비유를 가지고 생각하는 재미. 불과 생각의 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안에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독자에게 달려있죠. 매트릭스의 재미는 독자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ps. 저도 이렇게 말은 하지만, 처음에 밝혔듯이 게임도 못하고, 화투도 못 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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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 2003 0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