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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글씨연습이 하기싫다

14/05/12 04:05(년/월/일 시:분)

요즘 기술사 공부를 하면서 가장 고역인 것이 글씨 연습이다. 나는 원래 글씨를 엄청나게 못 쓰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글씨를 가장 지적받는다.

글씨연습은 정말로 하기가 싫다. 이것은 나의 마음가짐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편한 마음으로, 손 가는대로 자유롭게 적어내는 걸 좋아한다. 손목에 힘을 풀고, 자연스럽게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씨가 나빠지는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이해를 받기보다는 내가 좋을대로, 어떤 형식을 지키기보다는 자유롭게, 논리를 철저히 따르기보다는 논리의 비약을 즐기며,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싶은대로 내 뜻대로 그냥 마구 휘갈기는 것이다.

좋은 글씨란 형식과 태도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가능한 한 곧은 일자로 수평 수직을 이루어야 하고, 획수도 간략화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원래 획 그대로 써야 한다. 또한 글씨가 작아졌다 커졌다가 아니라 일관된 크기를 유지하고, 동그라미나 네모 또한 정확히 획을 끝까지 그려서 완결시켜야 한다. 초성/중성/종성의 배분 또한 치우침 없이 비슷해야 하고, 필압 또한 일정하고 끊김없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최대한 곧게 뻗어야 한다.

이 모든 빡빡한 규칙을 지켜서 정성들여 글을 쓰니, 손아귀의 근육과 관절이 벌써부터 뻐근하다. 볼펜을 받치는 오른손 엄지는 처음 기타를 칠때처럼 물집이 생길랑 말랑 한다. 목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오고, 눈도 침침해지고, 왠지 배도 살살 아파온다. 시간도 엄청 오래 걸린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일단 너무 하기가 싫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멀리 창밖을 쳐다본다. 교실의 사람들도 둘러본다. 볼펜을 뱅글뱅글 돌리다가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낙서가 너무 재밌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왜 기술사 시험은 컴퓨터로 안 보는 건가? 하루종일 8시간이나 종이에 볼펜으로 적고 있어야 한다. 내가 만약 워드에 키보드로 시험을 봤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텐데. 아니 나는 심지어는 대학교 시절부터 태블릿PC를 이용하여 최대한 필기를 안 하고 전부 키보드로 타이핑하거나 태블릿 펜으로 그리면서 때웠다고. 그것도 다 글씨가 쓰기 싫어서 그랬던 거야. 내가 왜 컴퓨터 전공을 택했겠어? 글씨 대신 키보드 치려고 그랬던 거야. 그런데 왜 컴퓨터 시험이 글씨로 쓰고 있냐고...

속으로 불평을 해봤자 시험시간은 째깍째깍 지나갈 뿐이다. 그렇게 멍때리고 있는 와중에 벌써 10분이나 지나버렸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답안을 쓰려고 하는데 아뿔싸,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 나의 오른쪽 2번째와 3번째 손가락이 나의 깊은 무의식을 대신하여 파업을 벌이고 있다. 팔목을 밀어서 억지로 글자를 써보지만, 아무리 해도 손가락이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한숨을 푹 쉬고 손목을 털어 이 나쁜 손가락 반동분자들에게 스트레칭으로 벌을 준 후,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한번 답안을 노려본다.

근데 내 왼쪽 대각선 앞에 앉은 사람이, 모의고사 중에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방금 10분 전만 해도 답안 쓰기를 포기하고, 무려 팔짱을 끼고 잠을 청하던 사람이 말이다. 고작해야 야구 게임에 불과하지만, 나는 왠일인지 그 배짱이 정말 부러워지는 것이었다. 나도 당장이라도 답안지를 쭉쭉 찢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며 "내 글씨가 뭐가 나빠!"라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바로 다음순간 나의 옹졸한 마음을 자책하며 그저 망연자실하게 그 앞사람의 무척 재미없어보이는 야구 게임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꾸준히 공들여 연습하다보면, 손가락에 굳은 살도 생기고 근육도 붙어서 글씨가 금방 좋아질 것이다. 나도 기타를 처음 배울때, 특히 F 코드를 잡을 때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하면 잘 될 것이다. 나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냥 정말 글씨연습이 오지게 하기가 싫다.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2490

  • 기술사 14/07/03 04:54  덧글 수정/삭제
    블로그 글 잘 읽고 갑니다. 글 쓰시는 솜씨를 보니 기술사에 꼭 합격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도 처음에 글씨 때문에 고생했지만, 결국 콘텐츠가 쌓여가고 자신의 논리가 살아나면서 합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합격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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