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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 위해 이해해야 할 점

07/03/29 02:07(년/월/일 시:분)

요즘에는 음란물과 성폭력 관련 논문과 판례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참 나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성 통념에 많이 물들어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다. 특히 나는 아래의 "가해자 치료 프로그램"의 항목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통감했다. 그 항목들을 잠시 함께 보자.

가해자 치료프로그램의 근본 목적은 폭력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부부상담과 가족치료는 가해자가 자기 폭력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폭력을 자제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아내가 남편의 폭력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때 그 효과가 있다. 가해자 치료 프로그램에서는 폭력에 대한 ‘책임성’ 부분에 대해 가해자가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질 때에야 법원에 상담이 성공적으로 종결되었음을 보고할 수 있게 된다.

. 자신이 여성을 폭행했고 조종했으며 그녀의 뜻에 거슬러 폭력을 행사했음을 인정한다.
. 자신의 행위가 아내/애인에 의해서 도발된 것이 아니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임을 인정한다.
. 자기가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내/애인으로부터 어떤 호의적 반응을 기대하고서 하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 자신이 아내/애인의 용서를 받을 권리가 없음을 이해한다.
. 아내/애인이 자신을 다시는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영원히 자기를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 자기의 명예가 보호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 자기가 앞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평화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함을 안다.
. 폭력의 원인이 자기와 아내/애인과의 관계나, 그 여성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 앞으로 다른 여성을 구타할 위험성(가능성)이 자기에게 있음을 안다.
. 자신에게 폭행당한 여성은 스스로가 원해서가 아니면 위의 사항들을 자신으로부터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없음을 인식한다.

James Ptacek, "Why Do Men Batter Their Wives," in Issues In Intimate Violence, 186-94; Korean American Women In Need, 『자원봉사자교육자료집』, 19-20.

http://blog.naver.com/yjpyeon/30015378485
관계(relationship) 사이에 흐르는 힘(power)
고영순(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

즉 여기 있는 대로 용서를 구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나는 니가 잘못해서 때린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때렸다는 것 자체가 나의 잘못이고, 내가 술을 마시거나 요즘 스트레스가 쌓여서 잠시 이성을 잃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내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서 당신이 나를 예전처럼 따뜻하게 대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나를 영원히 다시는 신뢰하지 않고 두려워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내 명예가 이미 실추되었다는 것 또한 알고, 앞으로 나는 또 다시 누군가를 때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나 이외의 누군가가 나를 평화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며,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나는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당신이 이 용서를 받아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한다. 미안하다."

아.. 용서를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마침 어제 뉴스에 이런게 나오기도 했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office_id=003&article_id=0000360061
국제수영연맹, 딸에 폭력쓴 아버지 코치 징계
FINA(국제수영연맹)은 28일(이하 현지시간) 멜버른세계선수권대회 도중 선수인 딸에게 폭력을 휘두른 우크라이나의 미하일 주브코프(Michail Zubkov) 코치(38)에게 징계를 내렸다.


http://www.youtube.com/watch?v=rGJT7IVYn-w
Michail Zubkov fighting with his daughter Katerina Zubkov.

상황을 잠시 설명하자면, 18세 딸이 준결승에서 떨어지자 그녀의 아버지이자 코치인 미하일 주브코프씨가 딸을 질질 끌고 몇대 때렸는데, 이게 그만 TV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혀서 국제적으로 생중계가 되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딸에게 200미터 내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고, 코치 직위도 짤렸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미하일이 딸에게 휘두른 폭력은 상당히 미미하다. 딸이 이 폭력으로 어떤 부상을 입거나 한 것도 아니고, 몇 대 때리려다가 TV 카메라를 의식하고 재빨리 그만 둔 탓도 있다. 물론 38세의 건장한 남성이 18세의 어린 여성, 그것도 수영복만 입고 있는 무력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하지만 정말 보기 싫었던 것은 그 다음이었다. 미하일이 TV 카메라를 의식한 탓인지, 딸에게 용서를 구하고 포옹하려고 했다는 것. 여기서 딸이 조용히 아버지에게 안겼다면 TV에 멋지게 그림이 나올 상황이었다. 하지만 딸은 포옹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도망다녔고, 아버지는 딸을 어떻게든 껴앉으려고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결국 아버지는 딸을 포옹하는데 성공했지만, 딸은 이미 울고 있었고 잔뜩 긴장한 채 어색하게 아버지에게 강제로 포옹을 당하고 있었다.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다.

아마도 미하일은 여기서 딸에게 적당히 용서를 구하고 포옹을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성들의 국제적인 성 통념이 아닐까 싶다. 왜 TV 드라마에도 흔하게 나오잖아, 남성이 여성의 뺨을 한대 후려갈기고, 그 다음에 바로 여성을 와락 포옹하는 거. 그러면 여성은 감동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지.

만약 아까와 같은 상황에서 딸이 이런 남성들의 뻔할 뻔짜 레파토리를 이해하고 있었다면, 아버지의 포옹을 적당히 받아들이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 딸은 너무 어렸다. 그 상황에서 딸은 아버지의 용서나 포옹이 매우 불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한 여성의 반응일 것이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미하일은 딸이 준결승에서 탈락하자 화가 나서 몇 대 때렸는데, 그만 그게 TV 카메라에 잡히고 말았다. 엄청 뻘쭘한 상황. 여기서 그는 어떻게 해야 옳을까? 정답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그는 이해를 해야 한다. 내가 휘두른 폭력은 딸이 준결승에서 탈락해서 그런게 아니고,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도 아니다. 나는 이미 딸에게 어떤 호의적 반응도 기대할 수 없으며, 용서를 받을 권리도 없다. 이제 딸은 아버지를 다시는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영원히 자신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또한 이미 나의 명예는 추락했으며, 보호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앞으로 나는 또 폭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에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들여야 하며,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법적 구속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폭력의 원인은 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에게 있다. 그리고 내가 용서를 구하더라도 딸이 그 용서를 얼마든지 안 받아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가장 무력한 용서, 상대에 대한 어떤 이해도 구할 수 없는 가장 무력한 용서.

인간이 인간에게 바랄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

정말, 미안해요.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647

  • jubeiory 07/04/03 03:58  덧글 수정/삭제
    흥미롭네요.
  • 오거 07/05/29 08:09  덧글 수정/삭제
    보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니 싫다는데 왜 자꾸 안으려 드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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