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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와 마빡이

06/10/25 23:45(년/월/일 시:분)

야동 소년에 redpanda님이 "노인과 바다에서 사자꿈을 꾸던 노인이 생각나네요."라는 댓글을 남겨주셔서, 노인과 바다를 봤다.

일단 내 생각에 사자꿈은 내가 썼던 여행 가방 꿈과 비슷한 장치일 것 같았다. 이 이야기의 흐름은 지난번 완료되지 않은 파일을 완료하기 위해서와 같이, 될 듯 될 듯 하다가 결국에는 안되는 장엄한 실패기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허무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래도 단순한 실패는 아니고 뭔가 남는 게 있다"는 장치를 넣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만약 야동 소년이 수천 장의 CD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다른 결말을 꿈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사자꿈은 나의 여행 가방 꿈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결말의 허무함을 덜어주는 장치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보인다. 그보다는 완료되지 않는 파일을 완료하기 위해서 에서 마지막에 완료되지도 않는 파일을 보며 꿈과 희망을 갖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아, 마빡이를 왜 언급했냐 하면, 나는 노인과 바다를 보면서 자꾸 마빡이가 생각나더라. 둘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 힘들다. 괴롭다.
- 그 상태로 무지 오래 끈다.
- 그런데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마빡이는 애초에 자학 캐릭터다. 자신의 몸을 때리며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데, 그게 전혀 무섭지 않고 우스꽝스러워서 개그가 된다. 자기 딴에는 무섭게 하려고 열심이지만, 끝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고통스러워 한다. 그래서 처음 의도했던 무서움 대신 우스움이라는 약간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물고기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결국 잡긴 하지만 다 상어에게 물어뜯겨 뼈만 남는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그 과정을 아주 자세하고 길게 늘였다는 것이다. 정말 처절할 정도로 길게. 마빡이도 그래서 개그콘서트 코너 중에 가장 길다. 노인과 바다에서 이 고통스러운 부분을 얼마나 길게 표현하는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노인은 84일간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 항상 도와주던 소년도 부모님의 만류로 노인을 떠났다.
- 그러다 얼떨결에 무진장 큰 물고기를 낚는다.
- 그런데 물고기는 낚인채로 계속 버틴다. 노인도 포기할 수 없다.
- 그 상태로 하루 밤을 샌다.
- 야구 생각, 라디오 생각을 한다.
- 노인의 손에 피가 난다.
- 노인의 손에 쥐가 난다.
- 종교가 없는데도 주기도문과 아베 마리아를 10번씩 외운다.
- 발뒤꿈치도 고통스럽다.
- 옛날 술집에서 내기 팔씨름 챔피언 하던 생각한다.
- 그렇게 이틀이 지나도록 노인은 2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 배가 고파서 아까 잡은 날치를 뼈째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는다. (미국 어부인 점을 감안하라. 대단한 집념이다.)
- 노인의 등과 왼손이 낚시줄에 더 찢긴다.
- 물고기가 갑자기 뛰는 바람에 바닥에 내동댕이 쳐 진다.
- 낚시줄이 끊겨서 다른 낚시줄로 잇는다.
- 물고기를 잡으면 주기도문과 아베 마리아를 100번씩 외우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물고기를 잡느라 외지 못한다.
- 현기증이 나고, 구역질이 나고, 입이 마른다. 하지만 물고기를 놓칠까봐 물도 못 마신다.
- 결국 물고기 Get! ㅊㅋㅊㅋ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 기껏 잡았는데, 물고기가 노인의 배보다 크다. -_-
- 그래서 배와 나란히 끌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피 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몰려든다.
- 첫 번째 상어는 덴투소 상어. 우아한 상어지만 작살로 죽인다.
- 두 번째 상어는 삽코 상어. 밉살스러운 상어라서 작살로 죽인다.
- 물고기 살이 뜯겨서 배가 가벼워진다.
- 그 다음 상어는 갈라노 상어. 이젠 작살도 없어서 몽둥이로 때린다.
- 그 다음 상어는 부러진 키로 때린다.
- 배에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서 상어를 공격한다. 그러나 남은 것은 물고기의 뼈 뿐.

결국 노인은 이렇게 고된 과정을 거쳐서 처음 가지고 있던 희망을 끝내 잃고 패배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평소 즐겨 꾸던 사자꿈을 꾸며 잠이 든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대한 물고기가 뼈만 남은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인간이 일생을 거쳐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물고기의 뼈 정도밖에 안 된다. 살코기는 가지고 갈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작 물고기의 뼈 정도로도 감동을 받는다. 그게 딱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자 최대한의 것이다.

마빡이가 웃긴 이유도 오랜 시간동안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지. 인생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통으로부터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고 울고 웃고 감동받고 하는 것이다.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506

  • 황진사 06/10/26 06:42  덧글 수정/삭제
    결국 다른사람의 고통을 보고 웃고 감동받고...
  • 익명의장병 11/01/15 15:04  덧글 수정/삭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은..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군녀..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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