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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데이즈에 대한 악평 하나

출처는 신비로 애니피아라고 하는데..
나는 이 글에 전혀 동의를 하지 않지만, 분량이 많은 탓에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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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단계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던 '원더풀 데이즈'를 오늘 가서 보고 왔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의 감상문을 읽으면서 '이번에도 역시나...'하는 실망감과 아울러,
그래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다소의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감상을 했습니다만... 결과는 역시 전체적으로 실망이었습니다. 어떤 면에
서 실망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화면

감독이 '미장센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곧 드러납니다. 미니어쳐와 3D 그래픽을 이용해서 만든 배경 화면과 메카닉들은 실
로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그 퀄리티가 얼마나 높은지 황홀할 지경입니다.
커다란 극장 화면에서 보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봐도 전혀
지겹지 않을 만큼 초극상의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만약 이것이 단순히 게임 동영상
이었거나 뮤직 비디오였더라면, 입술이 부르트도록 찬사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입니다. 문제는 '원더풀 데이즈'는 어디까지나 '만화 영화'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
다. 때문에 저 대단한 퀄리티의 배경 화면과 메카닉들은 오히려 영화의 큰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눈이 부실 정도로 '원더풀'한 배경 화면 때문에 가뜩이나
칙칙한 캐릭터들이 더더욱 죽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제가 작년에 '오페라의 유령'
한국 공연을 보러 갔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뒷좌석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웅
장한 무대 시설에 비하여 배우들이 너무나 눌려보이는 바람에 무척 아쉬웠었습니다.
'원더풀 데이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눈부신 초하이퀄리티의 배경 화면 때문에, 그 아래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더더
욱 칙칙하고 초라해 보일 뿐더러, 보는 사람들도 전혀 주목을 하지 않게 됩니다.

가령, 많은 분들께서 지적하신 바대로, '원더풀 데이즈'에서는 (단순한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카우보이 비밥'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그중 대표적인 장면은 바로, 에코반에 잠입한 '수하'가 '제이'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배경으로 서로 마주보는 장면이지요. 이장면은 카우보이 비밥에서 비셔스
와 스파이크가 서로 마주보는 같은 장면을 연상시킵니다만,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비밥에서는 비셔스와 스파이크가 어디까지나 화면을 압도하고 관객의 시선을 모읍
니다. 그 뒷배경에 있는 화려한 유리창은 참으로 정교하게 잘 그리긴 했지만, 사람
들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비셔스와 스파이크에게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원더풀 데이
즈에서는 너무나도 눈부신 스테인드 글라스 때문에 수하와 제이의 그 중요한 재회
장면이 완전히 눌려버리는 느낌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하와 제이의 그
애닲픈 재회보다는, '아, 저 유리 정말 잘 그렸다.'라면서 배경에만 더 신경을 쓰
게 됩니다.

예고편에서부터 유명했던 오토바이 질주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면은 정말
멋집니다. 극장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까, 마치 제트 코스터를 탈 때처럼 몸
이 으스스 떨리는 속도감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오토바이 자체도 매우 세심
하고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어,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눈의 즐거움은 오로지 오토바이와 주위의 배경에 의한 것일 뿐, 거기에
타고 있는 제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즉, 초하이퀄리티의 배경 화면은 그 자
체로 아름다움을 과시할 뿐, 영화의 진행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주인공들의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원더풀 데이즈가 CF나 게임 동영상, 혹은 뮤직 비디오가 아니라 '만화 영
화'의 범주에 들고 싶다면, 관객의 시선이 너무나도 높은 퀄리티의 배경 화면이 주
는 압박감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신경쓸 겨를이 없음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
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눈부신 배경 화면 때문에, 그 아
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집중할 수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미장센'의 예술이라
고 해도 결코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더 잘 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배경의 과감한 생략과 단순화로 좀더 캐릭터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어
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연출의 잘못이라고 밖에는
달리 비평할 길이 없습니다.

2. 음악

음악도 아주 뛰어납니다. 효과음도 매우 생동감이 넘치고, 배경음악과 삽입곡도
그 자체로는 정말로 대단합니다. 정말 칸노 요코 같은 뛰어난 애니메이션 음악가의
솜씨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것 같은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이쪽의 '음악'도 영화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멋을 뽐내
는 식으로 겉돌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흘러나오는 이야기
의 내용과 관련된 삽입곡은 관객의 감동을 한층 더 배가시켜주지만, 원더풀 데이즈
의 삽입곡은 대부분의 경우 스토리와 겉돌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단 관객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화면에 집중시켜 놓은 다음, 거기에 음악을 울려줌으로써
감동을 끌어올려야 할 텐데, 보는 이가 전혀 영화 속 스토리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
는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삽입곡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
아름다운 음악 아래에서 펼쳐지는 별로 설득력 없는 장면의 연속을 보면서 사람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되고, 잘해야 그저 음악과 높은 퀄리티의 배경 화면만을 감상하
며 스토리를 무시하는, 일종의 80여분 짜리 뮤직 비디오 관람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너무나도 훌륭한 음악 또한 원더풀 데이즈라는 '만화 영화'에는 별다
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인물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아니면 앞으로 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별다른
개성이나 외모상의 매력 포인트가 없음은 물론, 특별히 보는 사람이 지켜보면 감정
을 이입하고 감동을 느낄 만한 활약을 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점이,
평론가들이나 파악할 만큼 심오한 수준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최대한
비우고 보는 일반 관객 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무리 진부하고 몰개성적일 뿐더러, 별다른 활약도 안하고, 가끔씩 쓸
데없는 폼만 잡는 캐릭터에도 매력을 느끼시는 분이 분명히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저를 비롯하여 적어도 상당수의 애니메이션 팬들께는 그다지 인상에 남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다가 그나마도 그런 매력없는 캐릭터가 오락가락하는 모습은, 앞서
언급한 대로 무시무시할 만큼 놀라운 퀄리티의 배경 화면에 묻혀 별반 주목을 못받
게 되기 십상입니다.

캐릭터가 관객에게 던져주어야 할 것은 '강한 인상'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은 그것이 WWE 프로레슬링처럼 아무
리 작위적으로 꾸며진 것이라도 그 캐릭터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더풀 데이즈의 캐릭터들은, 하다 못해 잔뜩 욕을 얻어먹는 일본 상업 애니
메이션의 싸구려 미소년/미소녀들보다도 인상적이지 못합니다. 그나마도 인상적일
수 있었던 모습은 놀라운 퀄리티의 배경 화면에 묻혀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고 말았
습니다. 거기다가 주인공이 맞는지 상당히 의심스러운 '수하'의 성우분은 연기력이
형편없습니다. 목소리 자체는 분명 꽤 미성입니다만, 대사에 감정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고, 아무리 다급한 상황에서라도 책읽듯이 또박또박 낭독을 하기 때문에,
조금 많이 애니메이션을 보신 분들이라면 최소한 뭔가 꺼림칙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다른 주역 캐릭터인 '제이'의 성우 은영선 씨도, 지나치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분위
기를 잡으려다가, 그것이 지나쳐서 인물의 개성을 더 감퇴시키고 만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시몬'의 성우인 오인성 씨가 상당히 연기를 잘 하신 것 같습니
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참신한 목소리가 아니라는 비판을 들을 각오를 하고라도,
김승준 씨나 정미숙 씨 같은 귀에 익숙한 베테랑 성우를 기용하는 편이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덕분에 보고 난 뒤에 제게 남은 캐릭터의 '인상'은 거의 전무
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캐릭터가 있어야 캐릭터 상품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텐데, 과연 보신 분들 중에 얼마나 (황당함이 아닌) 진지한 인상을
받으실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4. 스토리

이쪽도 할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복잡하고 심오한 얘기를 되는 대로 뜯어내어 짧은 러닝 타임에 억지로 구
겨넣은 느낌이 든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무지 보고 나서도 할 말이 없습
니다. '내가 도대체 뭘 본 거지?' 차라리 아무 것도 안 본 느낌입니다. 아니, 눈이
아프도록 놀라운 퀄리티의 배경 화면을 질리도록 감상하다 오기는 했군요...

왜 하필 환경 문제냐 하는 부분도 넘어갑시다. 불지를 석유가 있으면 차라리 그걸
에너지로 때지 않고 하는 부분도 넘어갑시다. 오염물질을 빨아들여 에너지로 바꾸는
꿈의 친환경적 시스템이 왜 '악의 축'으로 묘사되는 건지 하는 의문도 넘어갑시다.
무슨 철통같은 경비 시스템이 저렇게 연속적으로 마구 뚫리고 또 뚫리는지도 넘어갑
시다. 반쯤넋이 나간 총독과 카리스마 없는 미친 악당처럼 보이는 부관이 어떻게
그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계속 유지하는지도, '그러니까 도시가 망하지...'하는 생
각을 하고 넘어갑시다. 햇빛도 제대로 안 비치는 세상에서 식물은 어떻게 키우며,
공룡이 멸망할 때처럼 지구의 기온은 왜 안 떨어졌는지도 그냥 넘어갑시다. 백년동
안 오염물질을 빨아들여 이젠 남아나지 않아 새로 유전에 불까지 질러야 할 판국인
데, 왜 하늘은 저렇게 우중충한지도 넘어갑시다. 그렇다면 예전엔 대체 얼마나 오염
이 심했으며, 그랬는데도 도시 밖 사람들은 어떻게 멀쩡하게 잘먹고 잘살고 있는지
도 넘어갑시다. 누가 자기 시스템의 데이터를 다 빼갔는데, 거기에 어떠한 보안적
추가 조치도 하지 않아 멸망을 자초했다는 점도 넘어갑시다. 글라이더가 바람에 한
번 날려서 어떻게 저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상징적인 화면이려니
하고 넘어갑시다. 마지막에 다들 무중력 공간 비슷한 곳에 떠있는 장면도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넘어갑시다. 델로스 에너지인가 하는 것이 방출되자마자 하늘이 새
파랗게 정화되는 장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시다. 치명상을 입은 제이가 마
지막에 왜 죽지 않았는지도 넘어갑시다.

이 하나하나는 사실 헐리웃 영화나 어지간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나올 만한
스토리상 의문들입니다. 또한 이렇게 저렇게 끼워맞추다 보면 말이 되도록 만들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 혹은 '관객이 이리
저리 끼워맞춰 말이 되게 만들어야 할 대목'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어지간히 흥
행에 성공한 헐리웃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는 헛점에 비해 양이 너무 많
습니다. 그렇다 보니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어? 저게 왜 저래?'하고
의혹을 느끼게 되고, 결국 끝나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멍한 상태가 되고 맙니
다. 다만, 놀라운 퀄리티의 배경 화면만이 기억에 남지요. 아무리 실제로는 설정이
충실하고, 단지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스토리상
불완전한 작품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들의 행동 역시 의문점이 많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해야 낮게 깔은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짧은 시간 내에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
뿐만 아니라 활약상까지도 다 보여주려고 하다보니, 결국 수박 겉핥기만도 못한 어
설픈 결과가 초래되고 만 느낌입니다.

주인공 '수하'는 전혀 주인공 답지가 않습니다. 평론가 수준의 분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선 한일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스토리상의 헛점이 많은 헐리웃 영화
라도 적어도 주인공은 혼자서 때리고 도망치고 부시고 온갖 '생쇼'를 다하는 슈퍼맨
식 활약을 보여주어 관객을 즐겁게(?) 해주죠. 헌데 주인공이라고 불리는 '수하'는
정말 아무 것도 안합니다. 처음에 할아버지의 지시로 에코반의 델로스 시스템 데이
터를 훔쳐온 것이 전부이고, 그외에는 영화 내내 '너에게 파란 하늘을 보여주겠다'
는 말과 함께 먼곳을 응시하며 분위기를 잡는 것 뿐입니다. 물론 가만히 생각해보면
높은 곳에 올라가 파란 하늘을 보기 위함인지 글라이더를 열심히 만들기도 하지만,
그 역시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감독 스스로 인정한대로 '스토리
상으로 불친절'합니다. 그리고 그 불친절은 관객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실소를 자아낼 뿐입니다. 시나리오 자체가 실제로 상당부분 진부한 장면들을 차용하
고 있음도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참신한 부분 조차 영화 내에서는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주인공(?) 수하는 마지막에야 겨우 활약을 해볼까 싶어 에코반에 잠입하지만, 결
국 아무 것도 못하고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쓰러진 채, 벌어지
는 일들을 구경만 하지요. 맙소사... 당신 주인공 맞아? 멍하니 세월아 네월아 시간
을 보내던 수하가 왜 갑자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에코반으로 잡입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동기 부여가 부족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제가 보기엔 부차적인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스토리의 핵심이 되어 극의 흐름을 주도해야 할 수하가 사실상 별반
하는 일이 없다는 것 그 자체입니다. 오히려 경비 대장 시몬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극을 주도해 나갑니다. 수하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 에코반으로부터 쫓아내고, 침입
사건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수하를 추적합니다. (아마도) 그 결과 수하는 델로스 시
스템이란 것을 망가뜨릴 마음을 먹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심지어 마지막엔 결정
적인 순간에 화면 위쪽에서 거꾸로 스윽 나타나 '악당 보스'(?)라고 추정되는 총독
부관까지 쏴 죽이고, 방출되는 델로스 에너지 속에서 수하와 제이를 무사히 탈출시
키고 최후를 맞지요. 이거 완전히 주인공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실제 극의 흐름은
수하를 주인공으로, 시몬을 그에 대립되는 악역으로 간주하고 진행됩니다. 여기서
상당한 어긋남이 발생하게 되지요. 수하보다는 오히려 조역인 레지스탕스들이 더 열
심히 싸우고 활약하려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거의 유일한 주요 여성 캐릭터라서, 여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제이의 경우는
별로 매력도 없고 개성도 없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멋진 질주를 하고, 정면으로
날아오는 무시무시한 식칼에도 전혀 겁을 내지 않는 등, 예고편에서는 주인공 못지
않은 활약(?)을 보였으나, 실제 극중에서는 옛연인과 재회해서 품에 안기고 마지막
에 총을 맞은 그를 대신하여 델로스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그 묘한 캡슐(?)을 꽂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로 보입니다. 그 멋진 오토바이 질주 장면도 아무런 의미가 없
어, 그저 '우린 이런 멋진 영상도 만들 수 있다'라고 광고(?)하는 정도로 밖엔 안
보입니다.

그외 꼬마 애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의 눈먼 여자애는 정말 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시몬 때문에 혼수 상태에 빠진 꼬마 남자애가 수하에게 에코반에 잠입하
게 만드는 직접적인 동기 부여를 해준 것 정도라고나 할까요? (물론 이같은 추측 역
시 '불친절하게 제시된' 스토리를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보완해본 결과 나온 것입
니다.)

결국 스토리는 전체 그림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지는 몰라도, 관객이 보기에는
엉성하고 따라서 공허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스토리라도 이런 식으로 불친절
하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제시되고, 관객이 나머지 부분을 열심히 고민해서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면, 이건 '미장센의 예술' 운운하기 전에, '불완전한' 영화
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5. 연출의 문제

이러한 문제는 결국 연출력에 책임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CF 감독 출신인
김문생 감독은 확실히 화면 구성면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그것은 '영화'를 좀더 완성도 높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될만큼 배경을 너무 잘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미장센의 예술'은 영화라는 측면에서는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제이의 샤워씬에서 보듯이, 소용돌이치며 배수구로 들어가는 목욕물의 흐름을 너무
나도 높은 퀄리티로 묘사한 것은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군더더기로 보입니다.
감독에게 무슨 심오한 뜻이 있었다고 해도, 보는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간다면 역시 '스토리상으로 불친절'한 불완전한 작품일 뿐이지요. 거기다 너무나
진부한 장면과, 웅장한 클래식이 흐르는 가운데 펼쳐진 마지막 무중력씬에서 난데
없이 튀어나온 시몬의 개구리 헤엄 장면(?) 같은 황당한 컷 등은 그러한 불필요한
군더더기 이상으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마이너스 요소들
입니다. 이렇게 극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관객을 자연히 몰입시키는 뛰어난 연출
의 기능이 부재하기 때문에, 영화는 완급이 없이 너무나도 높은 퀄리티의 배경 화면
에 점령당한 기나긴 뮤직 비디오로 전락하고 만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것이 김문생
감독 자신이 얼마나 그럴 듯한 영상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한편의 CF'
였다면 모르겠지만, 영화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6. 희망이냐? 절망이냐?

눈부시도록 놀라운 배경 화면과 아름다운 음악에 압도당할 뻔했던 관객들을, 결국
매력도 별로 하는 일도 없는 주인공들이 만드는 진부한 장면에 수시로 실소를 터뜨
리다가 엔딩 크레딧이 나오자 '에, 뭐야?'하고 웅성거리며 일어서게 만든 것은 결국
한국 애니메이션의 절망적인 면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다
가 오랜 시간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한 끝에 나온 성과가 이정도라면, 실로 더더욱
답답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일단 음악과 배경 화면이 놀랄만
큼 뛰어난 것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산업이 적어도 기술적인 문제에서는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충분한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 남은
문제는 바로 그것을 잘 살릴 수 있는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연출력인데, 이것은 역
시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번에 원더풀 데이즈는 우리 애니메
이션 산업이 가진 강점과 보완할 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 줌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단서를 제공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둘 수 있겠군요.

다만, 이번에 흥행에 실패할 경우, 그런 문제점들을 보완하여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큰 기회가 또다시 주어질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원더풀 데이즈를 극장에서 보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좀
긴 뮤직 비디오를 봤다고 생각하면 표가 아깝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은 우리
나라 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전을 위한 진흥 기금으로 기부했다고 생각하지요, 뭐...
|hit:4069|200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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