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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보수와 진보의 미래

14/10/06 07:47(년/월/일 시:분)

1.

(2014년 6월 지방선거 한달 전) 민방위에서 안보 교육을 받았는데 세월호 얘기가 반이었다. 비록 결론은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얘기였지만, 평생을 군대 및 북한학으로 물든 교수님이 깊은 충격과 한국이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이 느껴져 내심 놀랐다.

이번 세월호 사고는 전통적인 보수 지지자들에게조차도 매우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평생 지지해온 정치세력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은 공유한 것 같았다.


2.

수원역에서 꼬장꼬장해보이는 할아버지가 박근혜 대통령 사진을 큼지막하게 등에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런 할아버지에게는 박근혜 대통령이 연예인이자 아이돌일 것이다. 초라한 자신의 삶을 비춰주는 한 줄기 빛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는 정치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무엇을 하던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 진보는 당연히 비판적 지지인데, 보수는 무조건 지지다. 이러니 참 이기기가 어렵다.


3.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지지자들조차도 이번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박근혜 지지자분들도 무조건적인 지지에서 비판적인 지지로 조금 방향을 틀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내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조짐이 조금 보인다.

세월호 사고는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건 아니고, 아마 지금같은 마음가짐 그대로 가면 한 20~30년마다 재발할 것이다. 그냥 이런 사고가능성을 그대로 두고 예전처럼 빨리빨리 싸게만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정신을 차려서 조금 느리지만 안전하고 철저하게 할 것인가? 선택한다면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성장이 모든 것을 용서하던 시대는 지났다. 성장하더라도 잘 성장해야 이번 같은 비극을 막을 것이다.


4.

이미 이념의 시대는 지났고, 좌우를 나누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이 솔직히 모든 사안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진보적 성향이지만 원격 의료에는 찬성한다. IT 하는 사람으로서 볼때 병원의 IT 수준은 솔직히 너무 낮은 수준이고, 고도화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런데 왜 이런 진보적인 기술을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잘 하는 병원을 수소문해서 다니다보니 가끔씩은 차로 한시간, 왕복 두시간 거리를 다닐 때도 있다. 초진이야 자세한 얘기를 듣고 검사도 해야 하지만, 재진부터는 그저 경과만 몇 마디 듣고 아니다 싶으면 처방을 바꾸는 수준이다. 이런 건 그냥 전화로 하고 처방전만 받으면 환자 입장에서 편리하지 않을까? 너무 비효율적이다.

이것은 마치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를 주말에 의무휴업하는 논리와 같다. 그런다고 전통시장이 살아나나?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나는 이것이 정치적인 논리이고, 기존의 구태 체제를 지키기 위한 보수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형마트나 원격진료 같은 최신의 자본주의 시스템들은 경쟁을 극대화시켜 양극화를 일으키고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다. 잘난 사람만 엄청 잘 나가고 나머지 애매한 사람들은 다 나가리 될 것이다. 이것은 또 진보적 가치와 상충된다. 나도 이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의사 조합이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때론 파업까지도 불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의사 노조라도 이렇게 강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다른 노동자들도 자신들이 불리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의사 협회의 원격진료 반대는 본인들의 이해보다는 전략적인 반대라고 본다. 원래 요구했던 의료보험 수가 인상이 관철되지 않아서 원격진료를 화두로 전략적 반대를 하는 것으로 본다. 결국에는 소통의 문제고, 수가 현실화로 원격진료를 대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4.

원격진료 찬반으로 아내와 싸웠다. 나는 찬성이지만 아내는 반대다. 아내는 인기있는 의사라도 좀 차분하게 환자를 덜 받고 한 명 한 명 꼼꼼하게 진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원격진료로 의사들이 돈은 더 벌겠지만 결국 진료의 품질은 떨어질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의사와 환자가 얼굴을 마주보고 진정성있는 진료를 해야 한다, 이런 얘기다.

하지만 나는 대면진료를 하던 원격진료를 하던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책임은 의사에게 있고, 그것은 환자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사는 반드시 환자를 잘 진료해야 하고, 방법이 바뀐다고 해서 품질이 떨어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원격진료는 진료를 편리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둘 다 맞는 말이지만,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거라, 타협의 여지가 없어 꽤 말싸움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진보쪽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념과 관련이 없는 사안은 결국 옮음과 옮음의 대결인지라 잘 결론이 나질 않는다.


5.

아내가 모닝을 사고 많이 억울해한다. 전에 타던 차보다 차선을 바꿀때 잘 안 끼어주고, 파란 불 받고 출발할때 뒤에서 빨리 가라고 빵빵거리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경차라서 무시하는 거다.

이게 사람들이 너무한게, 약자를 괴롭힌다. 차가 작고 느리고 싸다고 막 대한다. 아니 그래봤자 교통수단에 불과한데, 왜 빵빵거리고 안 껴주는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내가 모닝을 몰면 덜 무시한다. 나는 일단 남자고, 겉으로 보기에 골격이 큰 편이라, 특히 창문을 내리고 팔을 바깥으로 걸치면 사람들이 조금 위협적으로 보는 모양이다. 강해보이면 함부로 하지 못한다. 아 정말 왜들 이래.

고민 끝에, 아내 차에 해병대 스티커를 붙여줬다. 원래는 (대통령 차량처럼) 본네트 양쪽에 태극기도 달려고 했는데, 아내가 쪽팔리다고 그것까진 하지 못했다.

결과는 훌륭했다. 해병대라는 완장을 찬 것 만으로 사람들이 훨씬 덜 무시했다. 빵빵거리는 것도 확 줄었고, 잘 껴주기도 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 씁쓸했다.


6.

애국보수를 표방하는 분들을 보면, 마치 모닝에 해병대 스티커를 붙인 것 같다.

그리고 진보가 분열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진보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문제를 넘어 그 다음 단계로 진행했기 때문에, 진짜 삶의 문제로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

(2014년 9~10월) 홍콩 민주화시위에서 전략적으로 노란 리본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세월호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세월호 운동은 여러가지로 아쉬운 결과를 남겼지만, 그래도 최근의 세계 정치 상황을 볼때 여러모로 다른 나라들의 부러움을 살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진보가 너무 멍청하고 나약하지만, 이마저도 못하는 나라들이 수두룩하다. 아쉽고 더 잘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정말 감사하고 수고하셨다.

한편 노란리본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블루리본이 나왔는데, 그럼 이들은 극우라고 해야 하나? 공산당이 좌익이니 극좌라고 해야 하나? 이런걸 고민해보니 역시 좌우 이념의 시대는 이미 지난 것 같다.

하여튼 애국보수 세력은 어느 나라나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 씁쓸했다.


8.

나는 한국이 정말 빨리 바뀐다고 생각한다. 빨리빨리 정신, 냄비 정신으로 나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그만큼 많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운동으로 안전 부분도 정말 빨리 바뀌고 있다.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도 안전 표지판이 새로 붙었고, 광역버스도 갑자기 입석 금지를 추진했고, 요즘 이상하게 동네 차들이 신호등도 잘 지키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뀌자면 빨리 바뀌는 사람들이 보수일리가 없다. 나는 한국의 국민성은 기본적으로 진보라고 생각한다. 잘못을 알기 전까지는 무심하지만, 일단 잘못됐다 싶으면 그 누구보다도 당장 빨리 바꾸지 않으면 성화가 나는 민족이다.

이런 무서운 추진력, 비록 엉성하고 삐걱거리지만 어찌됬건 빠르게 해내는 능력이 우리의 민족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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