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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자동화와 굴 까는 기계와 텍사스 닭똥 빙고

17/03/15 03:55(년/월/일 시:분)

내 직업이 컴퓨터 쪽이라 말하자면, 컴퓨터가 뭐에 좋냐?고 묻는다면,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준다고 답하겠다.

그러면 일자리가 줄지 않느냐? 그렇다. 그럼 일자리를 잃으면 뭘 먹고 살거냐? 라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http://xacdo.net/tt/index.php?pl=1423
『 노동의 종말 』

컴퓨터의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 생각을 해보니까
사람의 일을 기계한테 대신 시키는 거잖아.

고생은 안 해서 좋은데
사람이 필요가 없어지잖아.

이래도 좋은걸까?


앤드류 응 교수님은 이 질문에 답으로 "기초 소득"을 말씀하셨다. 인간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노동하지 않아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근데 기초 소득이 답일까? 이것은 심지어는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을 신성시했던 사회주의 운동보다도 훨씬 유토피아적이다. 일을 안 해도 먹고 살게 해줘야 한다니! 너무 무임승차 아닌가?

기초 소득은 매우 좌파적이고 엘리트적인 아이디어다. 모두가 품위있게 질서를 지키고, 내가 남보다 못 벌 수도 있다는 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경쟁에서 낙오하더라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다, 물질적 풍요가 전부가 아니라 나의 자존감과 신성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굳건한 신념이 있어야 이런 기초소득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나마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 세대는 쉽게 받아들일지 몰라도(특히 득도 세대, N포 세대에게 어필할듯), 전쟁을 겪으며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길거리에 송장들이 즐비했던 시대를 겪고, 거기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신분 상승을 경험했던 국제시장 세대에게 이런 순진하고 나약한 생각이 어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세상 허투루 살아서야 나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이 있겠냐고 하시겠지.

그나마 우파를 설득할 아이디어를 찾는다면, 복지 대상을 선별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한국도 이미 기초생활수급자에게 1인가구 49만원 ~ 5인가구 158만원씩 지급하고 있고, 이런 대상을 선별하고 행정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을 줄이면 (추가 재정 없이도) 월 50만원을 60-70만원까지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이런 행복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데 사실상 하나뿐인 정답을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심지어는 지금 기초소득이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조차도 받아들이지를 못하시고 굳이 얼마 되지도 않는 폐지를 주으러 다니시고, 폐지가 아니면 태극기라도 흔들면서 뭐라도 몸을 열심히 움직여야 돈이 나오는 세계관을 가진 분들을 보면, 과연 먹고 사는데 일을 하지 않고, 연금도 용돈도 아닌데, 잘 사는 사람부터 못 사는 사람까지 일정하게 돈이 따박따박 나오는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으실까 모르겠다. (국가 재정은 둘째 문제고)

물론 사람들이 받아들일지 말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기초노령연금과 기초생활수급으로, 금액은 적지만 사실상 기초소득과 비슷한 복지 제도가 이미 시행중이고, 이것들의 금액만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천천히 인상해도 기초소득과 비슷한 형태로 (큰 저항감 없이) 정착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언론에서 이슈화하고, 정치인들이 어떤 편으로 자기 입장을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흔들릴 여지가 있다. 즉 재정보다 여론이 훨씬 중요하다)




그럼 자동화를 하지 말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아니, 그래도 하고 싶다고 답하겠다. 나는 컴퓨터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손으로 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 왜 굳이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시는가 싶다.

TV에서 굴 까는 모습을 봤다. 다른 해물과 달리 굴은 모양이 울퉁불퉁해서 굴 까는 기계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걸 아주머니들이 일일이 손으로 까고 있었다. 추운 공장에 수십명이 모여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산더미같이 쌓인 굴을 기계적으로 까고 계셨다. 아니 이게 무슨 고생이야 싶었다. 낭비로 보였다.

무한도전 극한알바에서 정형돈이 굴까기 알바를 한 적도 있지만, 1kg에 2000원짜리다. 10kg 까는데 숙련자는 1시간 걸린다 했지만, 정형돈은 8시간 걸렸다. 시급 2500~20000원인 셈이다. 초심자의 경우에는 최저 시급도 못한 돈이지만, 숙련자의 경우에는 수입이 상당히 쏠쏠한 편이다.

그런데 굴 까는 기계가 없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만들기 어려울 뿐이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난 박람회에서 오징어 다듬는 기계도 봤다. 2천만원이 넘는 고가였지만, 그냥 생물 오징어를 넣으면 알아서 내장을 빼고 살을 다듬어 나오는 기계였다. 굴 까는 기계는 그보다 복잡하니 한 1-2억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문제는 굴 까는 기계를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온갖 기계를 만드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정도 기계를 못 만들리가 없다. 문제는 굴 까는 기계를 만든 다음이다. 기계로 사람을 대체하면, 그 일자리는 없어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거기서 굴을 까시던 시급 2만원짜리 아주머니의 일자리는 어떡하나? 재교육을 시켜서 시급 2만원에 준하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까?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려운 것이, 굴 까시던 분께서 갑자기 앞으로 필요한 기계 학습 엔지니어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기초소득을 받아들이기엔 수입이 너무 크게 추락한다.

굴 까시던 고소득 아주머니들께, 재교육도, 기초 소득도 왠지 너무 먼 얘기처럼 들릴 것 같다. 그 분들이 그런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무리 이런 추세가 대세라 하더라도, 이런 분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추세가 아닐까? 일부 교수들과 엔지니어들과 사업가들만 좋은 세계가 아닐까?



또 하나의 단상. 텍사스 오스틴의 한 술집에서는 닭똥 빙고를 한다고 한다. 술집 한 가운데 무대에 빙고판을 놓고, 닭을 올려놓는다. 그러면 닭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똥을 찍 싼다. 그 숫자를 찍은 사람이 당첨이다! 나는 너무 더럽고 촌스러워서 경악했다.

http://www.theguardian.com/travel/video/2012/oct/17/ginnys-little-longhorn-chicken-shit-bingo-austin-video

미국이 선진국이라 하지만, 어딘가 텍사스 촌동네에서는 닭똥 빙고 같은 걸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 다 실리콘밸리나 월스트리트에서 우아하게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엘리트들이 소수일 것이다.

여전히 미국인들의 대다수는 연봉 2만-3만달러를 받으며, 가끔 닭똥 빙고 같은 촌스러운 취미를 즐기며, 트럼프를 찍으며 살 것 같다. 직업 재교육이나 기초소득은 커녕, 당장 월급에서 몇십불이 더 나간다고 오바마케어를 싫어한다. 그만큼 수입이 빠듯하다는 얘기고, 병원에 가는 것도 돈 나간다고 싫어할 것 같다. 아프면 그냥 이러다 죽고 말지! 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다.

멍청하고 한심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세상의 다수는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지의 유비도 자신을 지지하는 민중들을 꿋꿋이 데리고 다녔던 것처럼, 이런 한심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품고 가야 비로소 정치가 인간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동화 같은 문제를 해결할 때, 엘리트주의냐 대중주의냐 갈림길에 설 때가 있다. 이럴 때 이 둘 간의 균형은 결국 인본주의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동화 추세가 맞다고 해도 인간을 소외시키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http://rense.com/general51/elitsm.htm
Elitism Vs Populism



과거의 역사를 보자. 예전 산업혁명 때를 돌이켜보면, 전환기 70년간 임금이 20% 감소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고통스러운 전환기 이후에는 다시 임금이 상승했지만, 운 나쁘게 전환기에 걸린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에게 70년은 평생일 수 있다.

http://www.bloomberg.com/view/articles/2017-02-16/industrial-revolution-comparisons-aren-t-comforting

임금이 줄어들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될놈될, 안될안이라 되는 쪽에다 생산성을 몰아주기 때문에 (전체적인 생산성은 늘어나더라도) 불평등은 심화된다. 역사상 불평등을 완화시켰던 요소는 전염병, 혁명, 전쟁, 국가의 몰락 같은 대재앙 뿐이었다.

http://www.theatlantic.com/business/archive/2017/02/scheidel-great-leveler-inequality-violence/517164/?utm_source=atlfb

결국 시대의 변화에 못 따라가는 사람들이 죽거나 죽음에 가까운 몰락을 겪어야 불평등이 해소되었다. (원래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참으로 절망적이다) 지금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지능화, 자동화 추세도 비슷한 식으로 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나는 전쟁은 안했으면 좋겠고, 지진이라던가 전염병 같은 자연 재해도 가능하면 안 겪었으면 좋겠고, 사회주의 혁명 같은 이념의 시대도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개인적으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의 지능화, 자동화 추세를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건, 독일의 산업 4.0 을 약간 과장해서 말하는 거라, 지금까지의 1~3차 산업혁명만큼 파괴적일지는 의문스럽다. 내가 보기에도 그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다. 그만큼 효과는 적당하겠지만 부작용도 적당할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불황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적당히 고통스럽고 적당히 미적지근하게 질질 끌다가 적당적당히 지나갈 것 같다.



하여튼 내가 하는 일이 사람이 하는 귀찮고 반복적인 일을 컴퓨터로 대신하게 하는 건데, 생각보다 잘 돌아가서 앞으로도 그런 쪽으로 많은 것들이 흘러갈 것 같다. 그러는데 내가 하는 일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면이 있어, 혹시 나쁜 일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http://hbr.org/2016/11/what-artificial-intelligence-can-and-cant-do-right-now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데 1초 안쪽으로 걸리는 일들은,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으로 자동화가 가능할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정확도가 100%가 아니라 97% 정도 되면 되는 일들은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인공지능은 100%가 거의 안 된다. 컴퓨터가 하는 일 치고 이상하지만)


나는 지금 시대가 불황이지만, 물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마트에 가면 다들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훌륭한 제품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자원도 풍부하고, 공장도 충분하고, 인력도 충분하고, 재정도 확장하고, 하여튼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다. 음식도 너무 먹어서 걱정인 시대다.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에 왜 불황이 오나? 그럴 때 나는 통영에서 굴 까는 아주머니들과 텍사스 오스틴 술집의 닭똥 빙고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분들과 싸우는 모습을 생각하고, 화해할 모습을 생각하고, 같이 살 세상을 생각한다.

나에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솔직히 아직도 정확한 답을 잘 모르겠고,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순진하기도 하고 오만하기도 하고 자기중심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현재까지 내가 생각한 방향은 이런 쪽이다. 전부 다 기술적이거나 제도적으로만 푸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여지를 남겨놓고 가면 좋겠다.

나도 그게 정확히 뭐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지난 산업혁명때처럼 전환기가 70년씩 걸릴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당분간만이라도, 잠깐 쓰고 버릴 임시 대책이라도,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으로 20년 정도 억지로 일자리를 만들어낸 것처럼, 굴 까던 분도, 닭똥 빙고하던 분도, 폐지를 줍던 분도, 태극기를 흔들던 분도 하여튼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니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란다.


+ 3.23 추가

자동화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추세에서 나같은 컴퓨터 엔지니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원래 하던 일에 더욱 매진해서, 잘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동화가 빨리 잘 될수록, 그 전환기가 짧아져서 덜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http://weekly.donga.com/List/Series/3/990436/11/874337/1
4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지나치게 빨리 발전해 기존의 숙련 기술이 쓸모없게 된다고 걱정하지만, 현실은 생산성 발전이 저조해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솔로 MIT 명예교수는 1987년 “컴퓨터 시대가 도래했음을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다. 단, 생산성 관련 통계는 빼고”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이 너무 빨리 도래해서가 아니라 20세기 말 이후 기술혁신이 충분히 빠르고 광범위하지 못해 생산성 향상이 정체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생산성이 급격히 증대될 때 쓸 수 있는 정책 수단은 생산성이 정체될 때 쓸 수 있는 정책 수단보다 훨씬 많다. 가장 손쉬운 대책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늘려 일자리를 나누는 것이다.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감소 충격이 사라진다. 더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된다.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2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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