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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들 - 스토리

빈 문서

06/01/05 10:24(년/월/일 시:분)


딸깍.
빈 문서를 연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이 나타난다.

시간이 없다. 찰나의 착상이 사라지기 전에 문자화 시켜야 한다.
손가락은 바쁘게 키보드 사이를 배회한다.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달각
째각 째각 째각

손가락이 멈춘다. 아차. 손등으로 이마를 쓰다듬는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였는데. 뭐였지. 그건가. 아니 저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마신다. 거실에서 원형으로 움직여본다. 발을 움직이고 손을 움직이고 머리를 움직여본다. 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미 시간은 가버렸다. 최초의 발상은 잊혀졌다.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쓰기 시작할 때부터 작동한 타이머는 잔인하게도 작동을 멈춰버렸다. 이제 더 이상 떠올리려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채 끝을 내지 못한 글을 보며 생각에 빠진다. 이걸 어쩌나. 원고지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북 찢어서 구겨 던져 버릴 타이밍이다. 하지만 컴퓨터 시대에는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Ctrl+A로 전체선택을 한 후 Del키를 누른다. 물론 Ctrl+Z로 Undo를 하면 바로 돌아오기 때문에 좀 김이 새긴 한다. 결국 나는 차마 써놓은 글이 아까워서 지우지 못한다.

잠시 인터넷을 해볼까. 평소 들리던 개인 홈페이지를 순회해볼까. 마우스로 이곳 저곳을 클릭하며 빠르게 글을 탐색해나가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까. 그림도 잘 그리고. 하지만 이 사람들의 문제점은 단 하나 뿐이다. 돈을 댓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업데이트가 느리다는 것. 결국 다 돌아봤자 20분 남짓한 시간일 뿐이다.

결국 나는 어떻게든 포기할 궁리를 짜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아~ 역시 난 안돼. 오늘은 그만 자자." 하면서 잠자리에 누워버릴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안될까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뭔가 떠오를까. 아직 차마 닫지 못한 빈 문서 창을 지나치며 윈도우 탐색기를 연다. 전에 받아놨던 애니메이션을 더블클릭한다. 윽 역시 재미없어. 3분쯤 보다가 닫아버린다. 내친김에 파일도 지운다. 휴지통도 비운다. 이젠 다시 볼 수 없을꺼야. 이런 젠장.

뭘 위한 젠장인지 모르겠다. 애니메이션을 위한 젠장인지 나를 위한 젠장인지. 어찌됬건 이젠 더 할 것도 없고 피곤하기도 하다. 대충 아무 이름으로나 문서를 저장하고 시스템을 종료하고 모니터를 끄고 침대에 털석 누워버린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본다. 컴퓨터는 기익-긱- 하는 하드디스크 읽는 소리를 내며 열심히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 윈도우 2000이 종료가 좀 느리긴 하지. 잠은 잘 오지 않는다. 뒤척이며 자리를 고르는데 위이잉- 하면서 컴퓨터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랬나. 그렇구나. 그건 그거였지. 이제서야 생각이 나다니. 컴퓨터도 껐고 막 잘려고 했는데 왜 이제서야 생각이 나는거야.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전원을 넣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밝게 빛나는 부팅 화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는 구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젠장 오늘도 잠은 다 잤군.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2003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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