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0/05/22 14:59(년/월/일 시:분)
IT 직종, 특히 SI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은 야근이다. 맨날 늦게 가는 건 물론이고 주말이나 휴일까지 반납해서 끝도 없이 일해야 겨우 마감에 맞출 수 있다. 친구들이랑 술도 마시고 싶고, 애인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도 싶고, 가족들과 외식이나 놀이공원이라도 가서 가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은데, 왜 회사에서는 일만 시키는 거야?
...라고 하지만 실은 IT만 야근하는 건 아니다. 가까운 곳으로 그래픽 디자이너들도 밥먹듯이 야근하고, 만화가도 야근하고, 영화 찍는 분들도 연예인이건 스탭이건 할 것 없이 야근하고, 무한도전 찍는 김태호 PD도 야근하고, 유재석 박명수 등 개그맨도 야근하고, 직원도 야근하고, 사장님도 야근하고, 프리랜서도 야근하고, 심지어는 집에서 TV보는 시청자도 게임하는 사용자도 다들 한 마음 한뜻으로 야근한다.
아니 도대체 왜들 이렇게 야근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구글을 검색했다.
http://www.eurofound.europa.eu/ewco/reports/TN0608TR01/TN0608TR01_9.htm
직업만족도 설문
- 주당 45시간 근무가 가장 만족도가 높고, 그보다 적거나 많아지면 만족도가 떨어진다.
- 초과근무는 많을수록 나쁘다.
- 출퇴근시간은 자유로울수록 좋다.
음... 흔히 정규직 근로조건이 주당 40시간인 것은 아마도 그 시간이 가장 만족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가 '칼퇴근'을 좋게 생각하고 주말에는 쉬는 걸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렇게 일하는게 심리적으로 가장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http://en.wikipedia.org/wiki/Eight-hour_day
The eight-hour day movement or 40-hour week movement
...주당 40시간 근무도 노동자들이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히려 더 적게 일해도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 적어도 하루에 8시간은 일해야 그래도 내가 좀 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사람 마음이란 참 ㅋㅋ
그렇다면 이렇게 오래 일할수록 직업만족도가 떨어지는데도 오래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근로시간은 OECD 국가 중 가장 길며, 특히 재벌기업의 근로자들이 특히 오래 일한다.
http://en.wikipedia.org/wiki/Working_time#South_Korea_and_Japan
ILO에 따르면 한국은 법정 근로시간 40시간, 50%이상 초과근무 금지 등 법적인 조건이 갖춰줬음에도 불구하고 초과근무가 많은 특별한 케이스로 보고 있다.
http://kids.donga.com/news/vv.php?id=20200706085305
유엔 국제노동기구(ILO)가 2004∼2005년 기준으로 41개국의 장시간 노동 빈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절반(49.5%)이 주 48시간 이상 일해 페루(50.9%)에 이어 2위였다고 7일 밝혔다. ILO 관계자는 한국의 ‘장시간 노동’에 대해 정부는 법정노동시간을 줄였지만 제조업 근로자들은 연장근로(잔업 등)를 통해 소득을 늘리려는 경향을 보이고, 사무직은 고유한 조직문화 때문에 실제 노동시간이 줄지 않고 있다면서 ‘예외적’ 사례라고 분석했다.
http://www.koilaf.org/KFkor/korNews/bbs_read_dis.php?board_no=4073
ILO ‘세계의 근로시간: 주요 연구내용과 정책함의’ 주요내용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오래 일할까? 나는 이에 대한 학문적인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은, 선진국 중에 유난히 근로시간이 긴 미국을 찾아보기로 했다.
http://www.forbes.com/2006/05/20/steven-landsburg-labor_cx_sl_06work_0523landsburg.html
왜 미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 오래 일하나
- 미국은 유럽보다 생산성이 높은데도 오래 일한다.
- 1970년대까지는 유럽인이 더 오래 일했으나, 그 후 역전되었다.
- 그 이유는 그동안 유럽의 최고 세율이 40% -> 60%대로 20%나 높아졌고, 미국의 노조 조직률이 20%인 반면 유럽은 80%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2가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1. 미국식: 세율을 낮추고 노조를 안 만들면 더 오래 일하고 돈을 더 번다. 대신에 직업 만족도가 떨어진다.
2. 유럽식: 세율을 높이고 노조를 조직하면 덜 일하고 휴가를 간다. 대신에 돈을 덜 번다.
즉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근로 조건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고, 세율을 낮추고 경쟁을 강화시켜서 다들 바쁘고 정신없이 살기를 바란다. 그러던 중에 실패하면 망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을 사회적으로 보호하기보다는 그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위기위식을 불어넣어서 전체적인 성장을 빠릿빠릿하게 한다.
실제로 미국은 정규직이 따로 없을만큼 근로조건이 열악하다. 1주일에 80시간에서 100시간씩 일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맨하탄 지하철을 보면 새벽 2~3시에 양복입은 중년 남자가 꾸벅꾸벅 졸면서 퇴근한다. 언제 짤릴지도 모른다. 실적이 안 좋으면 당장 짐 싸서 나가야 한다.
구글도 평균 연봉이 2억이 넘지만, 일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서 대체로 다른 데선 100명이 할 일을 3명이 하고 그런다. 당연히 업무강도가 높을수밖에 없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도 내부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팀을 2~3개씩 만들어서 사내 경쟁을 시킨다. 이기지 못하면 더 일할 수 없다.
미국인들은 이런걸 원했기 때문에 공화당을 뽑았을 테고, 그래서 공화당은 세금을 낮추고 경쟁을 촉진시켰을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맨날 늦게 가는게 아닐까.
http://www.msnbc.msn.com/id/8304412/
왜 미국인들은 오래 일할까?
경제적인 요소도 있지만, 바쁘게 살고 싶은 욕망도 있다.
http://xacdo.net/tt/index.php?pl=832
일과 삶의 조화 work / life balance
반면 유럽은 현재 삶에 만족하고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돈을 더 벌기보다는 휴가를 더 가기를 원한다. 멋지게 성공하기보다는 지금과 같은 안정을 누리기를 바란다.
왜 이런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는 혹시 이것이 미국과 유럽의 천연자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은 앞부분과는 달리 나의 가설이다.
시작은 북유럽이었다. 북유럽 4개국은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복지국가를 꿈꾸는 나로서는 매우 이상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북유럽을 복지국가로 만들었나 궁금해서 조사해보았다.
북유럽의 특징은 일단 인구밀도가 낮아서 무척 한산하지만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번다. 여기에 바이킹으로 유명했듯이 과거 약탈과 침략으로 벌어놓은 자본이 있다.
즉 애초에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일을 오래 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삶을 누렸고, 이를 바탕으로 경쟁을 유발하기보다는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정치적인 성향이 생겨서 현재와 같은 복지국가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게 내 추측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나도 복지를 하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많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것도 자본의 문제였다. 돈이 있어야 뭘 하던 말던 하지. 그런 면에서 북유럽은 이미 돈을 충분히 벌었기 때문에 복지국가로 이행한 것이 아닌가 싶다.
http://www.amazon.com/Crude-Democracy-Political-Cambridge-Comparative/dp/0521730759
Crude Democracy: Natural Resource Wealth and Political Regimes
원유 민주주의: 천연자원 부와 정치 제도
- 풍부한 천연자원은 권위주의도 증진하지만 민주주의도 증진한다.
미국은 척박한 동네다. 유럽이 싫증난 사람들이 굳이 배를 타고 건너가서 죽을 고생을 하며 개척한 동네다. 대부분이 사막이고, 뭔가 땅에서 얻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나는 미국의 각박한 업무 문화가 실은 이런 척박한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도 그런면에서는 미국과 일맥상통한다. 비루한 천연자원, 땅에서 뭔가 얻을만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맨날 일에 매달려 살아야 한다.
반면 젖과 꿀이 흐르는 유럽의 비옥한 토양은, 딱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들을 배불린다. 그렇다보니 굳이 개척하거나 도전하거나 경쟁할 필요 없이 딱 지금처럼만 살고 싶어한다.
또는, 다큐멘터리 '대국굴기'에서 강대국의 조건이 강력한 군사력, 침략하고 약탈하여 자국의 이익을 얻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과거에 식민지배를 했던 나라들이 대체로 풍족하게 사는 것 같다. 그리고 식민지배를 당했던 나라들이 대체로 근무조건이 열악하다.
즉 나는 이런 야근이라던가 하는 척박한 업무환경이 척박한 토양, 또는 침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절망스럽지만.
하여튼 결론을 내리자면
- 칼퇴근, 주당 40시간 근무를 바라는 이유는 생산성이 높아져서라기보다는 심리적 만족도가 크기 때문이다.
- 한국의 근로시간은 (굳이 IT만이 아니더라도) 심각할 정도로 길다.
- 이를 개선할 법적인 정비는 충분히 된 상황이지만, 그 전에 사람들의 정치적인 성향이 근무시간을 길게 한다.
- 근무시간을 줄이려면 (특히 고소득층의) 세율을 높이고 (재벌기업 중심으로) 노조를 조직하면 된다.
+(가설) 물론 그 이전에 천연자원이라던가 식민지배라던가 해서 국가적인 부를 충분히 갖춘 후에 복지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야근 문화에는 정치적 성향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고, 내 예상으로는 적어도 다음 정권까지는 현재와 같은 성향이 지속될 것 같다. 또한 정치적 성향이 바뀌더라도 충분한 국가적 부가 뒷받침하지 않는 한 근로시간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문화를 이마트 문화, 총알택배 문화로 부르고 싶다. 좀 더 좋은 제품을 싸고 빨리 많이 가지고 싶은 마음.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대세를 이루는 한 지금과 같은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배가 불러서, 별로 싸지 않아도 좋아, 별로 안 급해, 그 정도면 충분해... 라고 생각하는 시점이 되야 실질적인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