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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컴퓨터의 미래

08/01/01 22:02(년/월/일 시:분)

어학연수의 마지막 발표가 자유주제라서 나는 PMDD를 해볼까, 아니면 세계제일의 롤러코스터를 해볼까, 고민하다가 내 전공에 대해서 얘기하기로 했다.

http://xacdo.net/tt/index.php?pl=849
PMDD - 정신적으로 위태로울 지경으로 심한 생리통. 가임기 여성의 3~5%가 겪고 있다.

http://xacdo.net/tt/index.php?pl=855
세계에서 제일 빠르고 높은 롤러코스터 - 킹다 카 (Kingda Ka)


자료조사야 다 끝났고, 사실 위 주제들도 충분히 흥미롭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컴퓨터에 대해 얘기하게 된 것은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 미래에는 뭐 할거냐?
비비안: 나는 패션 비즈니스를 할 거다.
나: 그래? 나는 나중에 컴퓨터 회사를 차리고 싶다
비비안: 왜 식품 회사가 아니고? 너는 먹는 걸 매우 좋아하잖아. (진지하게)
나: (울컥)

내가 아무리 먹는 걸 좋아한다지만 너무하잖아... 싶어서 울컥. 그래서 내가 왜 컴퓨터를 전공하는가 설명하고 싶었다. 난 사실 먹는 것보다 컴퓨터를 더 좋아한단 말이야! 흥.


근데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조사는 막상 "컴퓨터의 미래; 컴퓨터는 인간을 얼마나 대체할 것인가"라는 무거운 주제를 잡으면서 더이상 전혀 가볍게 되지 않았다. 거진 한달을 인터넷을 뒤졌고, 발표 전날에는 인터넷만 7시간을 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질 않았다.

원래 나는 "컴퓨터의 한계는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컴퓨터가 인간을 대체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컴퓨터는 미래에도 이러이러한 역할에 머물러있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려 했다.

하지만 그 한계라는 것이 딱 고정된 게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라서, 여기 인터넷 자료에는 이렇게 나왔던 것이 저기 인터넷 자료에는 저렇게 나와있고, 이제 결론을 내려 치면 어디선가 새로운 한계가 불쑥 나오고.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끝이 안 날 수밖에.

그렇다고 그냥 "컴퓨터의 한계는 없다"고 끝내는 것도 무책임한 것 같아서, 나름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하려 했으나 그게 쉽지가 않더라. 아주 간단한 예로 KLDP에서 벌어졌던 CPU 발전의 한계에 대한 댓글 토론을 보자.

http://kldp.org/node/79146
KLDP - 최근 CPU 발전에 관한 잡설

이건 어떻게 발견했냐 하면, 근 몇년간 CPU 클럭이 3GHz 이상 되는 게 잘 안 나왔잖아. 인텔이나 AMD나 클럭 경쟁은 거의 포기한 것 같고, 특히 노트북용 CPU는 날이 갈수록 클럭이 떨어지고. 그래서 이제 클럭의 한계가 왔나보다 싶었는데.

위 글에서 둘이 싸우는 것을 보면, 한쪽은 "내가 회사에서 일해봤는데 한계가 있긴 있더라"는 입장이고, 한쪽은 "내가 연구실에서 일하는데 그런 한계는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건 연구실에서나 가능한 거지, 대량생산은 힘들다" 했더니 "대량생산이 안 될 것도 없다"고 반박하고, "그러려면 아주 비싼 재료를 써야 한다"고 하니까 "요즘 그거 가격 많이 떨어졌다"고 반박하고... 거진 현실론과 이상론을 떠나서, 도대체 어디까지를 기술의 한계로 봐야 하나 모호한 지경까지 박터지게 싸우더라.

하기야 원래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유니버설 튜링 머신, 즉 모든 수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 기계니까, 불가능한 게 없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인데, 어떻게 하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유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니까. 즉 CPU 속도만 빨라져도 컴퓨터로 가능한 일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CPU 속도 경쟁이 중요한 것이다.

자, 이쯤 되면 P대 NP가 나올 법도 하다. 즉 컴퓨터로 빨리 풀리는 문제, 그러니까 한 3-4초만에 풀리는 문제와, 한 10년 100년 천년 만년씩 걸리는 문제를 구분하는 것. 그래서 NP-complete는 쉽게 안 풀리는 것으로 한계를 지으려 했다.

http://www.xacdo.net/tt/index.php?pl=580
P 대 NP - 컴퓨터로 잘 풀리는 문제 vs 잘 안 풀리는 문제

그런데 그런데... NP 문제를 해결하는 컴퓨터가 현재 개발중이란다. 양자 컴퓨터라고. 1984년에 이론적으로 완성되었고, 2001년에 IBM에서 아주 간단한 실험이 성공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몇십년 안에 시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컴퓨터의 근본부터 다시 써야 할 판인데...

http://mrm.kaist.ac.kr/qc/
KAIST - Quantum Computer

http://blog.naver.com/freework/10982200
양자역학의 철학적 이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482529
파인만의 엉뚱 발랄한 컴퓨터 강의 (계산이론) Lectures on computation
1983~1986년 책인데도 아직까지 통한다. 컴퓨터공학처럼 시류에 민감한 학문의 전공서적이 2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쓰이는 건 매우 드물다.


그러니까 내 나이 40대 50대에 현재 쓰이는 컴퓨터와 근본부터 다른 양자컴퓨터가 출현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난 그 나이에 공부를 새로 해야 하는 것인가... 정말 컴퓨터공학은 아직도 초창기다. 나온지 50년밖에 안 됐잖아.

게다가 양자 컴퓨터가 가능해진다고 해도, 그걸로 도대체 뭘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애초에 튜링 머신이나 양자 컴퓨터나 다 유니버설, 즉 모든 수학적 문제가 해결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경제적으로 봐도 컴퓨터는 모든 산업을 먹어치우고 있다. 금융, 제조, 패션, 유통, 미디어 등 가능한 모든 곳에 IT와 IS가 파고들고 있다. 왜냐하면 컴퓨터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

컴퓨터는 인간을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한계는 잘 모르겠다.

간단한 예를 들어 자동판매기를 보자. 옛날에는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사람이 간단한 먹을거리를 팔았는데, 이제 그 자리를 사람 대신에 컴퓨터가 팔고 있다. 지하철을 가도, 대학교를 가도, 회사를 가도, 옛날에는 사람이 앉아있던 자리에 사람 대신에 기계가 있다.

일단 사람이 단순 육체노동에서 벗어난 것은 환영할 만 하다. 역사적으로 봐도 노예제도는 산업혁명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사라졌다. 즉 기계가 노예를 대체했다고 볼 수도 있다. 기계는 사람처럼 피로도 없고, 인권도 없고, 파업도 안 한다.

그래서 기계가 사람의 육체노동을 대체한 것 까지는 좋은데, 그렇다면 기계가 사람의 정신적인 노동까지 대체할 수 있을까? 그것이 컴퓨터다. 컴퓨터는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을 대체하기 위해서 나왔다. 그리고 이론상으로는 컴퓨터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 인간 정신의 대체도 가능하지 않을까?

http://www.jabberwacky.com/
인공지능 채팅 프로그램. 컴퓨터가 답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8%EA%B3%B5%EC%A7%80%EB%8A%A5
위키백과 - 인공지능

http://xacdo.net/tt/index.php?pl=876
정성영 - 자아 이야기


현재 인공지능은 대체로 '패턴 인식'에 주력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 양식 중에 특정 패턴을 파악하여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활에서 불규칙한 부분이 아니라 규칙적인 부분을 찾아내서 컴퓨터로 흉내내는 것이다.

자동 작곡 프로그램 band-in-a-box의 예를 들면, 거기에는 루이 암스트롱, 팻 매서니 등의 유명 뮤지션의 패턴이 입력되어 있다. 그래서 루이 암스트롱을 선택하면, 그 사람 스타일을 흉내낸 패턴이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의외로 듣기 좋다.

http://xacdo.net/tt/index.php?pl=835
생각해보니까 즉흥연주는 band-in-a-box 같은 프로그램으로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즉흥연주가 어렵기는 해도 꾸준히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정해진 범위 안에서 적절한 조합만 만들어내면 되니까.


즉 컴퓨터는 인간의 생활 중에 규칙적인 부분을 흉내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인간의 생활이 전부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컴퓨터는 사람과 완전히 똑같을 수 있다. 육체적으로도 똑같고, 정신적으로 똑같고.

이건 환원론적인 생각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패턴으로 분해해서, 그 패턴을 조합하면 다시 인간이 나올 것이다 하는 생각. 마치 시계를 부품으로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면 똑같은 시계가 나올 거라는 생각인데.

과연 인간을 규칙적인 패턴의 조합으로만 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이게 뭐 증명 가능한 얘기도 아니고. 귀신이 있다 없다 같은 명제니까. 앞으로 언젠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근데 상식적으로, 인간의 생활이 완전히 순리대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 살다보면 요행도 있고 불행도 있고, 랜덤도 있고 운도 있기 마련 아닌가?

http://xacdo.net/tt/index.php?pl=906
2008년, 운칠기삼

근데 이런 불확정성은 양자론의 불확정성과 매우 닮았다. 게다가 다음 세대의 컴퓨터가 양자 컴퓨터가 된다면, 컴퓨터가 이런 인생의 운까지도 흉내낼 수 있을 것이다. 규칙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부분까지도.

야, 그러면 진짜 컴퓨터랑 인간이 똑같아질 수 있는 건가.



그래서 결론.

컴퓨터의 미래는 잘 모르겠다. 컴퓨터 과학은 나온지 아직 50년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어디까지 가능한지도 잘 모를 정도로 앞으로 할 일이 많다. 그래서 나는 (이공계 위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전공했으면 좋겠다.

컴퓨터는 5년 전이 옛날일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그리고 당장 앞으로 5년도 내다보기 힘들다. 도대체 확실한 게 없다. 그만큼 기회도 많다는 얘기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컴퓨터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피곤할 것이라는 것. 컴퓨터를 연구하는 것 만큼은 컴퓨터가 대체할 수 없으니까.

앞으로를 내다보면 컴퓨터는 정말로 모든 것을 먹어치울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을 컴퓨터가 다 해버릴 것이다. 그 중에 컴퓨터가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성역, 컴퓨터를 개발하고 연구하는 곳으로 오기 바란다.

http://xacdo.net/tt/rserver.php?mode=tb&sl=881

  • 박군 08/01/02 00:34  덧글 수정/삭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이미 IT가 일상생활에 너무 깊숙히 들어왔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거라는 사실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에 따라 컴퓨터 역시 발전할 수 밖에 없겠죠. 과거사를 보더라도, 업적에 합당한 결과가 주어지든.. 주어지지 않던간에,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쟎아요.
    잘 읽고 갑니다. ^^
  • skibbie 08/01/02 01:57  덧글 수정/삭제
    뇌를 연구하는 것도 뇌가 하는 걸요. 언젠가는 컴퓨터에 대한 연구도 컴퓨터가 할 지도-_- 음??
  • skibbie 08/01/16 21:06  덧글 수정/삭제
    Nature neuroscience에 IA와 Brain research에 대한 책 리뷰가 실렸습니다. 여전히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 황재하 08/11/18 11:30  덧글 수정/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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